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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는 춥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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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주일 간 지옥에서 살다 온 기분이었다. 아니, 살다 온 것도 아니고 그냥 지옥에 내버려져서 그냥 살아 있는 기분이었다. 오래 끈 고통이라 더 그랬다. 작년 4월에 설마 내 인생이 좀 꼬이는 루트를 타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하고 생각할 만한 사건이 생겼고, 그 뒤처리를 하느라 회사도 다닐 수 없어 그만두고 2013년을 통째로 날렸다. 이제 그 일이 마무리 될 참인데, 마무리가 되면 시원섭섭할 줄만 알았다. 그런데 막상 마무리해보니 각종 원한과 분노, 슬픔과 울화가 뒤섞여 지옥의 칵테일이 되었고 나는 그 잔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신 셈이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기다리고 있는 게 새 인생이 아니라 회한과 증오라서, 잠도 별로 없는데 계속 일어날 힘이 없어 침대에만 누워 있다가 갑자기 토하기도 하고 어두우면 각종 헛것이 보였다. 오늘부터 겨우 일어나서 바깥 활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예스24. 내가 이곳에서 책 이야기를 하는 것이나, 읽어 주시는 분들의 댓글에 꽤 자주 마음이 따뜻했나 보다.


어쨌든 그 환청과 이명이 들리는 시간 동안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계속 애쓰며 떠올린 책이 있는데, 저번 『늙은 나귀 좀생이』 와 같은 전집에 들어 있던 『추위를 싫어한 펭귄』 이라는 책이다. 주인공은 파블로라는 펭귄인데, 추운 걸 몹시 싫어해 이글루 안에 난로를 들여놓을 정도다. 친구들은 해수욕이 아니라 설수욕이라고 하나, 그런 걸 즐기고 맨몸으로 얼음 같은 바다에 다이빙도 하고 눈 위에서 미끄럼도 타는데 혼자 장갑과 털모자를 쓴 파블로는 이런 게 다 싫다. 따뜻한 나라로 가고 싶어 궁리를 하다가 결국 배낭을 챙겨 뜨거운 물을 넣는 고무 주머니를 발에 붙인 뒤 남쪽으로 향하는데, 한 걸음 한 걸음 갈 때마다 뜨거운 물 때문에 바닥이 녹는다는 것을 깜빡 잊어버린다. 결국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된 파블로를 친구들이 네모 모양 얼음으로 잘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죽을 고생을 했지만 파블로의 따뜻한 나라를 향한 집념은 변함이 없다. 이번에는 아예 자기 이글루가 서 있는 나무를 톱으으로 오각형으로 잘라내 그대로 집으로 만든다, 친구들은 손수건을 흔들며 작별을 하고, 파블로는 털장갑을 낀 손(?)을 흔든다. 이제 남국으로의 미래가 펼쳐질 거라고 생각하며 기다리던 햇볕이 보이자 파블로는 너무나 행복한 표정으로 털장갑과 모자를 벗어 던지고 갑판에 대자로 누워 해를 만끽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 얼음집 배가 녹아 버리고 있는 것이다. 필사의 순간, 파블로는 욕조로 달려가 샤워기를 배수구와 연결해 일종의 욕조 모터 보트 같은 걸 만든다, 섬에 내려 보니 세상에! 바나나가 있다! 바나나를 까먹으며 파블로는 거북이가 가져다 주는 칵테일도 마시고 해먹을 달아 햇살을 즐긴다. 내가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구절은 마지막 한 문장 때문이다. “이제 다시는 춥지 않을 거여요.”

자살해 달라는 부탁까지 받은 마당에 내가 더 살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할 때마다 파블로가 속삭여 주었다. 지금은 따뜻한 나라로 가는 중이라고. 지옥의 밑바닥이 아니라, 포근한 나라를 찾아 가는 과정이라고. 그리고 그 나라로 가면, “이제 다시는 춥지 않을 거여요”라고. 아마 동화와 인생이 다르니까, 나는 따뜻한 나라로 가려면 아주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나 그 주문은 겨우 일어나서 따뜻한 나라로 갈 힘을 선사해 주었다. 이제 다시는 춥지 않을 거여요, 이제 다시는 춥지 않을 거여요. 펭귄은 펭귄답게 눈과 얼음을 좋아하는 게 정상이지만, 하필 당신도 추운 걸 싫어하는 펭귄으로 우연히 태어나고 말았다면, 주문을 외자.

이제 다시는 춥지 않을 거여요.
이제 다시는 춥지 않을 거여요.
그럼, 우리는 춥지 않을 것이다. 그렇고말고.


[관련 기사]

-김현진의 도서관 예찬
-김현진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준 최초의 책
-내가 이야기를 ‘쓰고’ 싶게 만든 어떤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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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 뒤집어보기 “어휴, 언니, 고생 많이 하셨구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현진은 소설 속 인물 중 누구와 가장 비슷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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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을 좀 풀자면, 어머니는 지브리에서 만든 빨간머리 앤을 텔레비전에서 해 줄 때 완전히 푹 빠져서 보실 정도였는데 내가 무심코 보고 계시지 않은 줄 알고 초등학교 시절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렸다가 따귀를 철썩 얻어맞을 정도였다. 그 다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비뚤어지기 시작하며, 왜 애를 낳아서 키운담 비쩍 말라서 주근깨 투성이에 상상 잘하고 트렁크 위에 앉아서 두 손을 모으고 마차에 흔들리며 집에 갈 길을 기다리는 여자애나 어디 가서 하나 주워 오지 않고, 하고 투덜거리는 삐딱한 여자애로 자라났다. 


덕분에 모든 소녀들의 친구인 앤은 나의 주적이 되어, 빨간머리 앤의 추억을 늘어놓는 사람들만 보면 ‘그래봤자 그 여자도 똑같은 여자다, 빨간머리에 빼빼 마른 시절은 한순간 뿐이고 그 목놓아 불만을 외치던 빨간머리는 결국 금갈색이 되었고, 빼빼 마른 몸매는 나중에 길버트와 경쟁자인 아가씨를 보면서 저 애는 나중에 뚱뚱해질 거야, 하고 우월감을 느끼는 소재가 된다, 그리고 결국 마슈 아저씨는 과로를 하다 죽었고 머릴러 아줌마는 레이첼 아줌마와 살림을 합쳐야 하지 않았느냐, 그것도 피 한 방울 안 섞인 그 앤이라는 년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매슈와 머릴러 아저씨를 부스터로 사용해 결국 의사 부인이 되고 만 독한 년이다!’라고 주워섬기면서 모두와 빨간머리 앤을 갈라놓는데 애를 태웠지만 다들 별로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고 나빠진 건 내 평판뿐이었다. 이런 젠장. 하여튼 나로서는 빨간머리 앤과 전혀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었고, 상상에 능하다는 것은 비슷했지만 죄다 아주 음울한 상상들이었고 전혀 앤처럼 해맑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공감이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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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빨간 머리 앤>


오히려 내가 공감을 느낀 캐릭터들은 브론테 자매의 작품들에 나오는 여자들이었다. 가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과 비슷하지 않으냐고 물어 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스칼렛과 정말 비슷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전 대통령 이명박이다. 그들의 외침은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귀 있는 자는 들어 보라! “나는 다시는 도둑질을 하더라도, 거짓말을 하더라도, 설사 살인을 하더라도, 절대 굶지 않아! 나는 부자가 되겠어. 아주 큰 부자가!” 둘 다 말한 것의 대부분을 성취했다는 것도 비슷하다. 게다가 스칼렛 오하라는 여학교에서 다른 과목은 다 틀려도 수학만은 아주 능했는데, 나는 능력별 수업에서 수학만은 전교 꼴찌 반이었으니 도저히 스칼렛 오하라와 비슷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굳이 비슷한 걸 찾자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첫 구절인 “스칼렛 오하라는 알고 보면 그리 미인은 아니었다(저자 주 : 그렇지만 남자를 꽤나 많이 낚았다는 의미임).”정도겠지만, 그것 말고야 뭐. 굶기를 싫어한다는 것도 비슷하겠지만, 내가 바로 이거야, 하고 생각하는 것은 브론테네 여인들이다. 


혹시 제인 에어냐고? 무슨 소리, 그 강단 있고 삐쩍 마른 지고지순한 아가씨가 나와 비슷할 리가. 정말 엉큼하기로 따진다면 레트 버틀러와 문학계에서 첫째 둘째 자리를 다툴 로체스터가 제인 에어의 질투심을 자극하기 위해 불러들인 로자몬드 올리버가 바로 그 첫째 주인공이다. 물론 가슴이 크고 당당한 체형은 전혀 다르지만 성격(싸가지)는 상당히 닮은 듯한데, 로체스터에게 무슨 노래를 부르라고 시키면서 외친 한 마디의 대사가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나에게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이것이 여자로서 갈 길이 틀림없다! 단역 중의 단역 로자몬트 올리버가 무어라 외쳤는가 하면 다음과 같다. “왕국에 왕좌는 하나뿐이에요!” 그래! 난 이렇게 살겠어!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렇게 살았지만 왕국에 왕좌는 하나였는데 대부분 내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제인 에어 같은 꼬라지를 한 채 로자몬드 올리버인 척 했으니 로체스터들도 눈이 있지 잘 될 리가. 


그보다 더 이 여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라고 생각한 것은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엄마 쪽)이다. 상스럽게 말하자면 남자한테 목숨 거는 꼴 하며... 물론 체면이나 재산을 중시해서 린턴을 택하는 그런 머리는 내가 좀 모자라지만 속물스러운 면이 아주 없지는 않으니 이것도 비슷하다고 해 주자. 뭐랄까, 이 여자는 그냥 미친년이다.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울고 불고 히스클리프. 우리 들판으로 가! 하고 외치는. 그 남자의 손이 잡히지 않으면 발광할 정도로 미쳐 버리는. 그리고, 결국 그 사랑 때문에 미쳐 죽어 버리는. 그런 의미에서 로체스터의 첫 아내 버사에게도 약간의 친근감을 느꼈지만 내가 피부가 흰 관계 및 그녀의 대사가 별로 나오지 않은 바람에 우리의 친근감은 그다지 발전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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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폭풍의 언덕>



어쨌거나 사랑하다가 미쳐 버린 여자,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돌아 버리는 여자, 그러다가 결국 미쳐 죽어 버리는 여자, 캐서린 힌쇼. 이 여자를 만난 것 역시 『제인 에어』를 읽었을 때 언저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나는 내가 이렇게 될 것만 같았다. 사실 그리 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했던 남자들이여, 조심하길. 유령이 되어서도 비오는 날이면 나는 조그만 손에서 피를 흘리면서 사랑했던 당신 집의 유리창을 열어 달라고 애원하면서, 들여 보내 달라고 울면서, 깨뜨릴 만큼 탕탕 두드릴 테니까.   


[관련 기사]

-김현진의 도서관 예찬
-김현진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준 최초의 책
-내가 이야기를 ‘쓰고’ 싶게 만든 어떤 남자
-박완서에게 이별을,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재회를 고하다
-[1] 폭풍의 언덕, 사랑의 고통과 황홀 그리고 잔인함에 대하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나를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는 법 배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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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할 때 『나를 더 사랑하는 법』이라는 미란다 줄라이의 책을 읽었다. 미란다 줄라이는 글도 쓰고 영상도 만들고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이라는 영화의 감독이기도 하다. 그녀와 헤럴 플레처가 함께 만든 ‘나를 더 사랑하는 법’이라는 웹사이트에는 일종의 나를 더 행복하게 각종 방법에 대한 각종 과제들이 제시되었다. 그러면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그 과제를 실행하여 올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의 머리 땋기,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책의 한 장면 재현하기 등이다. 나를 정말 사랑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지금의 나이기 때문에, 나는 당장 이 처방을 나 자신에게 적용하기로 결심했다. 이것들이 내가 한 과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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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내 하루는 별 것 없다. 하지만 별 것 없는 하루야말로 가장 부러운 하루라고 누가 그랬던가. 나는 아이들이 먹을 음식을 생산하는 부엌 아가씨이기도 하고, 독서가이기도 하고, 애서가이기도 하며 가끔 글을 팔아 약간의 돈을 마련한다. 다음 프로젝트는 하고 싶은 전화 내용 써보기다, 비참하고, 슬프고, 한심하다.


그 : 이 말 하려고 전화했어. 난 그동안 미쳤었나 봐. 내 정신이 아니었어. 모든 걸 다 내가 잘못했어. 제발 나를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돼? 앞으로 당신을 여신처럼 대하면서 살겠어. 내가 보호해주고 다시 다정해질게. 내 곁에만 있어주면 돼. 내가 당신에게 했던 미친 것 같은 말들도, 다 내가 미쳐서 그랬던 거야. 내 정신과 의사가 그렇게 말했어. 제발 돌아와.


나 : 일단 만나서 커피나 한 잔 해요.

 

 

써놓고 보니 가슴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 같다. 이 비굴한 피. 그러면 실제로 피가 보이는 다른 프로젝트로 넘어가 볼까. ‘상처를 사진으로 찍고 이야기 해보기’라는데, 상처에는 내가 전문가다. 내가 남에게 입히든, 남이 나에게 입히든, 특히 내가 내게 입히는데 능하다.



 

스무 살 때부터 화학적 물질 부족으로 인한 우울증을 앓았다. 병명은 ‘리스트컷 증후군’. 일본에서 <라이프> 등의 순정만화로 인해 널리 알려진 이 병은, 한 마디로 자기 팔뚝을 베는 것이다. 뭐 죽을 만큼 베지는 않는다. 물론 그런 적도 있긴 하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관심병자로 오해받기 쉽지만 이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은 오히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삶에 대한 의지가 높은 경우가 많다. 내가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처절한 고통으로 뱉듯이 말할 수 있지만, 몸을 벨 때의 그 통증이 가슴 속에 찾아오는 통증보다 훨씬 약하다.

 

인간이란 참 알량한 존재이기 때문에, 정신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몸이 아프면 정신의 고통보다 신체의 고통이 훨씬 아프게 느껴진다. 그 순간 찾아오는 안도감은 대개 눈물과 함께 찾아온다. 살아 있다, 아아, 아직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것과 죽고 싶다는 생각의 그 경계 사이에서 삶이라는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의지는 리스트컷 증후군 환자에게 오히려 살도록 힘이 되게 하도록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는 진심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나도 죽으려 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누군가를 죽였기 때문이다. 그 상처는 아마 내가 죽고 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나를 죽이지, 나를, 나를, 나를... 그 상처를 이기지 못해 기꺼이 살해자가 되려던 나의 시도는 실패했고, 나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따위는 이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슬픔이었다. 아버지, 죄송해요. 그렇지만 아버지, 이해하시죠...? 아버지는 아시죠?

 

이것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던 사람이,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던 것을 코웃음을 치며 없애 버린 뒤 나에게 입힌 상처다. 금방 나아서 지금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가끔 나에게 왜 저런 것이 있어야 했는지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지금 생각으로는, 다 필요해서 생긴 일이겠지, 필요해서...

 

그렇게 생각하지만, 종종 이가 갈리곤 한다. 이 상처를 남긴 뒤 그가 차갑게 웃으며 “내가 죽인 그 OOO 말이야”, 하던 말이 잊히지 않아서이기 때문일까.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그토록 잔인하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원래 사랑과 잔혹은 양면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나를 죽였더라라면 좋았을 텐데. 그는 “너 대신 그 OO가 죽은 줄 알아” 하고 말하곤 했지만 차라리 나를 죽였으면 좋았을 텐데. 나를. 제발, 나를. 나를. 나를. 
 
이런 생각들을 없애기 위해 격렬하고 힘들다는 운동을 검색해 시작했다. 영화 <300>의 출연진들이나 <닌자 어쌔신>에 출연하기 위해 비가 했다는 운동인데 스파르탄이 될 생각은 없지만 이 고통을 육체적 고통으로 누르기 위해 시작했다가 박스 점프를 하자마자 정강이 살이 쭉 찢어졌다. 아마 내가 비육우라면 꽤나 무가치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프로젝트, 응원의 피켓 만들기. 이것만은 진심으로 나에게, 여러분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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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내가 나를 더 사랑하는 방법은 미란다 줄라이가 되는 것밖에 없는 것일까. 고통을 잔뜩 토해 놓고 보니 이 글은, 뇌와 심장으로 뱉어 놓은 토사물 같다. [혐]이라는 말꼬리라도 붙여야 될 것 같다. 혹시라도 내가 뱉어 놓은 토사물들 때문에 이 책까지 오해하시는 분이 있을까봐 미란다 줄라이의 변명을 하고 싶다. 그 사람은 아무 잘못이 없다. 내가 이 책의 용법을 잘못 사용한 것뿐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지, 고통을 극복하게 해 주는 책이 아니었는데.

 

이 책의 올바른 용법은, 지금 나처럼 좀 정상이 아닌 상태의 사람들 말고 아주 정상적인 상태에서 좀 더 자기를 사랑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아주 유용하겠다. 특히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연인들에게, 좀 더 친해지고 싶은 친구들 사이에 꼭 권하고 싶다. 죽어가는 사람과 시간 보내기 같은 무거운 숙제들도 있지만 상대방의 몸에 있는 점들을 연결해서 별자리 그리기, 누군가의 머리 땋아 주기 같은 사랑스러운 과제들도 잔뜩 있어 풍성한 과제들을 직접 실습하다 보면 나를 더 사랑하는 방법이 아니라 ‘너를 더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기도 하다. 시간이 좀 지난 다음, 그런 곳이 있다면 말이지만 내가 ‘정상’이라는 곳으로 돌아온다면 이 과제를 다시 한 번 해 보고 싶다. 적어도 피를 줄줄 흘리지 않는 상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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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후멍적 매력, 들어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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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알고 싶어할 때 나누는 시덥잖은 질문들 중 흔히 이런 게 있다. “이상형이 누구예요?” 그러면 남자들이 흔히 전지현, 송혜교를 들지만 최근엔 아이유가 많아졌고 좀 특이하게 호감을 사려는 타입이라면 드루 배리모어를 말하기도 하고 난 여자 ‘아우라’ 좀 본다는 걸 어필하고 싶어하는 남자라면 모니카 벨루치를 들기도 한다. 나도 남자 ‘아우라’ 좀 본다는 여자들은 질세라 뱅상 카셀을 이야기할 적도 있지만 흔한 건 역시 장동건, 정우성, 강동원처럼 누가 봐도 잘난 남자다.

 

장동건 나오는 영화를 보다가 옆에 앉은 남자친구를 보니 웬 오징어가 보이더라는 흔한 우스개도 있지만, 나는 다른 사람보다 몇 배는 실망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남자에 한해 눈을 확 낮추는 것으로 이런 경우에 대비했다. 게다가 장동건이나 정우성 같은 남자를 누가 싫어할까, 혹시나 그런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주위에서 그를 방어하느라 직장도 못 다닐 만큼 기운이 빠지거나 여자끼리 서로 머리칼을 뽑아대는 치정에 얽힌 추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 역시 남들 다 좋아하는 것에서 살짝 비껴 서 있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었다. 게다가 내 주제를 알고 있으니, 이상형을 이상한다고 해서 이상형에게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말이라도 나눠 본 이상형은 딱 한 사람 있는데, 그 사람은 본명이 ‘이상형’ 씨였다.)

 

그렇지만 사실 정말 누구나 좋아하는 그런 남자들이 싫기도 했다. 게다가 환갑도 못 되어 돌아가신 아버지가 급환으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동안에 눈썹이 짙고 쌍꺼풀 진 큰 눈에 콧대가 뚜렷한, 초등학교 시절 학부모 방문을 오면 여선생님들이 어머 그 아빠 왔어 왜 누구네 반 알랭 들롱 아빠 있잖아, 할 정도로 미남이었다. 여기까지였다면 참 좋았을 것을, 아버지는 자신이 잘생겼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계셨다! 그리고 틈만 나면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시는 바람에 나는 잘생긴 남자 공포증 같은 것이 생겨 눈이 쫙 찢어지고 코가 납작하고 까무잡잡하게 좀 초라한 남자만 보면 좋아서 침을 잘잘 흘리는 부작용을 앓고 말았다.

 

어쨌거나 오랫동안 나의 진짜 이상형을 누가 물으면, 부끄러워서 땅바닥을 쳐다보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하곤 했다. “후멍...이요...” “후멍? 후멍이 도대체 누군데?” “그게... 그... 『멋지다 마사루』라는 만화 아세요?” “『멋지다 마사루』 ?” 『멋지다 마사루』가 무엇인가 하니 2000년대 초반 『이나중 탁구부』와 병신적 매력계를 양분한 바 있는 전설의 작품으로 최근작으로는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라는, 약을 빨지 않고도 사람이 이럴 수가 있나, 하고 심각한 의심을 하게 만드는 작품을 그린 우스타 쿄스케라는 만화가가 그린 도무지 장르를 알 수 없는 만화다.

 

멋지다-마사루 삐리리-불어봐-재규어 폭두방랑다나카 이나중탁구부 

 

 

주인공은 누가 보아도 제목에 나오듯 이상한 초능력을 쓰고 어깨에 희한한 금속 링을 달고 다니며 ‘애교코만도’라는 무술을 선보이는 마사루지만, 새로 전학 온 학생인 후멍(본명이 아니라 짝이 된 마사루가 ‘똥뚜껑’과 ‘후멍’ 중 별명을 고르라고 해서 똥뚜껑은 싫었기 때문에 강제로 선택당한 별명이다)은 친구 100명 만들기라는 순수한 고등학생다운 꿈을 지닌 소년인데 마사루에게 휘말리고 만다. 이후로도 후멍은 휘말리고 또 휘말린다. 마사루의 온갖 짓에 휘말려 유급을 당하질 않나, 절대로 애교코만도 같은 짓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휘말리질 않나,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꿈을 지녔지만 이상한 녀석들에게 결국 휘말리는 착한 소년인 후멍이 언제나 나의 이상형이었다. 휘말리면서도 결국 애교코만도를 좋아하게 되고, 애교코만도를 싫어하는 척했지만 결국 후멍도 애교코만도에 빠져 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이 귀여웠다.

 

훨씬 대중적인 만화로 치자면 『슬램덩크』의 권준호, 안경 선배 같은 캐릭터라고 할까. 식스맨이지만 그 사실에 특별히 불만이 없는, 불량했던 시절의 정대만이 쳐들어와 주먹을 날렸을 때 사정없이 얻어맞을 만큼 약하지만 깨진 안경을 고쳐 쓰고 철 좀 들어라, 하고 일갈을 날릴 수 있는 남자. 『슬램덩크』의 다른 등장인물들을 봐도 역시 안경 선배가 최고다. 이정환이나 고릴라 선배는 늘 그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 있어야 할 것 같고 서태웅은 백발백중 게이일 테고, 강백호는 기분 맞춰주기 힘들 것 같고 정대만은 부상이라도 당해서 농구를 때려쳤다간 알콜중독에다 도박에 빠져 마누라를 팰 것 같고, 송태섭은 술 먹고 바람 피우느라 바쁠 것 같다는 것이 나의 편견이다.

 

준호 선배야말로 착실하게 농구를 하다가 관련 스포츠 업계에라도 취직해 착실히 아내를 부양할 것 같은 얌전하면서도, 상황에 휘말리는 듯하면서도 결국 자기 목소리를 내는 후멍적 남자가 아닌가. 이렇게 옛날 만화만 뒤적이다가 비교적 최근작을 보았는데, 그건 작년에 완결된 『폭두방랑 타나카』 시리즈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후멍적 남자는 타나카의 친구 무리 중 하나인 오카모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착실하게 우체국에 취직해서 오토바이를 사서 열심히 배달을 다닌다는 점도 내가 좋아하는 ‘얌전한 남자’에 부합하지만, 난생 처음 사귀어 본 여자친구가 도색물을 가리키며 선배도 저런 거 좋아해? 하고 묻자 당황하며 무슨 소리! 가슴 따위 정말 싫어! 라고 대답하는 것이 참을 수 없이 후멍적이라 너무나 귀여웠다.

 

슬램덩크

 

 

그렇게 오카모토의 후멍적 매력에 슬쩍슬쩍 미소를 짓다가 등장인물 중 가장 덩치가 크고 말하는 거라든가 표정이 조금 비호감인 이노우에의 대사 하나에 가슴이 철렁, 했다. 어른이 되어 회사에 취직해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하고, 원치 않는 일에 하나하나 굽신거려야 하는 사실에 진절머리가 났으면서도 임신한 아내를 부양하기 위해 계속 일을 하는 이노우에는 타나카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말한다.

 

“난 말야, 어린 시절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줄 알았어...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나에게 신지, 신지, 라고 부르면서 귀여워해 주는 그런 시절이 언제까지나... ”

 

만화를 보면서 실컷 웃다가 눈시울이 뜨끈했다. 나도 그런 시절이 언제까지나 계속되길 원했다. 어쩌면 지금도 취직하지 않고 마음대로 살고 있는 건 그런 어른의 시절에 확실하게 뛰어들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열등감이 마음 한 구석을 언제나 찌른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하루키의 어느 소설에서던가, 비틀즈의 노래를 들으면서 여주인공이 이렇게 말하는 구절이 있다. “이 사람들은 확실히 인생의 고통이나 아름다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나라면 『폭두방랑 타나카』의 작가는 인생의 찌질함이나 사소한 괴로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겠다. 하지만 그런 인생의 찌질하고 사소한 고통을 넘어가는 것이야말로 삶이라는 것을 알 정도는 어른이 되어 버린 나에게 휘말릴 듯 휘말릴 듯 하면서도 심지 굳게 나에게 휘말리지 않고 잘 버티는 후멍적 매력을 가진 연인이 있다면 좀더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살아갈 수 있을 것도 같은 착각이 드는, 흐린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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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날,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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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UEFA Champions League Magazine] 

보통 제야의 타종 소리를 들으며 한 해를 마감하고 또 시작을 하지만 나에게 1년의 시작은 8월의 프리미어 리그 개막일이며, 그 끝은 종소리가 아닌 5월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다. 그렇다. 나는 축구팬, 12년째 아스날과 연애중이다. 90분짜리 공놀이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그 결과에 일주일의 희로애락이 좌지우지되는, 이 스펙타클하고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연애질은 여전히 현재 진행중이다.

인생에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운명처럼 서로를 알아본다고 말하지만 내 삶에서 그런 만남들은 매우 일상적이었고 평범하며 전혀 극적이지 않았다. 아스날과 나의 만남도 그러했다. 2002년의 어느 새벽, 이라하면 왠지 한일 월드컵에 대해 미주알 고주알 꺼내 놓았을 것 같지만, 그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나는 집에서 한창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고 잠깐 쉴 생각으로 거실로 나와 TV를 틀었다. 그리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발견한 축구 중계. 유럽 팀들의 경기였다. 당시에도 축구는 좋아했지만 우리나라 대표팀 경기나 봤지 외국 선수들은 잘 모를 뿐더러 관심도 없었다.

따로 재미있는 볼거리도 없는 것 같고, 별 생각없이 소파에 누워서 경기를 보기 시작했는데.. 이게 은근히 재밌다? 그동안 본 적 없는 빠르고 화려한 축구. 내 앞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그 팀이 바로 아스날이었고 이 날을 계기로 내가 아스날 팬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고 말할 수 있었다면 참으로 쓸만한 이야깃거리가 되었겠지만, 다시 말하는데 내 인생은 그렇게 극적이지 않았다. 희미한 기억으로 미루어 하얀 유니폼이었으니 아마도, 축구 스타들이 즐비했던 ‘갈락티코’ 레알 마드리드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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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Arsenal Legends = Thierry Henry] 

어쨌든 이날 이후, 나는 새벽마다 축구 경기를 찾아 TV 채널을 돌리게 되었고 어찌된 일인지 프랑스의 스트라이커 티에리 앙리에게 빠져버렸다. 그에 대한 관심은 곧 자연스레 그의 소속팀인 아스날 경기를 찾아보게 만든 것이다. 앙리가 공만 잡으면 상대 수비진을 가볍게 휘저으며 돌파해 들어갔고, 빠르고 정확한 슈팅은 여지없이 골망을 흔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앙리 특유의 차분한 세레머니. 전율에 의해 소름이 돋는다면, 바로 앙리가 그랬다. 그렇다. 사실, 내가 이 지긋지긋한 연애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다 앙리 때문이다. 묘하게 거만한 표정, 긴 팔다리, 그리고 매력적인 뒷통수까지. 처음 사랑에 빠진 이들이 그러하듯 앙리의 모든 것들이 다 멋있었다.

이듬해 여름, 2003-04 시즌이 시작되자 본격적으로 아스날 경기를 챙겨보게 되었다. 스스로 ‘팬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첫 시즌. 웬걸, 아스날은 1년동안 무려 38경기가 치뤄지는 리그에서 단 한 경기도 패하지 않은 채로 잉글랜드에서 전무후무한 무패우승을 차지했다. 한 골을 먹히면 세 골을 넣을 듯한 기세로 상대편 진영을 향해 마구 뛰어들어가던 ‘두두다다’ 공격 축구. 절대 질 것 같지 않은 그 느낌이 당시에는 너무나 당연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스날이었으니까. 아스날을 두고 아름다운 축구를 한다며 칭찬하는 얘기들이 많았지만 내가 아스날을 좋아한 이유는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강해서였다.

스포츠 팬들 중에 ‘언더독’, 즉 2인자를 응원하고 그들이 1인자를 뛰어넘는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여지없이 챔피언이 좋다. 두 팀이 치열하게 승부를 벌이는 아슬아슬한 경기보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경기다 좋다. 내가 처음 사랑에 빠진 아스날이 그러했다. 이 즐거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은채. 허나, 그 누가 알았을까. 바로 이듬해인 2005년의 FA컵 트로피를 마지막으로 8년 동안 그 어떤 대회 트로피도 들지 못하면서 무관(無冠)의 제왕 노릇을 하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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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BC Match of the Day] 

사실은 아스날에 많은 일들이 있었고 나름의 이유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커다란 계기는 장기적인 관점으로 더 밝은 미래를 그리기 위해, 작고 낡은 기존의 하이버리 구장을 떠나 새로운 홈구장인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애쉬버튼 그로브)을 짓기로 한 것이었다. 공사에 필요한 자금 마련을 위해 우승을 차지했던 선수들을 팔고 그 자리에 어린 유망주들로 팀이 채워졌다. 자연스럽게 팀은 약해지고 차차 우승권에서 멀어진 것이다. 또한, 하필 그 시기에 슈가대디 라고 불리우는 억만장자 구단주를 등에 업은 첼시와 맨체스터 시티가 무한의 자금을 들고 리그에 등장했고 아스날로서는 더욱 불운이었다. 선수를 데려올 수 있는 이적시장마다 라이벌 팀들은 좋은 선수를 영입하고 팀을 강화하는 달콤함을 맛보고 있을 때, 아스날은 긴축 재정으로 인해 오히려 주전 선수를 팔아 재정을 충당해야 하는 쓰디 쓴 자본주의를 목격해야만 했다.

속이 쓰리고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처음 알던 아스날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하고 있지만 도저히 가슴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그 선수를 샀더라면, 그때 그 선수를 팔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경기를 이겼더라면, 차라리 새 경기장을 짓지 않았더라면... 지금 아스날의 현재는 많이 달랐을텐데. 어쩌면 맨유가 아니라, 첼시가 아니라, 바로 아스날이 트로피를 들고 있었을텐데. 의미없는 가정의 연속.

축구팀을 응원하면서, 아니, 아스날과 연애하면서, 즐거운 일이 더 많아야 하는데 오히려 스트레스만 받고 답답하고 화나고.. 특히 라이벌 팀을 상대로 패배하는 날에는 주변에서 조롱과 위로의 연락들이 쏜살같이 날아든다. 문자 그대로 아스날에 따라 희로애락이 좌지우지되는 셈이다. 누군가가 물었다. “그렇게 짜증나면 응원하는 팀을 바꾸는 것은 어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스날 팬으로 유명한 닉 혼비의 『피버피치』에서 찾을 수 있다.
“스윈든 전 이후, 나는 적어도 축구에 있어서 충성심이라는 것은, 용기나 친절 같은 도덕적 선택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사마귀나 혹처럼 일단 생겨나면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결혼도 그 정도로 융통성 없는 관계는 아니다. 바람을 피듯이 잠깐 동안 토튼햄을 기웃거리는 아스날 팬은 단 한사람도 없다. 축구팬에게도 이혼이 가능하기는 하지만(사태가 너무 심해지만 경기장에 가는 것을 그만둘 수는 있다.) 재혼은 불가능하다. 지난 23년동안 아스날로부터 도망칠 궁리를 했던 적도 많았지만, 그럴 방법은 전혀 없었다. 창피스럽게도 (스윈든, 트랜미어,요크, 월솔, 로더햄, 렉스햄을 상대로) 패배할 때마다, 인내와 용기와 자제심을 총동원하여 참아내는 수밖에 없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불만으로 가득 차 몸을 비틀 따름이다.”

실제의 연애에서는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되면 나중에 다른 여자,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축구팀과의 연애는 다르다. 어떤 이유로든 한 번 성립된 관계는 영원히 지속된다. 그것이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멀어질 수는 있지만 결국 이 팀과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다. 실은 그 부분이 이 연애의 멋이기도 하다. 실제로 경기장을 가본 적도 없고 선수들을 본 적도 없다. 그저 TV를 통해 접하게된 우연한 계기로 내 삶에 새로운 사랑이 싹이 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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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BC Match of the Day] 

끝이 보이지 않던 아스날의 암흑기에서 다시 빛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작년 초였다. 아스날이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을 지으면서 안고있던 단기 부채들이 대부분 해결되면서 이제 재정적으로 숨통이 트였다는 것이다. 다가오는 여름에 아스날은 큰 돈을 투자할 수 있고 스타 플레이어들을 영입해서 다시 챔피언에 도전할 것이라는 언론의 보도와 아스날이 유럽 클럽들 중에서 가장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통계. 2012-13 시즌도 우승은 이미 한참 멀어진 채로 끝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으로 부풀었고 조금은 식어버린, 지쳐버린 나의 연애 감정도 다시 불붙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기대를 모은 2013년 여름 이적시장, 아스날의 공격을 이끌 새로운 스트라이커 영입은 실패했지만, 구단 역사상 최고액인 £42.5m(약 750억원)의 거금을 들여 독일 국가대표이자 레알 마드리드에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골을 만들어냈던 미드필더 메수트 외질을 영입했고, 과거에 팀을 떠났던 마티유 플라미니가 돌아왔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한참 못 미치는 선수 보강이었지만, 기존 선수들의 성장과 더불어 시너지 효과가 나타난 것일까? 아스날은 새로운 시즌, 놀랍게도 시즌 전반기 대부분의 시간을 리그 1위로 보냈고 현재까지 승점 1점 차이로 맨체스터 시티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

정말 이번 시즌에는 아스날이 8년 무관의 고리를 끊고 트로피를 들 수 있을까?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잠재된 선수들의 혹사 문제와 겨울 이적시장의 선수 영입 실패로 기대보다는 우려가 앞서는게 사실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팀의 약점과 주전 선수들의 부상으로 생긴 공백들을 새로운 영입으로 보강하고 시즌 후반기에 앞으로 달려나갈 원동력을 얻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움직임이 확실한 우승에 대한 보증은 하지 못하더라도 트로피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 10년 넘게 유럽 톱레벨에서 감독을 해온 아르센 벵거의 안목이 나보다 뛰어나겠지만 이 불만과 안타까움을 누가 알아주랴. 결국 아스날과 사랑에 빠져버린 내 탓이다. 그러나 이렇게 불평을 쏟아내다가도 주말이 되면 아스날 경기 시간에 맞춰 나는 또다시 TV 앞에 앉는다. 지난 주 5-1의 대패를 당한 리버풀을 영국 축구협회가 주최하는 FA컵에서 또다시 상대한다. 오늘 밤은 평화롭게 잠들 수 있을까? 이 연애, 도저히 쉽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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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스’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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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이들이 하는 짓

지구 반대편에 있는 축구팀과 장거리 연애를 하면서 발생하는 가장 큰 애로사항은 거리가 아닌 시차다. 나의 연애는 직접 경기장으로 찾아가서 선수들을 응원하기는커녕, 새벽에 졸린 눈을 비비며 TV를 앞에 앉아 소리 지르는게 고작이다. 그것도 토요일 밤 혹은 일요일 새벽의 경기들만 마음 편하게 볼 수 있고 일요일 밤에는 경기 시간이 조금만 늦어져도 다가오는 월요병에 대한 우려가 축구 시청을 포기하게 만든다. 그런데 만약 경기가 주말이 아닌 평일 새벽 4시 반이라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내일을 위해 망설임 없이 잠을 택하겠지만, 축구와 사랑에 빠진 이들은 꼭 상식과는 먼 선택들을 한다. 아니, 고민을 한다.

① 새벽 4시 반까지 밤을 샌다경기를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을 확률이 가장 높지만, 월요병에 대한 우려는 기우가 아닌 현실이 된다. 예상외의 복병으로 뜬눈으로 새벽을 지새우다가 경기 시작을 앞두고 잠들 수도 있다.

② 새벽 4시 반에 알람을 맞춰놓고 초저녁에 일찍 잠들었다가 경기 시작을 앞두고 일어난다다음날의 컨디션을 조절할 수 있는 나름의 절충적인 방법이지만 초저녁부터 잠드는 게 익숙지 않아서 계속 뒤척이다가 결국 ①처럼 밤을 새기도 하고, 잠들었다가 깨보면 이미 새벽을 넘어 아침이 되어있는 낭패(?)도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이 짓(!)들도 계속 하다보면 몸이 적응을 하는건지, 절대 들리지 않아 날 곤욕스럽게 만들었던 아침 출근 알람과는 다르게, 축구 경기시간에 맞춘 알람은 기가막히게 나를 TV 앞으로 앉혀 놓는다. 심지어 때로는 알람보다 먼저 일어나, 소리가 울리기 전에 끄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편안히 자야하는 평일 새벽에, 굳이 눈을 뜨기 위해 이 모든 노력을 쏟는 이유는 딱 하나, 챔피언스 리그 때문이다.

[출처: UEFA Champions League Magazine] 

챔피언스 리그, 아스날의 환희와 눈물

UEFA 챔피언스 리그. 유럽 클럽 축구의 진수(眞髓)이자 별들의 무대. 축구에 관심없는 주변 친구에게 챔피언스 리그에 대해 아는지 슬쩍 물어봤더니, “유명한 팀들끼리 하는 경기” 정도로 알고 있더라. 오, 이 정도면 훌륭하다. 모두가 축빠(축구팬을 속되게 이르는 말)일 필요는 없으니까. UEFA 챔피언스 리그는 문자 그대로 유럽 각 나라의 ‘챔피언’들이 모여, ‘챔피언 중의 챔피언’을 가리는 대회이다. 다만, 나라마다 수준 차이를 고려하여 잉글랜드나 스페인처럼 수준높은 리그는 우승팀을 포함해서 3~4위팀까지 티켓이 주어지지만, 변방의 리그 팀들은 자국에서 우승한 팀조차도 치열한 예선을 여러번 거쳐야 한다. 그렇게 32개 팀이 정해지면 우리가 월드컵을 통해서 봐왔던 것처럼, 조별예선을 치르고, 그 중에서 16개 팀만이 본선 토너먼트에 진출하여 16강, 8강, 4강, 결승의 순으로 최종 우승팀이 가려진다.

왜 그렇게 모두가 챔피언스 리그에 집중하는 것일까? 물론,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유럽 최고의 축구 클럽’이라는 명예를 얻을 수 있겠지만, 실은 좀더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이 대회에 엄청난 돈이 몰리기 때문이다. 단순히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얻는 것 만으로 약 130억 원의 수익금을 얻고, 우승을 차지하면 550억 원에 가까운 돈을 손에 쥐게 된다. 여기에 각 경기의 배당금과 TV 중계권료까지 더하게 되면, 그 액수는 가히 어마어마하다. 이 돈을 바탕으로 클럽은 좋은 선수들을 영입하여 팀을 강화하고, 이로인해 더 좋은 성적을 거두어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는 선순환이 이뤄진다. 그러므로 클럽 입장에서는 리그 4위를 차지하고 챔피언스 리그에 참가하는 것과 5위로 밀려 참가하지 못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아스날이 리그 우승에서 한참 멀어졌어도 4위 안에 들 수 있느냐 마느냐로 매 시즌 긴장을 놓을 수 없었던 이유, 역시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 때문이었다. 다행히 아스날은 나와의 연애기간 동안 이 부분만큼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막상 대회에 올라가서는 여지없이 헤매면서 내 기대감을 무너트렸지만 말이다.

[출처: Arsenal Legends - Dennis Bergkamp] 

그렇다. 아스날은 챔피언스 리그에서 유난히 헤맸다. 최강의 스쿼드를 자랑하며 리그를 평정하던 2000년대 초반의 아스날마저도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8강 문턱을 넘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단 한 번의 예외가 있었으니, 전통적인 빨간색과 흰색이 아닌 와인색으로 피치 위를 수놓았던 2005-06 시즌.

조금은 빛바랜 기억들을 더듬어보기 위해 외장하드에 고이 보관하고 있던 2005-06 시즌 리뷰를 오랜만에 틀어본다. 홈 경기장으로서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이전을 앞두고 하이버리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카운트하며 시작되는 이 영상은 또다시 나를 환희와 눈물로 뒤범벅된 챔피언스 리그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앙리의 원더골로 넘은 레알 마드리드와의 16강, 신성 세스크 파브레가스가 아스날의 前주장이었던 패트릭 비에이라를 넘어 유럽에 이름을 알리게 된 유벤투스와의 8강, 옌스 레만이 후안 리켈메의 마지막 페널티킥을 막으며 극적으로 넘어선 비야레알과의 4강. 그리고 바르셀로나와의 결승.

[출처: UEFA Champions League Magazine] 

영상은 늘 여기에서 정지한다. 가슴 아픈 기억이 떠올라서 차마 볼 수 없다. 굳이 보지 않아도 마치 방금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니까. 에투를 막던 레만의 퇴장, 피레스의 교체아웃과 알무니아의 투입, 캠벨의 선제골과 에투의 동점골, 그리고 알무니아의 다리 사이로 먹힌 벨레티의 역전골. 바르셀로나 우승. 토너먼트에서 무실점으로 결승까지 올라, 염원했던 ‘우승’까지 단 한 걸음을 남겨놓고 이루지 못한, 내 연애에서 가장 빛나고도 아팠던 추억. 우승컵을 앞에 두고 스쳐지나가던 아스날 선수들의 쓸쓸한 눈빛을 아직까지 잊을 수 없다.

결승전 패배의 나비효과였을까. 이듬해인 2006-07 시즌, 앙리는 고질적인 부상에 시달리며 예전같지 못한 활약을 했고, 그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하기 위해 바르셀로나로 이적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시즌이 끝난 후, 때마침 앙리가 한국에 온 것은 참 신기한 일. 수많은 아스날 팬들이 이 소식을 듣고 공항으로 달려가 그를 향해 아스날을 떠나지 말라고 힘껏 외치기도 했다. 소극적인 나는 집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지만.

[출처: MBC 무한도전] 

이후, 앙리는 <무한도전>에 출연해서 레전드 ‘앙리 특집’을 만들어냈고 멤버들을 런던으로 초대하겠다는 말도 했다. 나는 이 초대가 어쩌면 ‘앙리의 아스날 잔류에 대한 작은 암시가 아닐까’ 하며 추측하고 약간의 희망도 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팬들에게 눈물겨운 이별의 영상 편지를 남겨놓고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무한도전>에서의 약속도 기약없이 멀어진 채 말이다. 이후, 앙리가 아스날이 아닌 다른 곳에서 그토록 원했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니 잘된 일인걸까. 그가 아스날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무관의 시대에서 함께 고생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내 마음은 복잡하다. 우리가 2006년에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했더라면 앙리는 지금까지 아스날에 남아있지 않았을까. 그 한 번의 패배로 앙리를 잃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챔피언스 리그’는 나에게 이루지 못한 꿈이다. 한 번쯤은 우리가 유럽의 수많은 별들 중에 가장 빛나는 별이고 싶다. 아스날에게는 ‘프리미어 리그’ 우승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당면 과제가 있지만, ‘챔피언스 리그’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가슴 아프게 남아있는 기억이자, 더 멋진 기억으로 덧칠해야할 숙제와도 같다. 감독으로서 많은 시간이 남지 않은 아르센 벵거에게도 가장 간절한 소망이 아닐까.

모두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최근 몇 년간 아스날은 16강에서 계속 좌절하고 있다. 3년간 차례로 바르셀로나, 밀란, 뮌헨을 만났으니 정말 불운한 대진운도 부진에 한 몫을 했다. 특히, 작년 뮌헨과의 16강은 참 아쉬웠다. 홈에서 1:3으로 패배했지만, 뮌헨 원정에서 2:0의 놀라운 승리를 함으로써 총합 3:3으로 동률을 이뤘다. 그러나 챔피언스 리그의 ‘원정 다득점 규칙’에 따라 원정 경기에서 더 많은 골을 넣은 뮌헨이 8강에 진출하고 아스날은 탈락했다.

그런데 올해 또 16강에서 디펜딩 챔피언 뮌헨을 만날게 뭐람. 작년의 뮌헨에 바르셀로나 6관왕을 이끌었던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새로 부임하면서 독일의 강인함에 스페인의 티키타카를 입힌 업그레이드 뮌헨. 올해는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어째 작년보다 더 어려워 보이는데 말이다. 더군다나 아스날의 전반기를 대활약으로 이끈 아론 람지, 오른쪽 측면의 공격을 전담하고 있던 테오 월콧의 부상이라는 악재마저 겹쳤다. 뭐, 어쩌겠는가! 공은 둥글고 축구는 직접 부딪쳐보기 전까지 모른다고 믿어보는 수밖에.


그리고 결전의 날

[출처: Sky Sports] 

2014년 2월 19일, 챔피언스 리그 16강 바이에른 뮌헨과의 1차전. 전운(戰雲)마저 감도는 수요일 밤, 새벽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 저녁도 가볍게 먹었다. 직접 경기도 뛰지 않는 내가 왜 식단 조절까지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괜히 긴장됐다. 이미 작년 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유럽 최강의 팀으로 군림하고 있는 뮌헨이지만 또 그런 팀을 상대로 유일한 승리를 거둔 팀이 아스날이었으니까, 객관적인 열세임에도 자꾸 희망적인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그렸다. 오늘 홈에서 뮌헨에게 시원한 승리를 거두고, 2차전 원정에서 그들의 공세를 막아내며 짜릿한 8강행. 얼마나 기쁠까. 디펜딩 챔피언을 이겼다며 아스날에 대해 칭찬하는 칼럼들이 쏟아질테고, 평소에 무표정하던 벵거 감독도 오랜만에 환하게 웃을테고, 선수들도 승리의 기운을 받아 리그에서도 승승장구. 그리하여 라이벌들과의 힘든 일정을 잘 이겨내어 리그 1위로 질주.

이런 달콤한 상상을 하며 얼마나 잠들었을까. 시계를 보니 고작 새벽 2시가 조금 넘은 시각, 아스날 관련 새로운 소식이 올라오나 트위터를 확인하며, <아스날과 연애중> 2화를 어떻게 풀어갈까 고민하며, 그렇게 보낸 긴 대기시간. 어느새 아스날과 뮌헨의 선발 라인업이 올라오고 놀라움에 동그랗게 눈을 떴다. 최근에 좀 부진하고, 안좋은 일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주전 스트라이커로서 내내 자리를 지키던 올리비에 지루를 빼고 21살의 유망주 야야 사노고가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하러 나온 것이다. 어쩌면 이번 시즌 만나게 될 가장 강한 팀을 상대로 지난 6개월간 딱 1경기 밖에 뛰어보지 않은 신인을 내보내다니. 벵거는 그에게서 특별한 뭔가라도 본 것일까.

[출처: Sky Sports] 

이윽고 양팀 선수들이 피치 위로 나오고, 가슴 설레는 챔피언스 리그 주제가가 흘러나오고.. 관중석에는 ‘ARSENAL’ 이라는 글자를 펼쳐놓은 팬들의 카드섹션이 모든 아스날과 연애하는 이들의 소망을 대변해주는 듯 했다. ‘승리’. 그리고 고대하던 경기 시작 휘슬이 울렸다. 아스날은 의외로 기세좋게 뮌헨을 밀어붙였고, 어느새 ‘비기기만 해도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이길 수 있겠는데!’ 로 한층 고조되었다. 사노고의 감각적인 슈팅이 막힐 때는 아쉬움에 “아-” 소리가 절로 나왔다. 경기가 시작된 지 7분만에 메수트 외질이 얻어낸 페널티 킥. ‘이러다가 정말 뮌헨을 이기는 건가!’ 싶었지만 골키퍼 마누엘 노이어에게 외질의 슈팅이 막혔고 다시 경기는 속행. 아마, 그때부터 였을 것이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마음속에 피어오르기 시작했던 것은.

조금씩 뮌헨도 공격의 기세를 높였고 전반 종료 10분여를 남겨놓고 뮌헨의 아르옌 로벤이 날카롭게 침투하여 아스날의 골키퍼 보이첵 슈체스니와 1:1 상황에서 반칙을 얻어냈다. 설마, 설마... 심판은 빨간 카드를 높이 꺼내보였다. 골키퍼 퇴장, 그리고 페널티 킥이 선언. 이것은 데자 부(Deja vu). 2006년 바르셀로나와의 결승전에서 골키퍼 레만이 퇴장당하던 모습이 겹쳤다. 왜 항상 불운은 아스날을 따라다니는 것일까.

[출처: 2005-06 Arsenal Season Review, Sky Sports] 

TV를 꺼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뮌헨의 다비드 알라바도 페널티 킥을 놓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음속에 찾아온 절망이 다시 희망의 색깔로 바뀐다. 전반전이 종료되고 여전히 점수는 0:0, 승부는 아직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비록, 11명에서 10명이 되었지만 잘 버텨서 무실점으로 마치면 원정에서 기회가 있으니까. 후반전이 시작되었고 전반전과는 정반대로 아스날이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양상. 공 점유율이 1:9까지 벌어졌다. 힘겹게 버텨내고 또 버텨내었지만 토니 크로스의 놀라운 슈팅은 아스날을 응원하는 내 눈에도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골망을 흔들었다.

안그래도 선수 1명이 부족하고 경기력이 크게 밀리는 상황에서 선제골까지 먹히니 ‘추가골이나 먹히지 말자’로 현실에 타협하는 마음. 나의 이 마음에 짜증이 났다. 내가 지금 그저 더 큰 패배를 당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다니! 짜증과 안타까움과 한숨이 뒤섞여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결국 TV를 껐다. 부족한 잠이나 더 자야겠다 하고 누웠는데 아무래도 경기가 궁금해서 다시 소리만 켰다. 눈을 감았지만 뮌헨의 파상공세가 캐스터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져온다. 스트레스 받지 않겠다고 TV를 껐으면서 그래도 중계 소리는 듣고있는 내 모습이 참 찌질하게 느껴졌다. 마치 연인과 싸운 후, 그녀의 SNS를 몰래 확인하는 모습과 같이. 사랑하게 되면 새어나오는 어쩔 수 없는 찌질함이라고 해야할까. 아스날은 결국 토마스 뮐러에게 추가골을 허용하며 0:2로 패배했다.

잠을 줄여가며 챙겨본 새벽 경기에서 패배한 날에는 정신적, 신체적 데미지가 함께 찾아온다. 그래서 이런 날에는 경기를 보지 않은 사람들을 두고 농담삼아 ‘승자’라고 치켜세우기도 한다. 잠도 잘 잤고 아스날 패배의 스트레스도 받지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반대로 경기에서 시원하게 이기는 날에는 아스날의 승리를 생방송으로 함께 즐긴 이들이 ‘승자’. 처음부터 디펜딩 챔피언 뮌헨에게 이기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지고나서 이렇게 서운한 것을 보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래도 아스날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외질의 페널티 킥이 골이 되었고 전반전의 기세가 이어졌다면 다른 결말이 펼쳐지지 않았을까. 너무나 잘한 경기가 골키퍼의 퇴장으로 망쳐진 것 같아서 정말 아쉽다. 이것이 게임이라면 ‘불러오기’를 해서 다시 경기를 치르고 싶은 마음. 한 번만 다시하면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러나 지나간 일은 이미 지나간 것이고 우리는 오늘을 살아야 한다. 더 멋진 내일이 찾아오길 꿈꾸면서 말이다. 혹시 누가 아는가? 당장은 패배에 좌절하고 있지만, 작년의 일들이 ‘거꾸로’ 반복되어서 이번에 홈에서 2:0 패배를 당한 후, 뮌헨 원정에서 3:1로 승리해 마찬가지로 ‘원정 다득점 규칙’에 따라 아스날이 8강에 진출할지. 그러나 실은 알고 있다. 아스날이 뮌헨을 넘기 힘들다는 것을. 그러므로 져도 괜찮다. 어차피 실망은 일시적이지만, 사랑은 영원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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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스에서 온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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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Arsenal Season Review 2009-10] 


2010년 2월 27일, 악명 높은 스토크 시티 원정. 점수는 1:1, 승리가 절실한 아스날로서 매우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후반전 20여분이 흘렀을까. 스토크의 라이언 쇼크로스는 아스날의 공격을 차단했지만, 공이 흘러나왔고 그것을 태클로 막아내기 위해 아론 람지가 뛰어들었다. 공을 걷어내려고 했던 쇼크로스의 킥은 그대로 공이 아닌 다리를 향했다. 고통을 호소하며 피치 위에 쓰러지는 람지.

그동안 축구를 보면서 선수들이 부상당하는 장면을 참 많이 목격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심판을 비롯한 모든 선수들이 다급한 얼굴로 의료진을 향해 빨리 오라며 손짓을 하고 소리를 지른다. 머리를 감싸쥐며 주저앉은 베르마엘렌. 흥분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 세스크. 스토크 선수들을 향해 격하게 화를 내는 캠벨... 카메라는 쓰러져있는 람지를 비췄고 그의 오른쪽 다리는 상상할 수 없는 각도로 꺾여 있었다...


[출처: BBC Sport]

2008년 여름, 웨일스 카디프 시티의 17살 미드필더를 두고 아스날과 맨유의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의 이름은 아론 람지(Aaron Ramsey). 나의 첫 인상은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겠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잘생겼다.” 어차피 유망주는 유망주일 뿐이라며 가볍게 흘려넘길 수도 있었지만 맨유도 그를 영입하고 싶어한다니 왠지 꼭 아스날이 영입했으면 했다. 원래 사소한 것조차도 라이벌한테는 지고 싶지 않은 법이다. 또한 ‘벵거(아스날 감독)와 퍼거슨(맨유 감독)이 동시에 찍은 선수는 무조건 성공한다’는 축구계의 속설도 내심 마음에 걸렸다. 
혹시 간발의 차이로 맨유에게 빼앗긴 유망주가 나중에 슈퍼스타가 되면 땅을 치며 후회할 테니까.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고? 리오넬 메시와 함께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딱 그러했다. 2003년, 호날두는 거의 아스날로 올 뻔했다. 심지어 9번의 번호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아스날 셔츠도 받았지만, 결국 그는 맨유를 택했다. 다시 생각해도 아쉽다. 아! 


그리고 5년 후, 역사는 되풀이되는 듯 했다. 이번에도 맨유 공식 홈페이지에 카디프 구단과 아론 람지의 이적에 합의했고, 개인 협상과 메디컬 테스트만 남았다는 뉴스가 벌써 올라왔기 때문이다. 나는 좌절했다. 또다시 이렇게 맨유에게 당하는 것인가. 하지만, 웬걸 정확하게 10일 뒤, 아론 람지는 아스날과 사인했다. 동시에 맨유 공식 홈페이지의 이 설레발은 두고두고 축구팬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출처: 맨유, 아스날 공식 홈페이지 캡쳐] 


이후 밝혀진 람지 이적에 대한 뒷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보자면, 카디프는 맨유, 아스날, 에버튼 세 곳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여기서 맨유는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공개적으로 뉴스를 띄우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마치 계약이 성사된 것처럼 보이려고 했다. 더불어, 카디프도 아스날이나 에버튼보다는 맨유로 이적시키는 것을 선호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맨유는 람지를 카디프로 재임대하여, 1년 더 그곳에서 머물 수 있는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람지와 그의 부모, 그리고 에이전트는 대화를 위해 맨유로 향했지만,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휴가중으로 자리에 없었다. 아스날의 감독 아르센 벵거 역시 유로 2008 관람차 스위스에 체류하면서 클럽에는 부재중이었는데, 이때 벵거는 람지 가족을 개인 제트기로 자신이 있는 스위스로 모셔와 점심 식사에 초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벵거는 이 자리에서 람지를 설득했다.

아론 람지 “내가 아스날에 입단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르센 벵거와 만나 나를 위한 그의 계획들을 듣게 된 것이었다. 그동안 그는 수많은 어린 선수들을 데려와 기회를 주고 훌륭한 선수들로 길러냈다. 아스날은 나에게 비행기를 보내 벵거와 만날 수 있도록 해줬다. 감동받았다. 나는 고작 17살이었는데 세계 최고의 감독이 나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한다니. 아스날로의 이적은 내 나이에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후회는 없다. 나는 옳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아스날로부터 나를 더 원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나를 위한 계획도 더 낫다고 생각했다.”
(2013. 11. 8. 텔레그라프)

[출처: Arsenal Season Review 2009-10]


2008-09 시즌, 이렇게 아론 람지는 아스날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고, 아스날이 직접 길러낸 어린 선수들 중 가장 촉망받는 재능의 16살 잭 윌셔와 함께 1군 스쿼드에 올랐다. 이 두 선수를 바라보는 내 눈은 당연히 하트가 되었다. 아직은 어리고 부족한 탓에 팀에 큰 보탬은 되지 않겠지만 점차 성장해서 아스날의 미래를 책임질 ‘브리티시 코어’들이었으니까. (아스날의 1군 스쿼드는 항상 외국인 선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잉글랜드 클럽이면서 잉글랜드 선수가 없다는 비아냥을 듣곤 했다. 그래서 아스날은 잉글랜드 혹은 영연방 선수들을 팀의 핵심으로 삼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들을 ‘브리티시 코어’라고 불렀다)

이미 팀의 에이스가 된 세스크와 함께 높은 잠재력을 지닌 람지와 윌셔가 함께 피치 위에 서는 날에는 과연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아스날의 물 흐르듯 부드러운 패스워크에 브리티시의 투쟁심이 더해진 미드필드. 막연히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그 누가 알았을까. 고작 1년 반만에 아론 람지에게 대형사고가 날 줄은.

[출처: BBC Sport]

2010년의 그 날은 새벽이었고, 경기는 말할 수 없이 답답했고, 조금은 잠에 취해 자꾸 눈꺼풀이 감기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론 람지의 다리가 부러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불운? 불행? 사고? 악몽? 카메라가 스쳐지나가며 비춰진 람지의 꺾인 다리를 보고 온몸이 떨려왔다. 마치 내 다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람지의 표정과 패닉에 빠진 선수들. 경기를 전해야하는 캐스터도 말을 잇지 못했다. 나의 등 뒤에는 서늘한 소름이 돋았고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산소 마스크가 씌워진 그를 보며 흘러내리는 안타까움의 눈물. 아스날의 미래가 무너진 느낌. 아니, 축구가 무슨 소용이야. 앞으로 창창한 미래가 펼쳐져야할 소년에게 이런 끔찍한 일이 생기다니. 다시 걸을 수는 있을까.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있어서는 안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손이 덜덜덜 떨렸다.

의료진은 바쁘게 그를 들것에 실어서 피치 밖으로 옮겼고 대기중이던 앰뷸런스에 즉시 태워 보냈다. 충격적인 사고의 여파로 모두가 망연자실하고 있었지만, 아직 끝나려면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고 피치 위의 선수들은 다시 경기를 속행해야 했다. 분노와 안타까움으로 정신이 얼얼한데 람지를 위해서라도 일단 이 경기는 이겨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이 광경을 함께 지켜본 모든 팬들과 아스날 선수들의 마음은 똑같지 않았을까. 벤트너가 얻어낸 페널티 킥을 세스크는 침착하게 골로 만들었고 람지의 다리를 의미하는 세레머니를 했다. 이어진 베르마엘렌의 추가골. 선수들은 관중석 근처까지 달려가 포효했다. 내 가슴도 울컥했다.
아론 람지 “나는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그 태클이 들어간 이후 내 다리가 부러져서 다른 각도로 매달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 충돌 이후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다시 봤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 없으니 여기에 너무 매달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 순간,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이번 시즌 나는 잘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부상은 정말 좌절스럽다. 하지만 나는 어리고 미래가 있다. 지난 주에 수술을 받았고 내 다리가 회복되기 위한 시간을 가질 것이다. 나는 이 부상을 극복하기 위해 단단히 마음을 먹었고 예전보다 더 튼튼하고 강해지길 바란다. 수많은 아스날팬들과 심지어 다른 클럽들의 팬들로부터도 굉장한 응원의 메시지를 받았고 이에 큰 감동을 받았다. 나는 아스날 선수임이 자랑스럽다.”
(2010. 3. 5. 아스날 오피셜)

[출처: Arsenal Player]

스토크전에서의 사고로 아론 람지의 오른쪽 다리는 무릎과 발목 사이 앞뒤에 위치한 정강이뼈와 종아리뼈가 동시에 부러졌다. 손가락 같은 작은 뼈도 아니고 다리가 완전히 두 동강이 난 끔찍한 부상. 축구 선수로서의 복귀 자체가 불투명하다는 얘기도 나왔다. 오래 걸려도 좋으니 부디 다시 뛸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내 우려와 바람들이 조금은 무색하게도 그는 한 달만에 목발 없이 걷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8개월 만에 훈련에 복귀했고 1달여 만에 2군 경기까지 뛰게 되었다. 실로 놀라운 회복력이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더불어, 부상당한 오른쪽 다리가 아닌 반대편인 그의 왼쪽 다리에 타투가 새겨졌는데, 자신의 고향과 가족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아마도 항상 용기를 잃지 않기 위함이 아닐까.

모든 것을 예전처럼 짠 하고 되돌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건강히 돌아오긴 했으나 부상의 후유증은 확실히 존재했다. 그의 플레이는 예전같지 않았다. 노팅엄 포레스트와 카디프로 임대를 다니며 경기 감각을 끌어올리고, 마침내 5월 1일 맨유를 상대로 짜릿한 복귀골도 넣었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이었을 뿐, 람지의 부진은 계속되었다. 정신적인 트라우마 때문일까, 몸의 감각을 잃은 것일까, 판단력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람지에게는 큰 부상이 있었고 1년 가까이 쉬었으니까’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점점 여의치 않는 팀 사정... 당장 승리가 필요한데, 피치 위에서의 한숨 나오는 플레이를 보이면 어느새 그를 기다리며 기원했던 마음들은 다 잊고 비판이 먼저 나왔다. 공격형 미드필더가 공격을 망치고 있다니. 좋지 않은 패스와 흐름을 끊는 플레이, 예전과 같은 많은 활동량을 보여줬지만 쓸데없는 움직임으로 인해 되려 팀의 밸런스가 파괴되었다. 어디로 움직여야하는지 모르는듯 헤매는 모습. 이런 부진이 1년이 넘어가니 슬슬 ‘람지를 팔아야 한다’는 여론마저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사랑하던 이가 불의의 사고를 겪으면서 그동안 내가 알던 것과 다른 모습이 되었다면, 그 사람을 예전과 같이 변함없는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말로는 어렵지 않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지 모른다. 긴 인내의 시간을 견딘다고 하더라도, 그 끝에서 내가 그리고 있던 풍경이 펼쳐진다는 보장도 없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사랑을 지켜가기 위해서는 정말로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과 사람의 연(緣)도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힘이 드는데, 직접 손에 닿지 않는 축구와의 연애는 오죽할까. 더군다나 궁극적으로 나의 사랑은 아스날을 향해있다는 것. 그 안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도 물론 아끼고 사랑하지만, 클럽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어울리지 않다면 어쩔 수 없이 이별을 생각해야만 한다. 람지에게 일어난 사고는 안타깝지만 끝을 알 수 없는 부진을 언제까지 감싸줘야하는 걸까. 기다리고 기다리면 언젠간 내가 기대하던 아론 람지로 과연 돌아올 수 있기는 한 걸까?

[출처: Arsenal Player]

바야흐로 2013년, 이 강제된 인고의 시간은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아르테타가 부상을 당하면서 어쩔 수 없이 람지가 이 자리에서 뛰게 되었는데, 슬슬 괜찮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활동량이 많은 선수라서 많은 공간을 커버할 수 있었고, 럭비 선수 출신이기에 피지컬도 좋으니 중앙에서 몸싸움도 잘했다. 그렇게 람지는 꽤 괜찮은 활약으로 조금씩 팬들의 마음을 돌려놓기 시작했고 대망의 이번 2013-14 시즌, 아론 람지는 확실히 돌아왔고 한 층 더 업그레이드 되었다. 그는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해서 공격과 수비에서의 빼어난 활약과 함께 왠만한 스트라이커를 뛰어넘는 골 행진까지 이어갔다.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이라도 받듯, 9월에는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로 선정되고, 구단에서 선정한 ‘아스날 이달의 선수’로는 8월부터 12월까지, 5개월 연속으로 선정되었다. 이렇게 람지는 어느새 ‘프리미어 리그 최고의 미드필더’라는 찬사를 들으며 아스날을 리그 1위로 이끌고 있었다.
아르센 벵거 “1년 전에는 사람들이 ‘그(람지)는 아스날에서 뛰기에 부족하다’고 말했던 것을 잊지 말자. 하지만 이렇게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본인의 노력 덕이다. 그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능력이 있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명해냈다. 알다시피 그를 보며 참을 수 없어하던 시선들이 있었다. 감독으로서 이런 시기에 직면하면 생각하게 된다. ‘내가 그를 더욱 밀어붙여서 앞으로 나아가게 해야할까? 아니면 휴식을 주어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해야할까?’ 이러한 문제는 항상 판단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선수의 정신적인 상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떨어져있다면 당연히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아론은 늘 자신감 있는 소년이었다. 우리는 그가 좋은 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에게는 또다른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숨지 않는 것이다. 그는 실수를 할 때에도 숨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능력이다.”
(2013. 11. 16. 스카이스포츠)

[출처: UEFA Champions League Magazine]

바로 1년 전까지만 해도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미래에 가능성이 없다는 얘기를 듣던 선수가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상황을 역전시키고, 리그 최고의 선수로 떠오르다니 축구판은 정말 모르는 법이다. 이런 그가 지금은 다른 부상으로 두 달째 나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또 뜻밖의 전개. 이 연애는 도저히 지루할 틈이 없다. 그의 부재와 맞물려 아스날은 차츰 추락했고, 이제는 4위. 람지는 팀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가 다시 부상에서 돌아와 위기의 아스날을 구해낼 수 있을까?

웨일스에서 날아온 17살 소년에 웃고, 울고, 화내고, 그러다 다시 웃고, 이제는 그리워하는, 이 예측할 수 없는 연애소설의 다음 페이지에는 과연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까. 다사다난했던 시작에 가슴을 졸이던 것이 어제 같은데, 어느새 그 아픔도 다 잊혀져간다. 이제는 기쁨에 환호하는 순간들로 우리의 하루가 채워지길. 이제 조금 더 단단해진 믿음으로 나는 내일을 향해 새로운 희망을 건다.

[출처: Guardian 홈페이지 캡쳐]

이렇게 이번 주의 ‘아스날과 연애중’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이틀만에 새 소식이 들려온다. 아스날이 아론 람지와 5년 재계약에 사인할 예정이고, 그는 벌써 부상에서 돌아와 이미 훈련을 소화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 주 바이에른 뮌헨 원정에 뛸 수도 있다는 희소식과 함께. 아무래도 내가 건 희망은 곧 오늘의 설렘이 되려나 보다. ‘웨일스에서 온 그대’와 나의 연애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조금 더 뜨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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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리 토끼를 좇는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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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연애는 특별하다. 남들의 눈에 어떻게 비치든 상관없다. 나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존재. 그래서 나의 사랑은 올곧고 정직하며 진실하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축구팀이든.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에게는 아직 사랑하는 이가 없는 덕택에, 바다 건너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스날이 온전히 내 사랑을 듬뿍 받고있는 중이다. 비록 멀리 떨어져있지만 이 축구팀 덕분에 나는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다. 그래서 내게 여자 친구가 생기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조금 걱정이다.

누군가와의 연애와 다르게 축구팀과의 연애는 도전적이고 목표지향적이다. 매년 8월,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면 우리에게는 네 가지 지상 과제가 주어진다. ‘프리미어 리그’, ‘챔피언스 리그’, ‘FA컵’, ‘리그컵’. 우리의 사랑이 한결같이 뜨겁지 않고, 늘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이유는 바로 이것들 때문이다. 나와 사랑에 빠진 클럽이 우승과는 거리가 먼 중하위권 팀이라면 적당한 성적에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스날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유럽 최고의 축구 클럽을 꿈꾼다. 그러므로 모든 대회에서 우승이 목표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우리의 문제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그 차이가 매우 크다는 것. 매우.

출처: Setanta 1, UEFA Champions League Magazine, itv Sport, Direkte

소위 ‘빅클럽’이라고 불리는 클럽들은 몇 년에 한 두 개씩 작은 트로피라도 들어올리는데, 아스날은 8년째 손가락만 빨고 있다. 이상은 높지만 현실은 참담하니 불만만 계속 쌓여간다. 올해는 다를거야. 아니, 내년은 다를거야. 도대체 언제쯤 좀 다를까. 기세좋게 새 시즌을 시작하지만 딱 그때뿐이다. 차차 힘이 빠져서 시즌이 끝날 쯤에는 모든 대회에서 탈락하고 리그 4위 언저리에서 방황하다가 간신히 턱걸이로 마무리. 결론은 무관(無冠). ‘프리미어 리그’, ‘챔피언스 리그’, ‘FA컵’, ‘리그컵’ 네 마리의 토끼를 쫓다가 결국 다 놓치는 격이다. 그것이 지난 8년간 반복된 우리의 이야기. 2006년 4위를 시작으로 2007년 4위, 2008년 3위, 2009년 4위, 2010년 3위, 2011년 4위, 2012년 3위, 2013년 4위. 이 추세로 볼 때 아마 올해의 프리미어 리그는 3위로 마치게 되는 것일까. 이제는 이 지겨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 아래로 말고 위로.

올해의 네 마리 ‘토끼 사냥’은 얼마나 잘하고 있나. 일단, ‘리그컵’ 토끼는 벌써 놓쳤다. 작년 10월에 첼시를 만나 일찌감치 탈락. 괜찮다. 가장 작은 토끼고 사냥에 성공해도 그리 인정받지 못하니까. 우리의 목표는 더 높은 곳에 있고 작은 것에 연연하지 말자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무엇보다도 아직 토끼가 세 마리나 남아있잖아? 그런데 가장 덩치가 큰 ‘챔피언스 리그’ 토끼도 놓치기 직전이다. 16강 1차전에서 바이에른 뮌헨에 2-0으로 패했고, 아직 2차전이 남아있지만 냉정하게 우승은커녕 뮌헨을 넘는 것조차 어려워보인다. 그럼 현실적으로 두 마리 토끼가 남는다.

출처: BBC Match of the Day

가장 중요한 ‘프리미어 리그’ 토끼. 최상위 네 개팀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중이다. 첼시, 리버풀, 아스날이 28경기를 치렀고, 맨체스터 시티는 26경기 밖에 아직 하지 않아서 절대 비교는 조금 어렵지만, 일단 첼시가 1위. 맨체스터 시티의 기세를 볼 때 아마도 밀린 두 경기를 이긴다고 가정하면, 첼시와 맨체스터 시티가 1위 경쟁, 아스날과 리버풀이 그 뒤를 추격하는 형세이다. 일반적으로 프리미어 리그를 우승하기 위해서는 강팀과의 경기보다 약팀과의 경기에서 차곡차곡 승점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이번 시즌은 다같이 잘하고 있으니 결국 강팀간의 맞대결에서 결판이 날 느낌이다. 그런데 아스날은 강팀과의 경기에서 유독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 이번 시즌을 4위 안으로 마치고 다음 시즌의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획득하는 것이 실현 가능한 목표가 아닐까. 우승은 솔직히 어려울 것 같다.

그럼, 마지막 남은 ‘FA컵’ 토끼. 프리미어 리그만큼은 아니지만 잉글랜드의 모든 축구 클럽들이 참가해서 우승 팀을 가리는 권위있는 대회다. 그리고 아스날이 마지막으로 들어올린 트로피도 바로 2005년의 FA컵. 올해, 아스날의 FA컵 대진운은 유난히 안좋았다. 5라운드에서 만난 3부 리그의 코벤트리를 제외하고, 차례로 토튼햄, 리버풀, 그리고 8강에서 에버튼을 만났으니,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상위권 팀들만 상대했다. 그런데 그것이 전화위복이었을까. 예전에는 쉬운 상대를 만만하게 보다가 된통 당해서 탈락하곤 했는데, 올해는 어려운 상대를 만났지만 차례로 이기고 어느새 8강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선택의 문제에 직면한다.

출처: BBC Sport

FA컵 에버튼전, 3일 후에 바이에른 뮌헨과의 챔피언스 리그 2차전, 이어서 주말에는 북런던 라이벌인 토튼햄 원정. 그 다음 주에는 프리미어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는 첼시와의 결전이 기다리고 있다. 어려운 경기들만 골라서 몰려있는 숨막히는 일정. 선수들도 사람인지라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고, 팀으로서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기다. 비록, 뮌헨에게 1차전에서 패했으나 유럽 최고의 클럽을 가리는 챔피언스 리그를 미리 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상의 전력으로 싸워야할 경기. 주말의 프리미어 리그 경기도 물론 중요하다. 1위 첼시를 따라잡기 위해 승점을 쌓아야할 때이고, 토튼햄이 5위로 바짝 쫓아오고 있기에 더더욱 이겨야 하는 상대. 무엇보다도 아스날의 가장 직접적인 지역 라이벌이기에 자존심까지 걸려있다. 그렇다면, 다음 두 경기를 위해 이번 FA컵에서는 주전 선수들을 빼고 휴식을 주어야할까. 그런데 아스날의 8년 무관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대회가 현시점에서 FA컵이란 점이다. 8강까지 올라왔으니 세 경기만 더 이기면 우리가 그렇게 갈망하던 트로피. 아,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

아르센 벵거 “난 그저 팀이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할 것이고 그 뿐이다. FA컵은 우선 순위중 하나이다. 최우선 순위는 늘 프리미어 리그에서 잘하는 것이다. FA컵은 다음 경기이고, 우리는 스토크전에서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었으므로 강하게 반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FA컵은 완전히 우리의 우선 순위이다. 왜냐하면 다음 경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하고 승리해서 4강에 오르길 바란다. 그것이 다른 경기들을 준비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출처: itv Sport

벵거 감독은 보란 듯이 주전 선수들을 대거 출전시켜 에버튼에 4-1의 대승을 거뒀다. 이제는 FA컵 우승까지 두 경기만 이기면 된다.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맨체스터 시티가 탈락하면서 아스날의 준결승 상대는 2부 리그의 위건. 정말로 트로피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졌다. 설렘으로 가슴이 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음 경기를 생각하면 또 새로운 고민이 시작된다. FA컵에서 힘을 많이 썼으니, 주말의 리그 경기를 위해 가능성이 희박한 챔피언스 리그를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래도 챔피언스 리그는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가. 이쪽도 저쪽도 포기할 수 없으니 주전 선수들의 체력을 믿고 전부 승리하기를 기대해야 하는가. 세 마리의 토끼를 눈앞에 둔 우리에게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어차피 아스날의 감독은 따로 있는데 홀로 아스날의 모든 근심을 어깨에 짊어진 듯 걱정하고 분석하는 어느 흔한 축구팬의 하루.

우리의 연애가 정말로 특별한 이유는 함께 꿈꾸던 것들을 아직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년 목표로 세우는 네 개의 트로피는커녕 당장 다가오는 경기에도 불안해하고 있지만, 우리는 서로를 놓지 않은채 함께 아파하고 고민하며 내일의 희망을 찾는다. 불완전하고 불리한 조건 속에서 번번이 좌절하곤 하지만, 그것으로는 이 사랑을 꺼트릴 수 없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나의 마음이 선수들에게 전해져 그 누구보다도 승리를 위해 땀흘릴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애는 특권이다. 영광의 순간이 아직 찾아오지 않았기에, 우리에게는 더 행복할 날들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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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탉이 라자냐에 빠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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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그들은 연인이 된다. 그러나 축구팀과 사랑에 빠지면, 연인보다 조금 더 끈적한 관계가 형성된다. 이른바,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 나의 팀이 매일 승승장구하며 행복하고 평화로운 연애가 지속되면 참 좋을텐데, 뻔한 스포츠 만화처럼 현실에서도 어김없이 라이벌이 등장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긴다. 이때 내가 순순히 상대팀의 승리를 인정하고 박수쳐줄 것을 기대했다면 큰 오산이다. 우리는 좌절하고, 분노하며 상대를 향해 매우 불편한 감정에 휩싸일 뿐이다. ‘다음에는 당한만큼 돌려주리라’ 이를 박박 갈면서 말이다. 그런데, 오늘 내가 이야기할 우리의 라이벌은 그런 라이벌이 아니다.

라이벌. 국어사전의 정의를 빌리자면, ‘같은 목적을 가졌거나 같은 분야에서 일하면서 이기거나 앞서려고 서로 겨루는 맞수’.리그 우승을 향해 경쟁하는 강팀은 모두 아스날의 라이벌이지만, 그 중에서도 유별난 ‘라이벌 아닌 라이벌’이 하나 있다. 라이벌이 아닌 이유는, 언제나 우리가 승리하니까(사실은 가끔 패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벌인 이유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하는 상대니까. 클럽 앰블럼에 '닭'이 새겨져있는 그들의 이름은 ‘토튼햄 핫스퍼’. 아스날과 토튼햄.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는 이 두 팀이 부딪치는 날,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치열한 ‘북런던 더비’가 펼쳐진다.


[출처: Arsenal Legends - Thierry Henry, BBC Match of the Day] 

아스날과 토튼햄이 처음부터 이렇게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갈등의 시작은 19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아스날 홈구장은 런던 남동쪽 플럼스테드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지리적인 이유때문에 관중 수입이 신통치 않았다. 결국 북런던의 하이버리로 경기장을 옮기게 되었고, 이 결정에 토튼햄은 분노했다. 왜냐하면 하이버리는 토튼햄의 홈구장인 화이트 하트 레인으로부터 5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아스날과 토튼햄은 가장 근접한 이웃인 동시에 로컬 라이벌로서의 관계가 정립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북런던 더비’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치열한 더비 경기 중 하나가 되었다.

워낙 사이가 안좋은 두 팀인지라 서로간의 선수 이적도 극히 드물었는데, 2001년에 토튼햄 팬들을 충격에 빠트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토튼햄의 주장이자 핵심 선수였던 솔 캠벨이 재계약을 미루고 있었고, 그는 “다른 곳으로 떠날 수는 있어도 아스날과는 계약하지 않을 것” 이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문제는, 캠벨이 결국 아스날행을 택했다는 것. 아스날 팬들은 라이벌의 주장을 뺏어왔다며 토튼햄을 조롱했고, 이에 일부 과격한 토튼햄 팬들은 그를 ‘유다’ 라고 부르며 살해 협박까지 했다. 캠벨은 아스날로 이적 후, 토니 아담스와 함께 단단한 중앙 수비를 구축했고, 바로 그 시즌 아스날에서 프리미어 리그와 FA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상상해보라. 우리팀의 주장이었던 선수가 라이벌 팀으로 넘어가 대활약을 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얼마나 속터지는 일인가.


[출처: Sky Sports] 

서로간의 깊은 감정의 앙금과는 별개로, 아스날과 토튼햄의 싸움에서 승자는 늘 아스날이었다. 1995년 이후, 현재까지도 토튼햄은 최종 리그 순위에서 아스날 위에 올라선 적이 없다. 그런데 중간에 딱 한 번, 토튼햄이 아스날을 넘을 뻔한 적이 있었다. 2005-06 시즌, 리그 한 경기를 남겨두고 토튼햄은 4위, 아스날은 5위. 토튼햄은 마지막 경기였던 웨스트햄전을 이기면 그대로 4위를 확정짓는 상황이었다. 4위는 챔피언스 리그, 5위는 한 단계 아래의 UEFA컵을 의미하므로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위해 4위 자리는 아스날, 토튼햄 모두에게 절실했다.

드디어 아스날을 추월할 11년 만의 거사를 앞둔 경기 전날 밤, 토튼햄 선수단은 평소대로 저녁 7시쯤 런던 카나리 와프의 메리어트 호텔에 모였다. 호텔 측은 선수들을 위해 특별한 뷔페를 준비했고, 대다수의 선수들이 라자냐를 먹었다. 그런데 새벽 5시, 토튼햄의 주전 선수 10명이 갑작스런 구토와 설사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다비즈, 타이니오, 킨, 도슨, 캐릭, 레논, 체르니, 데이븐포트, 바나드, 리. 그 중에서도 캐릭의 증세가 제일 심했고 걷는 것조차도 어려워했다. 이에 토튼햄의 회장 다니엘 레비는 프리미어 리그 측에 경기를 연기해줄 것을 요청했다. 프리미어 리그 최고 경영자였던 리차드 스쿠다모어는 클럽간 합의한 결정에 맡기되, 때에 따라서는 클럽을 처벌하거나 승점을 삭감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토튼햄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잘 서있지도 못하는 10명의 선수를 데리고 중요한 경기를 치러서 4위에 오를 기회를 날리느냐, 혹은 승점 삭감을 감수하고 경기를 연기시키느냐. 어느 쪽으로든 챔피언스 리그에서 뛸 기회를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 상대팀이었던 웨스트햄은 경기를 연기하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다음 날로 미뤄지는 것은 원치 않았고, 3시 경기를 7시로 연기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었다. 토튼햄도 4시간 정도면 선수들이 회복하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이때는 낮이었고 웨스트햄 팬들이 경기장 주변에 모여들어 있었다. 경찰은 갑작스레 경기 시간을 4시간이나 연기하면 이들을 안정시키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고, 2시간만 연기하는 것만 허락했다. 토튼햄 입장에서 2시간을 연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예정대로 경기는 오후 3시에 시작되었다. 결국, 토튼햄은 패했고 아스날은 승리하면서, 두 팀의 순위는 토튼햄 5위, 아스날 4위로 극적으로 뒤바뀌어 운명의 여신은 또다시 아스날을 향해 웃었다.

[출처: 데일리 미러, 텔레그라프, 데일리 메일 캡쳐] 

당시 토튼햄의 감독이었던 마틴 욜은 말하길, “무슨 음모가 깔려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있고, 클럽은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커다란 뷔페였고, 수많은 접시와 스테이크, 치킨, 각종 음식들이 있었다. 새벽 5시쯤, 선수들이 아프기 시작했고, 아침이 되자 6, 7명이 아프게 되었다. 오후 1시, 클럽 회장과 비서는 이 일을 경찰에 신고하기로 했다. 많은 사람이 아팠기 때문에 환경 건강 담당관도 호텔을 방문했다. 과거에 두세명의 선수가 아팠던 적은 있으나, 같은 날에 10명이 아팠던 적은 처음이다. 어떤 방해 공작이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모르는 일이다.”

잉글랜드 보건국은 호텔 음식의 샘플을 가져가 조사했지만 음식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고, 선수들의 증상이 노로바이러스로 인한 바이러스성 장염이라는 것만 밝혀졌다. 이후, 당시에 토튼햄 선수연던 조니 잭슨은 ‘라자냐 게이트’는 과장된 것이며, 실제로 아팠던 것은 마이클 캐릭 한 명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와서 누가 아팠고 안아팠고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결과는 변함없이 토튼햄이 드라마틱하게 또다시 아스날에게 밀렸다는 것이고, 두고두고 놀릴 수 있는 좋은 이야기거리까지 생겼다. 특히, 이 사건을 기념(?)하여 토튼햄 팬들을 조롱하는 <라자냐> 응원가도 만들어졌다. 아스날 팬들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토튼햄을 조롱할 때 광범위하게 불려진다고 한다.



Lasagne woooah! (라자냐 오오오!)
Lasagne woooah! (라자냐 오오오!)
We laughed ourselve to bits (우리는 엄청 웃었지)
When Tottenham got the s**ts (토튼햄이 X을 먹었을 때)


[출처: BT Sport] 


돌아보니 내가 아스날과 연애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인 것 같다. 한끝 차이로 아스날이 아닌 그 옆동네의 토튼햄과 눈이 맞았다면, 라이벌 팬들의 조롱까지 더해져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아스날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하다고 느껴왔는데, 역시 행복은 상대적인 것인가 보다. 아스날을 넘어보겠다는 토튼햄의 바람은 올해도 이뤄지기 어려워보인다. 우승권에서 경쟁중인 아스날은 토튼햄과 이미 차이가 벌어져 더 위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열린 2014년의 첫 ‘북런던 더비’의 승부도 토마스 로시츠키의 놀라운 골에 힘입어 아스날의 1:0 승리. 월요일 출근의 부담 때문에 이 멋진 골을 직접 보지 못하고 잠을 청한 나의 선택은 조금 아쉽지만, 어쨌든 라이벌을 꺾었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다시 말하지만, 축구팀과 사랑에 빠진 그들은 팀과 운명 공동체가 된다. 아스날의 라이벌은 나의 라이벌이 된다. 라이벌의 팬들도 나의 라이벌이 된다.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가 읽기 싫어지고, 아델의 노래를 잘 안듣게 되고, 주드 로의 영화가 점차 재미없게 느껴지는 것도 그들 모두가 토튼햄 팬이기 때문일까. 유치해도 어쩔 수 없다. 그깟 공놀이는 당신이 우리편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오늘도 나는 질문한다.

“축구 좋아하세요? 혹시 어느 팀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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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싸움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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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라도 가끔씩은 갈등이 생기고 다툼도 한다. 이럴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다. 감정을 앞세우기 보다는 상대방의 말에 먼저 귀 기울이고, 어떤 부분에서 상대방이 속상했는지 공감하고, 인정하고, 사과하고...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이론처럼 잘 되지 않는다. 지금은 이렇게 술술 말하는 나조차도 갈등의 순간에는, 내가 옳고 상대방이 그름을 열심히 주장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리고 그것마저 뜻대로 안될 때에는 친한 친구에게 슬쩍 나의 고충을 털어놓기도 한다. 이때 가끔씩 묘한 상황이 발생하는데, 친구가 나를 위한답시고 나를 대신해 그녀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 아이러니하게도 내 기분이 안좋아진다.

축구팀과의 연애도 마찬가지다. 아스날 팬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면, 단골 주제는 아스날의 감독인 ‘아르센 벵거’다. 다들 똑같이 아스날과 사랑에 빠져있으면서 누군가에 대해 의견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갈라지는 것도 참 신기하다. 한 번 화두가 던져지면, 이른바 ‘벵빠(벵거 옹호론자)’와 ‘벵까(벵거 비판론자)’로 나뉘어 순식간에 뜨겁게 논의가 불타오른다. 그리고 그 날의 여론은 아스날의 성적을 따라가는 편이다. 아스날이 잘하는 날에는 ‘벵거가 옳다’는 의견이 득세하다가, 아스날이 패배하는 날에는 ‘역시 벵거는 안된다’며 비판의 목소리가 줄을 잇는다. 그러나 이 두 집단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아지는 날이 있으니, 외부인이 벵거를 ‘까는’ 날이다.

[출처: BBC Match of the Day] 


아르센 벵거. 1996년에 아스날의 감독으로 부임한 후 식습관, 전술, 훈련 방식에 혁명을 일으켰고, 프리미어 리그 최장수 감독으로서 18년의 재임기간동안 7개의 트로피를 획득, 특히 2003-04 시즌에는 1년 동안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무패 우승’을 이룩했다. 외부의 금전적 도움 없이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을 건립하고, 그에 따른 재정적 압박을 견뎌내면서, 억만장자 구단주들을 등에 업은 클럽들과 경쟁하여 매년 아스날을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시킨 인물. 아마도 현재까지의 아스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기록될 사람. “나의 꿈은 타이틀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인 축구가 그라운드에서 단 5분만이라도 구현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상주의자.

[출처: BBC Match of the Day] 

그리고 벵거와는 완전히 반대편 극단에 서있는 인물이 있다. 조제 무리뉴. 스스로를 ‘스페셜 원’이라 지칭하며 잉글랜드 축구계에 등장한 남자. 포르투, 첼시, 인테르, 레알 마드리드를 거치면서 최초로 유럽 4개국 리그를 정복하고, 트레블을 포함, 2회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까지 차지한 자타공인 세계 최고의 감독. 그러나 이것 만으로는 무리뉴를 완전히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누구보다 화려한 언론플레이로 입만 열면 어록을 쏟아낸다. 나쁘게 표현하자면, 독설과 막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호전적인 인물. 축구는 승리해야 하는 스포츠이며 트로피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실용주의자.

같은 축구 감독이지만 이렇게 서로 성향이 다른 두 사람이기에, 2004년 조제 무리뉴가 첼시에 부임한 이후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설전(說戰)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출처: BT Sport] 

2005년 8월, 아르센 벵거
“우리는 승자와 패자로만 나눠지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알고있다. 그러나 스포츠가 팀들에게 (패배를 당하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서지 않는 것을 장려한다면, 스포츠 자체가 위험에 빠질 것이다.” (첼시의 수비적인 스타일에 대해)

2005년 10월, 조제 무리뉴
“난 그가 ‘관음증’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한다. 자기 집에 커다란 망원경을 가져다 놓고 다른 사람의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벵거는 그 중에 한 명임이 확실하다. 그는 첼시에 대해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한다.”

2005년 11월, 아르센 벵거
“그는 도를 지나쳤고 현실과 동떨어졌다. 그리고 무례하다.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성공을 안겨주면, 때로는 그것이 그들을 더욱 어리석은 사람들로 만든다.”

2005년 11월, 조제 무리뉴
“벵거가 지난 12달간 첼시에 대해 했던 발언들을 정리해놨다. 5, 6페이지가 아니라 120페이지이다.”

2007년 4월, 아르센 벵거
“모든 감독들을 비교하고 싶다면, 그들 각각에게 똑같은 양의 자원을 주고 '그것으로 5년을 버텨라' 라고 말해보라. 누가 5년 후에 가장 많은 것을 이뤘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4월, 조제 무리뉴
“잉글랜드 사람들은 통계를 좋아한다. 그들은 아르센 벵거가 리그에서 고작 50%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설전이라고 썼지만 서로 한 대씩 주고 받았다기보다는, 대체로 벵거가 나름의 근거를 바탕으로 뭔가를 툭 지적하면, 무리뉴는 이를 악물고 온 힘으로 받아치는 그림에 가깝다. 그래서 무리뉴의 지나치게 거센 언변은 혹시 벵거에게 질투심이라도 느껴서 그런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다. 무리뉴는 벵거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상대 감독들과, 때로는 심판과 선수들에게조차 막말을 하거나 부적절한 행동을 해서 비판 받는 일들이 있었고, 이를 떠올려보면 벵거와 주고받은 말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2008년, 무리뉴는 첼시의 구단주 아브라모비치와의 불화 때문에 이탈리아로 떠났고, 아스날팬들은 눈엣가시가 사라졌다고 좋아했다. 리그에서 상대할 일도 없고, 자극적인 멘트를 들을 일도 없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5년 만에 그는 다시 첼시로 복귀한다. 그러나 그도 조금은 나이를 먹은건지, 혹은 그동안 벵거와의 관계가 나아진건지 갑작스런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출처: 가디언 캡쳐] 

2013년 7월, 조제 무리뉴
“그는 매우 멋진 사람이다. 내가 잉글랜드를 떠난 후 UEFA, 유로, 월드컵에서 그를 만나기 시작했고, 우리는 함께 저녁도 먹었다. 같은 리그에 있지 않고 서로를 상대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알아가기가 더 쉬워진다. UEFA와 유럽의 다른 감독들과도 마찬가지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그와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커다란 문화 속에서 성장했고 매우 열린 사람이다. 나는 그를 대단히 존경하고 항상 존경심을 드러낼 것이다. (그동안 주고받은 말들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는 것인가?) 그것도 축구의 일부이고 때로는 친구 사이이고 서로를 존경하면서도 상대방이 좋아하지 않는 말을 하고 이에 반응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끝에서 나는 그를 매우 존경하고 그 역시 나에게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느낀다. 나는 우리 사이에 단 하나의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게 어떻게 하면 이곳에 17년간 남을 수 있는지 가르쳐줘야 한다. 우리의 마지막 대화도 내가 이곳에 17년동안 남고 싶다는 것이었다.”

벵거를 향한 존경심? 친구 사이? 무리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살다보면 인간 관계는 참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동안 약간 오해가 있었고 사실은 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고, 무리뉴는 어쩔 수 없는 무리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출처: BT Sport] 

2014년 2월, 아르센 벵거
“(왜 감독들이 우승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우승 경쟁은 매우 열려있고 오직 첼시만이 실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맨 앞에 있고, 다른 팀들은 역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팀이 우승 경쟁을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실패할 일은 없다. 간단한 것이다. 나는 우리의 일이 야망적이고 승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우승 경쟁을 하고 있다고 말하겠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내가 모든 책임을 질 것이다.”

2014년 2월, 조제 무리뉴
“내가 실패를 두려워하냐고? 그는 실패의 전문가이다. 나는 아니다. 설사 그의 말이 옳고 내가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그 이유는 난 실패한 적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의 말이 옳을 수도 있다. 난 실패에 익숙지 않다. 하지만, 그는 전문가이다. 8년동안 단 하나의 트로피도 들지 못하는 것, 그것은 실패이다. 내가 만약 첼시에서 그랬다면 이곳을 떠나 런던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난 축구에서 어느 것도 두렵지 않다. ‘관음증’ 코멘트에 대해서는 미안하다. 하지만 그는 우리 클럽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2007년부터 2013년이라면 이를 용서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우리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왜 그렇게 첼시에 집착할까? 그에게 물어봐라. 왜 그는 8년간 하나의 트로피도 들지 못했을까? 그에게 물어봐라. 나에게 트로피 하나를 들기 위해 8년이 필요할까? 필요없다.”

2014년 3월, 아르센 벵거
“(무리뉴와의 관계) 친구가 될 수 없다. 불가능하다. 어느 경기든 시작하면 나는 이겨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일이다. 이러한 면에서 가장 앞서 있는 스포츠는 럭비이다. 그들은 경기 전 터널을 걸어올 때 서로에게 키스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걸어나오며 전쟁을 준비한다.”

2014년 3월, 조제 무리뉴
“우리는 친구가 아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친구’의 개념을 모르겠다. 그것이 1년에 5분씩 3번 보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나는 모르겠다. (벵거의 1,000번째 경기) 내가 보내는 찬사는, 우리도 우리 클럽에서 그와 같은 특권을 얻길 바란다는 것이다. 찬사를 보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나는 내 커리어와 경험한 것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는 모두가 원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감탄하고, 아스날에 감탄한다. 왜냐하면 클럽이 형편없는 시기를 보내는 감독에게 환상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는 이상, 1,000경기를 치르는 일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형편없는 순간들이 상당히 많았음에도 말이다.”

[출처: BT Sport] 

아스날의 지난주 토요일(3월 22일) 경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아르센 벵거가 1996년에 아스날의 감독으로 부임한 이래로, 딱 1,000번째되는 경기였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축구계의 인사들이 찬사의 말을 건네며 벵거가 이룩한 업적을 기리고 축하할 때, 조제 무리뉴만이 유일하게 비아냥 거린 것도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런데 하필 그 1,000번째 경기 상대가 무리뉴의 첼시 원정.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정말 그렇다.

벵거는 무리뉴를 상대로 통산 10경기 5무 5패로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야 말로 이겨보자며 전의를 불태웠고, 더불어 무리뉴가 지켜오던 스탬포드 브릿지 무패 기록도 깰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리그 선두 첼시를 따라잡고 다시 아스날의 우승 희망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벵거의 1,000경기 기념일을 의미있게 마무리 짓기 위해,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하지만, 인생은 참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이날 아스날은 승리는 커녕, 치욕스러운 6-0 대패를 당했다. 그리하여 벵거의 대 무리뉴 상대 전적은 11경기 5무 6패. 여전히 승률 0%.

[출처: BBC Match of the Day] 

결국, 무리뉴가 옳고 벵거가 틀린 것일까? 축구계에서 각각 이상주의와 실용주의를 대표하는 두 감독의 맞대결인데 민망할 정도의 압도적인 전적은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무리뉴가 비록 감정적이고 노골적인 대응을 자주 할 지라도, 늘 승리와 트로피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해왔다. 반면, 벵거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축구로 무리뉴를 이긴 적이없고, 이번 시즌 라이벌들을 상대로 맨시티에 6골, 리버풀에 5골, 첼시에 6골을 먹히며 자신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정말로 벵거의 시대는 끝나가는 것일까? “이제는 톱 클럽들과 경쟁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공허하게 들리는 것 같다.

만약, 내가 아스날과 사랑에 빠지지 않았고, 무리뉴가 훨씬 덜 재수없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난 그를 지지했을 것이다. 스포츠를 바라보는 관점이 나와 맞는다. 아름다움은 좋지만 강함없이는 아름답지 않으며, 클럽에 남는 것은 트로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리뉴가 벵거를 두고 ‘실패의 전문가’라고 깎아내린 표현에도 기분 나쁘면서 공감했다. 그러나 벵거의 어리석어 보이는 고집스러움이 한편으로 존경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끝까지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집념 때문은 아닐까.

[출처: BBC Match of the Day] 

아르센 벵거와 조제 무리뉴. 이 두 사람중 누가 더 위대한 감독으로 기억될 지는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지금 나에게 확실한 단 한 가지는, 내가 아스날에 빠져 10년 넘게 연애하면서 희로애락을 함께한 감독이 아르센 벵거라는 것이고 누가 뭐래도 그는 아스날의 감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인정하는 무리뉴라도 내 연애를 거슬리게 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내 친구가 나를 위한답시고, 여자 친구의 잘못을 꼬집는 말에도 괜히 언짢아하던 나인데,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작정하고 깎아내리는 말에는 도저히 유쾌할 수 없다. 확실히 말하겠는데, 내 새끼는 까도 내가 깐다. 남이 까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결국 잘하는 것 밖에 없다. 벵거가 아름다운 축구를 원한다면 좋다. 아름답게 잘하자. 잘해서 승리하자. 승리하고 또 승리해서 트로피를 들자. 주변의 건방진 입을 다물게 하는 방법은 실력으로 보여주는 수 밖에 없다. 아무리 화려한 말솜씨의 무리뉴라고 해봤자 그를 피치 위에서 꺾는다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번 패배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복습해서 더 강한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무리뉴의 첼시가 아스날과 다시 만날 날까지 스탬포드 브릿지 무패 기록을 지키고 있으면 좋겠다. 이 빚은 반드시 우리가 갚아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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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누구를 위하여 휘슬은 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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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마땅히 지켜야할 것들이 있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규칙을 만들고 지킨다. 심지어 연인 사이에도 지켜야할 것이 있다. 서로를 만나기 전까지 다른 인생을 살아온 두 사람이기에, 우리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한다. 그렇게 그어지는 작은 '선'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이어주는 연결 고리가 된다. 어떤 이유로든 이 '선'을 무시하고 무분별하게 자신이 내키는대로만 행동한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결국 갈등과 상처로만 얼룩질 뿐이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관계도 이러한데, 하물며 두 팀이 상대방을 꺾기 위해 투쟁하는 스포츠는 오죽하겠는가. 여기에서는 더욱 엄격한 규칙이 세워져있다. 공평한 승부를 위해, 반칙과 속임수를 쓰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그 어느 곳보다도 투명하고 명확한 규칙들이 스포츠에는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스포츠가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이 규칙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움을 수호하는 자, 그들의 이름은 ‘심판’이다.

문제는 심판도 인간이기에 결과물이 늘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 그래서 때로는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를 막장 드라마로 변모시키기도 한다.


2014년 3월 22일, 첼시전이었다. 전반 14분경, 토레스의 패스를 받은 아자르가 아스날의 골문을 향해 슈팅을 날렸고 볼은 옥슬레이드-체임벌린의 손을 맞고 나갔다. 고의적인 핸들이었으므로 레드카드(퇴장)감이었고, 페널티킥을 내어주는게 맞다. 하지만, 주심은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코너킥을 선언했다가 뒤늦게 부심으로부터 상황을 전해듣고 레드카드를 꺼내보였다. 여기서 문제는 엉뚱한 사람을 퇴장시켰다는 것이다.

[출처: BBC Match of the Day] 

해설자 :
“옥슬레이드-체임벌린의 손이 닿았고, 안드레 마리너(주심)는 이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가 옳은 판정을 하는 것입니다. 아스날 선수들로서는 항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생각하지만, 옥슬레이드-체임벌린의 손의 닿았습니다. 난 그가 이 판정에 불만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볼은 골을 향하고 있지 않았지만, 확실한 레드카드입니다.”

캐스터 :
“아르센 벵거와 아스날로서는 재앙이 벌어지고 있네요. 15분 만에 2-0으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페널티킥을 허용하고, 한 명이 퇴장당하면서 10명이 됩니다. 앗! 깁스가 퇴장당해서 경기장 바깥으로 나가고 있네요? (손에 닿은 것은) 옥슬레이드-체임벌린이었는데... 그(주심)는 무슨 일을 한거죠? 옥슬레이드-체임벌린은 피치 위에 남아있고, 키에란 깁스가 떠났습니다. 정말 놀랍네요.”

결국, 경기가 끝나고 나서 영국 축구협회는 잘못을 시인하고 선수들의 징계를 취소했다. 지나간 경기 결과에는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하지만, 오심을 인정하고 바로잡은 것이 그나마 작은 위로일까. 이미 두 골이나 먹혔고 세 번째 골을 허용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오심이 아스날의 경기를 망쳤다고 모든 책임을 돌리기는 어렵겠지만, 안그래도 어려운 상황에서 경기를 바로세워야 할 심판이 오히려 아스날에 혼란을 가중시켰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황당한 사건은 처음이지만, 아스날로서 심판에게 부당한 판정을 받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마치 세금과도 같은 느낌.

[출처: BT Sport] 

원론적인 이야기를 잠시 해보자. 축구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골. 그럼 축구에서 골은 어떤 상황에서 가장 쉽게 넣을 수 있을까? 실제로 이 질문은 전세계 유명한 감독들이 모여서 논의했던 주제이기도 한데, 그 답은 의외로 하나로 모아졌다. 바로, 세트피스(Set-piece).

축구는 22명의 선수들이 피치 위에 한데 뒤섞여서 움직이는 연속적인 스포츠이다. 야구와 비교하면 더욱 알기 쉬운데, 야구는 한 타자, 한 타자씩 나누어 승부를 보고, 이닝별로 공수 교대를 하는 등 작은 끊어짐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이 사이사이에 감독의 작전과 준비된 플레이가 펼쳐질 수 있다. 반면에 축구는 45분의 전/후반전이 끊김없이 진행된다. 단, 심판의 휘슬이 울리고 누군가의 반칙이 선언될 때까지. 그러면 경기는 멈추고 그 자리에서 프리킥같은 세트피스가 주어지는데, 이때 위치와 상황에 따라 준비된 플레이를 할 수 있다. 세트피스에서는 개개인의 움직임을 조직적으로 통제할 수 있고, 단 번에 공을 골대 근처까지 보낼 수 있으니 자연스레 골이 들어갈 가능성도 함께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은 파울조차도 실은 승부를 판가름할 계기가 될 수 있고, 박스 안에서 얻어내는 페널티킥이라면 더욱 결정적이다. 만약, 상대방에게 레드카드를 받게 하여 선수 숫자를 한 명 줄일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선수들은 작은 접촉에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피치 위에 뒹굴면서 심판으로부터 반칙 선언을 얻어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때로는 그 연기가 딱 걸려서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고통스럽게 얼굴을 감싸쥐며 쓰러진 후에 슬쩍 상황을 확인하는 바르셀로나의 부스케츠)
[출처: MBC ESPN] 

이와같이 축구에서는 심판의 크고 작은 판정들이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심판이 올바르고 공정한 판정을 해주길 바라지만, 그 기대는 자주 배반당한다. 특히 아스날과 연애중인 이들은 경기를 보다가 억울한 판정들에 여러번 속을 터뜨린다. 이것은 정말 모두 우연일까? 처음에는 그저 사소한 추측이었다. '저 주심(마이크 딘)이 나오면 왠지 아스날은 그날은 경기를 이기지 못하는 것 같다?' 는 식으로 말이다.

[출처: 데일리 메일] 

그러나 4년간 마이크 딘이 주관한 경기에서 딱 1승 밖에 거두지 못했다는 기록은 나에게 그것이 더이상 단순한 감이 아님을 깨닫게 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마이크 딘 주심의 경기에서 승리하지 못했고, 다른 팀들이 절반 정도의 승률을 기록했던 것과 비교되어 더욱 차이는 극명했다. 믿고 있던 심판의 공정성에 근본적으로 의문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정말로 심판은 공정한가?

이런 나의 궁금증을 풀어줄 자료가 있었으니, Referee Review 2013(www.refereedecisions.co.uk) 이었다. 프리미어 리그에는 공식적으로 배정된 17명의 심판이 있는데, 이들의 판정들에 대해 기록하고 분석해놓은 통계 자료를 제공했다. 이 내용의 핵심은 심판들의 ‘틀린 판정’, 즉 ‘오심’들이었다. 어느 심판의 오심이 어느 팀에게 유리하게 혹은 불리하게 적용되었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는데, 아스날과 관련된 수치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출처: Referee Review 2013] 

맨 윗줄의 아스날을 보자. 심판이 저지른 오심 중 131개가 아스날에 유리하게 판정되었고, 453개가 불리하게 판정되었다. 이 수치를 상쇄해서 경기수로 나눠보면 결과적으로 아스날은 매 경기에서 8.4개의 부당한 판정을 받은 격이다. 반면, 맨유를 보면 평균적으로 4.7개의 유리한 판정을 받았다. 그러므로 아스날과 맨유가 경기를 한다고 가정하면, 90분동안 평균적으로 13.2개의 오심이 아스날에 불리하게, 맨유에 유리하게 나온다는 의미이고, 이는 7분마다 아스날은 불공평한 판정을 받는 꼴이다. 놀라운 수치.

[출처: Referee Review 2013] 

아스날이 그동안의 경기에서 부당하게 적용받은 오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일단 눈에 띄는 수치는 두 번째 옐로카드. 총 12번의 오심중에 11번은 부당하게 두 번째 옐로카드를 받아 퇴장을 당했다는 의미. 레드카드도 총 8개의 오심이 전부 아스날로서는 억울한 퇴장들이었다. 이런 결정들이 경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 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또한, 두드러지는 수치는 파울/프리킥. 쉽게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상대팀 선수들이 아스날 선수들을 걷어차도 5~6번은 반칙이 선언되기는 커녕, 오히려 아스날의 반칙이라는 뜻이다.

그럼, 도대체 누가 이렇게 아스날에 불리한 판정을 내리는걸까? 정답은 너무 간단했다. 프리미어 리그 심판 전원.

[출처: Referee Review 2013] 

빨간 그래프는 해당 팀에 불리한 성향을 나타내고, 초록색 그래프는 유리한 성향을 나타내는데, 아스날은 여지없이 온통 빨간색 뿐이다. 그리고 그 수치도 압도적이다. 반면, 맨유와 토튼햄에는 유리한 판정을 나타내는 초록색 그래프가 다수 존재했다. 맨유와 토튼햄에 유리한 판정을 해준 심판들이 아스날은 불리한 대우를 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통계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구단이었던 맨유에 유일하게 대항하던 클럽이 프랑스인 감독 아르센 벵거의 아스날이라는 사실. 전통적으로 현지에 많은 팬을 거닐고 있는 토튼햄의 가장 직접적인 라이벌 역시 아스날이라는 사실. 혹시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리그에 안티-아스날의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아닐까. 프리미어 리그 심판진이 정말로 안티-아스날 성향을 띠고 있다면 아스날은 매 시즌, 매 경기, 매 순간을 부당한 판정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외부적으로는 맨시티, 첼시처럼 돈을 펑펑 쓰는 클럽들과 경쟁해야 하고, 내부적으로는 심판들의 개인적 성향에 맞서싸워야 한다니. 왜 이렇게 우리에게는 하나도 쉬운 것이 없는 걸까.

내가 게임보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이유는, 진부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각본없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고 약한 자는 도태하는 이 세상의 논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정해진 틀 안에서 누군가가 흘린 땀의 결실이 때로는 기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결과에 특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누군가의 각본이 존재하고 있다면, 더이상 스포츠는 아름다울 수 없다.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 김연아가 잃은 금메달, 그 이상으로 우리가 잃은 것은 스포츠의 진정성과 감동이었다.

[출처: SKY Sports] 

연인에게도, 선수에게도, 그리고 심판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 지켜야할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지켜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쉽게 잊는 것 중 하나는 심판도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피치 위에서 쉼없이 뛰고 있다는 것이다. 부당하고 어이없는 판정에 화가 나기도 하지만, 90분간 땀흘리고 있는 그들의 노력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삑ㅡ'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울릴 심판의 휘슬 소리는 누군가를 위한 울림이 아니라, 부디 피치 위에서의 흔들림없는 정의로움의 외침이길. 그리고 이왕이면 나처럼 아스날과 연애까지는 안해도 좋으니까, 우리를 조금만 덜 미워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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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싸움의 기술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산티’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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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너가 제일 예뻐.”

남자는 여자친구에게 뻔한 거짓말을 하고, 여자는 남자친구의 거짓말을 기분좋게 들어준다. 한 마디의 거짓말로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번질 수 있다면 꽤 괜찮은 시도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생긴다. 이 말이 거짓말이라면, 그럼 대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은 누구일까? 예쁜 사람들의 이름은 끊임없이 댈 수는 있지만 여전히 그 중에서 제일 예쁜 사람은 잘 모르겠다.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누가 정한 것인가? 역시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너가 제일 예뻐”는 거짓말이지만, 동시에 거짓말이 아니기도 하다. 수십억의 낯선 사람들 중에 ‘연애’라는 이름으로 나와 손을 잡고 마음을 나누는 단 한 사람, 어떤 모습이든 나의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같은 맥락으로, 내 눈에는 아스날이 제일 예쁘다. 패션의 완성이 얼굴이라면, 축구 선수의 완성은 아스날 유니폼 아니었던가. 물론 그 안에서도 정말 예쁜 사람은 늘 따로 있다. 맨 처음, 나를 아스날과 사랑에 빠지게 만든 티에리 앙리. 2007년에 그가 바르셀로나로 떠난 후, 내 마음의 빈 자리를 차지한 이는 ‘소년 가장’ 세스크 파브레가스. 2011년, 공교롭게도 세스크 역시 앙리처럼 바르셀로나로 가기 위해 아스날을 떠났다. 많은 애정을 쏟은 선수가 아스날을 떠나 다른 유니폼을 입은 모습은 그 자체 만으로 참 고통스럽다. 다들 나름의 이유는 있었지만, 결국 내 가슴에 남는 것은 공허함 뿐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선수들을 좋아하되 정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1년 뒤, 얼어붙은 내 마음을 녹이는 선수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산티 카솔라.

[출처: Arsenal Season Review 2012-13] 

2012년 여름, 아스날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는 팀의 주장인 로빈 반 페르시의 재계약 여부였다. 그의 계약 기간은 1년이 남아 있었고, 재계약을 하고 아스날에 더 오래 남을 것인가 아니면 재계약을 하지 않고 당장 혹은 1년 후에 팀을 떠날 것인가. 연일 누가 떠난다 안떠난다 하는 짜증나는 소식들만 들려오던 중, 답답함을 풀어줄 반가운 영입설이 불거졌다.

말라가의 구단주 셰익 압둘라 벤 나세르 알 타니는 클럽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팀의 핵심 선수들을 파는 것을 고려중. 론돈, 몬레알, 산티 카솔라가 그 명단에서 올라있음. 특히, 카솔라는 계속되는 임금 체불에 지쳤고 즉시 떠나고 싶어함. 토튼햄이 루카 모드리치의 대체자로 그를 원하며 논의가 잘 진행중. 카솔라는 아스날로부터도 이적 제의를 받음. (엘 컨피덴셜, 12.07.20)

산티 카솔라의 에이전트는 아스날과 이적을 놓고 대화중이며, 아직 구체적인 제의는 없었지만 이적료 €20m의 계약이 될 것. (아스, 1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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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발로 트래핑, 왼발로 볼 컨트롤, 오른발로 패스, 오른발로 트래핑, 왼발로 패스)
[출처: 스카이스포츠] 

산티아고 카솔라 곤잘레스(Santiago Cazorla Gonzalez). 1984년생 미드필더, 키 168cm, 국적 스페인. 여기까지 들으면 그저 ‘키 작은 선수구나’ 정도로 상상할 지 모른다. 좀더 그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팀 동료들마저 어느 발이 주발인지 모르는 완벽한 양발잡이, 양쪽 측면과 중앙 플레이메이커, 딥라잉 미드필더까지 소화할 수 있는 다재다능함, 환상적인 킥력과 빠르고 정확한 패스, 힘과 스피드는 부족하지만 테크닉과 순발력으로 이를 극복해내는 테크니션. 좀더 설명이 필요한가? 한 마디로, 스페인 라 리가 인간계 최고의 미드필더. (우스갯소리로 스페인 라 리가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두고 ‘신계’라고 부르고 나머지 팀들을 ‘인간계’라고 부른다.)

산티 카솔라는 지금까지 비야레알, 레크레아티보, 말라가를 거치면서 유명한 팀에 속해있지 않아서 사람들이 잘 모를 뿐, 전례없이 월드컵과 유로를 동시에 석권했던 역대급 스페인 국가대표팀의 주전 선수였다. 말 그대로 정말로 축구 잘하는 선수. 이런 그가 아스날로 온다니,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7월 23일, 기자회견이 열렸고 기자들은 아르센 벵거 감독에게 카솔라 루머에 대해 질문했다. 그리고 벵거는 능글맞게도 “난 그를 모른다!(I don't know this guy!)” 며 웃어보였다. 이 발언은 두고두고 회자되며 벵거의 뻔뻔함을 이야기할때 자주 인용된다. 나도 아는 카솔라를 벵거가 모를 리가 있나. 이런 어설픈 부정은 사람들의 기대감을 더욱 키우기만 했다.

[출처: 가디언] 

산티 카솔라는 이번 여름 말라가를 떠나 아스날로 이적하기 위한 개인 협상에 합의함. 아르센 벵거는 카솔라와 사인하고 싶어하고 €20m의 이적료에 계약이 성사되길 바라고 있음. 말라가의 첫 반응은 카솔라의 바이아웃 금액인 €45m을 요구했으나 재정적인 상황 때문에 우려가 높아지고 있음. 말라가가 7월 31일까지 채무를 청산하지 않으면, 팀이 2부 리그로 강등되고 UEFA 라이센스와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잃음. (가디언, 12.07.24)

말라가 입장에서는 참 쓰디쓴 상황이었다. 빚을 청산하기 위해 팀의 핵심 선수를 팔아야한다니. 중동 구단주를 뒀으면서 왜 빚을 지고 갚지 못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에게 중요한 것은 카솔라가 아스날로 올 가능성이 열렸다는 점. 그리고 가디언지의 내용에 따르면 아스날과 개인 협상도 완료되었다는 점. 말라가로서는 기한 내에 갚아야 할 돈이 있었으므로 일반적인 상황과 반대로 구매자인 아스날이 갑, 판매자인 말라가가 을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루하루, 시시각각 말라가와 카솔라의 거취를 둘러싼 인터뷰와 기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7월 24일, 말라가 관계자 “카솔라는 판매 불가이다. 우리는 기자 회견에서 루머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그의 이적 논의 자체가 우리의 계획에 없다.” (스카이스포츠)

7월 25일, 아르센 벵거 “우리는 카솔라와 사인하는데 가깝지 않다. 여전히 이 건을 진행중이다.” (AFP)

7월 26일, 마누엘 페예그리니(말라가 감독) “카솔라를 €20m에 파는 것은 거저 주는 것이다. 클럽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거나 그를 팔 의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스)

7월 27일, 산티 카솔라의 에이전트는 아스날 행을 마무리 짓기 위하여 어제 말라가 측과 대화를 나눔. (타임즈)

7월 28일, 아스날은 말라가의 산티 카솔라 영입을 위한 16m 파운드 비드를 함. 아르센 벵거는 작년 여름부터 카솔라를 지켜봐왔지만, 비싼 가격표에 좌절했었음. 벵거는 측면과 중앙에서 전천후로 뛸 수 있는 그의 가치를 알고 있음. 카솔라는 아스날과 개인 협상에서 합의한 상태이며, 말라가의 채무 상황으로 인해 이적이 가까워짐. (가디언)

7월 29일, 말라가가 매각되든 매각되지 않든 카솔라의 이적으로 얻게되는 돈으로 클럽은 당장 갚아야할 빚을 해결할 수 있음. 아스날과의 신속한 합의로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말라가는 강등을 면할 수 있음. 카솔라에 비드한 것은 아스날이 유일하며 그가 특별히 아스날을 선호하지는 않음. 오히려 친구인 실바가 있는 맨시티를 선호함. 몇 시간 내로 미래가 결정될 것. (말라가호이)

7월 30일, 산티 카솔라는 아스날로 이적할 것으로 보임. €20m의 딜이 오늘 안으로 마무리 될 것으로 예상됨. 말라가의 매각 여부에 관계없이 카솔라를 파는 것은 거의 확실함. (말라가호이)

7월 31일, 아스날과 말라가 사이의 논의는 몇 시간동안 진척이 있었으나 결론은 나지 않음. 말라가는 이적료에 추가 옵션을 붙이고 싶어하고, 아스날이 제의한 금액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함. 논의는 계속될 것이고 합의에 매우 가까움. 분명한 점은 카솔라는 확실히 떠남. (diariosur)

8월 1일, 카솔라의 이적은 결정되었고 그의 아스날 행은 막을 수 없는 것으로 보임. 두 클럽간의 논의는 이미 어느정도 합의 되었고 언제든 말라가가 계약을 승낙할 수 있음. 아스날은 선수와 에이전트 양쪽을 설득한 상태임. 이틀동안 클럽간의 두 번의 미팅은 카솔라의 이적을 마무리 짓기 위함이었음. 말라가는 다른 팀으로부터 더 좋은 오퍼를 기다리기 어렵고, 카솔라도 아스날 이외에 다른 곳으로의 이적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 (diariosur)

8월 2일, 산티 카솔라는 이번 주에 아스날에서 메디컬을 받을 예정. (BBC)

[출처: 트위터 @UnJequeEnSuVida] 

점점 달아오르는 마음에 기름을 붓는 공항 사진까지 떴다. 온다, 온다, 카솔라가 온다. 일반적으로 어느 선수든 이적설이 불거지면 자주 등장하는 것이 ‘공항 사진’이다. 누가 어느 공항에 나타났다며 이적설에 미끼를 던지지만 대부분 한참 과거의 사진이거나 흐릿하게 찍혀서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는 거짓 사진으로 사람들을 낚는다. 하지만, 카솔라의 공항 사진은 이미 ‘진리의 BBC’에서 카솔라의 아스날 메디컬 테스트를 보도한 이후라 사실로 보였다.

또한, 이번 카솔라의 이적 건에서 관심을 모은 부분은 이적료였다. 실제로 체결된 이적료는 처음에 보도되었던 €20m이 아니라 €15m(12m 파운드)이라는 것이었다. 말라가는 갑작스러운 상황으로 급하게 돈이 필요했고 이적료를 일시불로 받길 원했다. 이에 따라, 선수의 성과에 따라 이적료가 추가로 붙을 수는 있지만, 예상보다 낮은 이적료에 합의가 이뤄졌다. 이 가격이 얼마나 싼 가격이냐면, 카솔라 4명을 사고도 첼시가 페르난도 토레스를 산 가격(50m 파운드)보다 싸다. 공교롭게도 두 선수 모두 스페인 대표팀 출신. 물론, 나는 토레스 4명을 줘도 카솔라 1명과 바꾸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출처: 아스날 공식 홈페이지] 

그리하여, 산티 카솔라는 아스날의 유니폼을 입었다. 말라가의 돈이 말라가고 있던(?) 덕택에 최종적으로 헐값에 합의할 수 있었지만, 나름대로 쉽지만은 않았던 17일간의 줄다리기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이제 남은 의문은 그가 얼마나 잉글랜드에서 그리고 아스날에서 잘 적응하고 잘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스페인에서 뛰던 선수가 잉글랜드로 넘어오면 훨씬 빠른 템포와 피지컬적인 도전 때문에 으레 적응 기간을 필요로 했다. 당장 활약이 절실한 아스날로서는 카솔라의 적응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런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카솔라는 단숨에 팀의 에이스로 자리잡았다. 중앙에서 경기를 풀어주고 때로는 마무리지으며 세스크 이적 이후 팀에서 사라졌던 '플레이메이커'로 만점 활약을 해줬다. 그동안 카솔라 없이 어떻게 아스날이 돌아갔었는지 잘 상상이 안될 정도. 이후, 윌셔와 로시츠키가 중앙에 배치되면서 카솔라는 자연스럽게 측면으로 이동했지만 바뀐 포지션에 관계없이 중앙과 측면을 모두 오가며 미드필드를 조율했다. 그것은 이번 시즌에도 이어졌고, 오른쪽 측면에서 월콧이 침투한다면, 왼쪽 측면에서는 카솔라가 중앙을 오가며 균형을 잡아줬다.

잭 윌셔 : “그(카솔라)는 다른 수준의 선수로 함께 뛰는 것은 꿈같은 일이다. 그는 절대 볼을 빼앗기지 않는다. 한 번은 3명의 선수들이 볼을 뺏기 위해 그를 에워싼 적이 있는데 그는 드리블로 가볍게 빠져나왔다. 그의 기술을 좀 배우기 위해 그 장면을 다시 봐야할 것 같다. 세스크와는 다른 타입의 선수이다. 세스크는 좀더 패서이고, 산티는 볼을 잡고 상대를 제칠 수 있다. 또한, 좋은 슈팅도 지니고 있다.”

[출처: 아스날 플레이어] 

그러나 나에게 카솔라가 특별했던 것은 단지 축구 실력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다른 선수들과 다른 특별한 뭔가가 있었다. 조금 오글거리게 표현하자면, ‘꽃보다 아름다운 미소’라고 해야할까. 동네 아저씨같은 순박한(?) 얼굴에 늘 장난끼있는 웃음을 머금은 카솔라 특유의 표정이 참 좋았다. 그동안 아스날에는 여러 종류의 캐릭터들이 있었지만, 이런 순수한 느낌의 아저씨는 처음인 것 같다. 정말 축구가 좋아서 하는 사람의 향기가 난다랄까.

산티 카솔라 : “나는 웃는 것이 좋다. 경기장 안팎으로 나는 행복을 가져오려고 한다. 어떻게 즐거움 없이 축구를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당신은 비야레알의 호나우딩요였다는데? 그만큼 못 생기고, 웃기고, 축구를 잘해서) 그렇지 않다..... 모르겠다. 웃긴 것은 맞다. 나는 많이 웃는데 아마도 그래서 그렇게 말한 것 같다. 하지만, 그(호나우딩요)처럼 축구를 잘하지는 못한다.”

“(영어 실력이 늘었나?) 조금씩 늘고있다. 수업을 듣고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말할 때 실수를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보다는 낫다.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면 그저 ‘yes’라고만 대답하고 웃곤 했다. 가끔 모르는 것이 있어도 그냥 ‘yes’라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클럽 사람들이 내게 ‘산티, 나와 커피 마시기로 해놓고 어제 안나왔잖아. 어디 있었어?’ 라고 묻곤 했다. 덕분에 ‘sorry’라는 말을 배웠다!” “(페페 레이나가 당신을 Paquirrin(비만) 이라 부른다는데) 그건 예전 일이다. 이제는 Enano(난쟁이)라고 불린다. Paquirrin은 비야레알 시절이었다. 내가 잘할 때 관중들이 ‘Paquirrin!’이라고 외치곤 했다. 정말 재미있었다. 지금은 좀더 몸이 좋아졌다!”


[출처: 아스날 플레이어] 

축구계의 대표적인 스타 플레이어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떠올려보자. 온몸이 근육질이고 항상 운동으로 단련하며 최고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런 이미지가 나에게는 이상적인 축구 선수였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선수들이 좀더 강인해지고 상대와 싸워서 이길 준비가 되길 바랬는데, 카솔라의 등장은 나에게 일종의 문화 충격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약간 어수룩해 보이기도 하고, 어딘가 있을법한 성격 좋은 친구 같기도 하고. 그런데 피치 위에만 올라가면 누구보다 열심히 뛰고, 높은 수준의 플레이를 보여주는 반전의 매력. 이런 친근감 넘치는 축구 스타라니. 꽤 괜찮다.

호안 카프데빌라 : “그와 함께 뛰어봤던 사람이라면 잉글랜드의 모든 사람들이 그와 사랑에 빠질 것을 알고 있었다.”

카를로스 마르체나 : “그는 정말 훌륭한 팀 동료다. 드레싱 룸에서 그는 그 누구에게도 나쁜 말을 한 적이 없다. 대신에 항상 웃고있고, 누군가를 도울 준비가 되어있다.”

마르셀리노 가르시아 토랄 : “자신이 모든 능력들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부진하기 마련인데, 산티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솔직하고, 순수하며, 매우 성숙하고, 겸손했다. 그에게는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뭔가를 말하면 그는 전부 듣고 받아들인다. 그가 지닌 최고의 덕목은 축구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경기를 본다. 그는 스스로를 낮추고, 남들에게 귀 기울이는 동시에 승리하고 싶어한다.”

이번 <아스날과 연애중>을 쓰기 위해 카솔라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찾으면서 느낀 점이 있는데, 그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의 하는 말은 한결같이 카솔라를 향한 칭찬 릴레이였다는 것이다. 그의 축구선수로서의 능력에 대해,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성품에 대해 말이다. 그리고 아스날의 센터백 페어 메르테사커는 카솔라에 대한 평가를 한 줄로 정리했다. ‘완벽한 축구 선수’라고 말이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선수로 만드는 것일까? 내가 발견한 차이점은 축구에 대한 사랑이었다. 카솔라는 축구 그 자체를 정말 사랑하고 즐거워하며, 그 즐거움을 주변 사람들까지 물들게해서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카솔라는 경기에서 골을 넣고 팀 동료들과 얼싸안으며 즐거워할 뿐만이 아니라, 또 한 명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그 기쁨을 함께 나눈다.

[출처: 스카이스포츠] 

산티 카솔라 : “(팔목에 키스) 나는 항상 그 세레머니를 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 골을 아들에게 바치기 때문이다. 내 팔을 보면 타투가 있는데 그를 위한 것이다. 내가 세레머니를 하지 않으면 아들은 내게 화를 낸다. 행복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언제나 골을 그에게 바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므로, 내가 하는 모든 것에서 일부를 그에게 바친다.”

이런 카솔라를 보면서 나는 반성한다. 언젠가부터 승리와 패배로 나눠지는 승부에만 집착해서, 가장 근본적인 축구 자체가 전해주는 즐거움을 잊고 지내지는 않았나. 스스로 아스날과 ‘연애중’이라고 말하면서 어느새 사랑은 제쳐두고 사실상 당장의 성적에만 급급하지는 않았나. 요즘, 아스날의 분위기는 매우 뒤숭숭하다. 연이은 대패와 무승부로 우승권에서 멀어진지는 오래고, 어느새 4위 경쟁을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지난 주말, 에버튼에 또다시 대패를 당하면서 자력 4위는 불가능해졌고, 챔피언스 리그에 나가지 못할 상황에 처했으며, 아르센 벵거 감독과의 재계약에 반대하며 그가 감독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다. 팀이 앞으로 나아가기는 커녕, 수년째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고, 개선의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으니 나도 새 감독이 나타나야 할 시기라고 느낀다. 잘 나가던 과거를 언제까지 오늘의 변명으로 삼을 것인가.

축구에서 성적은 당연히 중요하다. 챔피언스 리그 진출로 얻게 되는 실리도 중요하고, 자존심도 중요하고,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는 순간의 상실감도 공감한다. 이런 날은 즐거울 수 없다. 그러나 오늘의 경기 결과에 거친 말을 뱉고, 감정을 토해내며, 아스날로 상한 감정을 적절하게 제어하지 못해 타인의 의견을 비방하고 비웃으면서 풀어내는 일들이 주변에 눈에 띄고 있다. 혹시 우리의 팬질이 결국 아스날을 향한 사랑에서부터 비롯되었음을 잊고 있지는 않았나. 아스날을 비판하는 것도 옳고, 아스날을 옹호하는 것도 옳다. 그러나 자신의 옳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타인의 감정을 경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당신이 옳으면 얼마나 옳은가? 남들보다 축구를 조금 오래봤다고, 조금 더 안다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과시하며 우월감을 표출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부디 부끄러움을 깨닫길 바란다. 주변 사람들이 당신을 꼴불견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사랑에는 위, 아래가 없다.

다시, 아스날이다. 벵거가 있든 없든,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든 못하든, 사랑하는 아스날은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러므로 나도, 당신도, 우리가 처음 아스날에 빠져들던 따끈따끈했던 그 마음을 잃지 않으면 좋겠다. 패배는 쓰라리다. 답답함에 화가 나고, 비판도 하고, 실망도 한다. 그러나 가장 밑에 깔려있는 사랑까지 놓치지는 말자.

[출처: 아스날 플레이어] 

아무리 달달한 연애도 항상 달콤하지만은 않다.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 세상에서 제일 예뻐보였던 그녀가,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갈등과 다툼을 반복하는 사이, 어느새 주변에 흔한 평범한 여자로 보이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우리는 이 연애에 대해 시시콜콜 따지기도 하고, 그만둬야 하나 고민도 한다. 물론, 정답은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랑이 있다면 분명히 그곳 어딘가에 즐거움이 있다. 그리고 웃을 수 있다. 나에게 이것을 알려준 사람이 산티 카솔라다.

그러므로 나도 그를 따라 조금 더 웃어보려고 한다. 지금의 안타까운 날들을 모두 뒤덮을 즐거운 날들이 곧 찾아올 것을 믿으면서. 혹시 모르는 일이다. 언젠가 찾아올 영광의 순간에 카솔라가 직접 골로써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지.

산티 카솔라 : “(왜 그렇게 많이 웃나요?) 왜냐하면 나는 늘 행복하니까요.”
교정 : @yesdomo




[관련 기사]

-웨일스에서 온 그대
-네 마리 토끼를 좇는 모험
-암탉이 라자냐에 빠진 날
-(말)싸움의 기술
-누구를 위하여 휘슬은 울리나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좋은 공놀이 있으면 소개시켜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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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고민이 생겼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지금 쓰고 있는 <아스날과 연애중>때문이다. 아론 람지를 주제로 한 ‘웨일스에서 온 그대’를 쓴 이후에 람지의 부상이 길어졌고, 프리미어 리그와 챔피언스 리그를 병행하는 이야기를 담은 ‘네 마리 토끼를 쫓는 모험’을 쓴 후 아스날이 챔피언스 리그에서 바로 탈락했으며, 아르센 벵거와 조세 무리뉴의 대결 구도를 다룬 ‘(말)싸움의 기술’을 쓰려고 마음 먹었더니 첼시에 대패를 당했다. 그리고 지난 주, ‘산티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를 쓴 직후, 산티 카솔라는 인터뷰를 통해 “우승을 하기 위해 아스날로 왔고, 앞으로도 계속 우승하지 못한다면 미래에 다른 곳으로 떠날 가능성을 열어두겠다”고 말했다. ‘아연’의 저주라고 불러야 하나. 그래서 저주를 한 템포 거르기 위해 이번 주만큼은 아스날의 향기를 싹 빼고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첼시, 맨시티, 리버풀을 찬양하는 이야기를 써야하나 살짝 고민했다.)

이번 시즌 중반까지는 가히 ‘아스날의 전성시대’라고 부를만 했다. 그동안의 부진을 떨쳐내고 아스날은 이번 시즌 드디어 우승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주제로 매주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몇 달여간 지속된 아스날의 1위 질주는 평론가들의 의견마저 하나둘씩 낙관적으로 바꿔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제나와 같은 부상 그리도 또 부상.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상자의 행렬과 겨울 이적시장 영입 실패는 여지없이 후반기 부진으로 이어졌고 평소처럼 4위 자리를 놓고 싸우는 처지가 되었다.

[출처: SBS Sports] 

이를 빗대어 아스날은 구너(아스날 팬을 가리키는 별명)라서 지하철 (9)호선이라는 패러디나 나오고 있고 꼴이 말이 아니다. 매년 똑같은 4위 타령인데 밑에 있다가 위로 올라와서 4위 싸움하는 것과 위에 있다가 아래로 떨어져서 4위 경쟁을 하는 것은 같은 4위 경쟁임에도 기분이 하늘과 땅 차이다. 중요한 경기에서의 대패, 쉬운 상대에게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최근 아스날은 즐거움은 커녕 스트레스 유발 요인에 더 가깝다. 그래서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는 <아스날과 연애중>이 아니라 <아스날과 별거중>. 심지어 며칠 전, 새벽 1시에 시작하는 아스날과 위건의 FA컵 준결승전을 보지 않고 그냥 잤다! 새벽 3시, 4시도 아닌 1시 경기를 쿨하게 넘기다니 나로서는 대단한 사건이다.

이렇게 요즘 잠시 아스날과 축구에 거리를 두고 있다보니, 다른 공놀이가 내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이름하여 야구. 최근에 깨달은 사실 중 하나는, 내 주변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좋아하는 야구팀이 꼭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도 야구를 알고 있고 TV에서 중계를 하면 앉아서 재미있게 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축구를 좋아하고 아스날이라는 ‘내 팀’이 있기에 크게 관심은 없었다. 하지만, 매주 이렇게 아스날은 스트레스만 주고 있으니 대체재로서 야구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피어났다. 때마침 야구 시즌도 개막했고 우리나라의 프로야구 팀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출처: KBO] 

넥센, 두산, 롯데, 삼성, 한화, KIA, LG, NC, SK. 그리고 새롭게 참가할 KT까지.

각 팀의 이름과 연고지는 들어서 대충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미지의 팀들을 쭉 늘어놓고 보니 어느 팀이 나와 연을 맺게 될까 괜히 설레는 기분. 그러나 정보가 전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지인에게 슬쩍 물어보기로 했다. “요즘, 야구에 조금 관심 있는데 추천해줄만한 팀이 있나요?” 그러자 의도치 않게도 내 가슴에 비수를 꽂는 대답이 돌아왔다. “너는 아스날 팬이니깐, 아스날처럼 유망주 많고 우승권 근처에 있지만 우승은 하지 못하는 팀은 두산”이라고 말이다. 이런... 너희도 그랬구나. 더 얘기를 들어보니 모구단이 돈을 잘 안쓰는 편이라 나가는 선수 안잡고 살 수 있는 매물이 있어도 안산단다. 판박이네. 처지가 비슷해서 정은 가지만 아스날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조금 덜어보자 대체재를 찾는 것인 만큼 비슷하게 나를 힘들게 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우승을 밥먹듯이 하는 팀’이 좋다고 말했고, 바로 추천받은 팀은 ‘삼성’. 때마침 지난 금토일 삼성과 SK의 3연전을 쭉 지켜봤는데 1승 2패로 기대했던 만큼의 포스는 없는 느낌. 3년 연속 통합 우승을 차지했다고 하는데 난 아직 잘 모르겠다.

오히려 내가 가장 인상을 받은 것은 삼성이 아니라 경기장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는 관중들이었다. (물론, 치어리더의 미모도 인상적이었다) 저 수많은 사람들은 야구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경기장까지 찾아온 것일까? 축구밖에 모르는 나에게 야구의 매력은 호기심을 품게 만들었다. 야구는 축구와 얼마나 어떻게 다른 공놀이인가?

[출처: XTM, 아스날 플레이어] 

먼저 눈에 띈 것은 축구는 11명, 야구는 9명이라는 인원수 차이인데 크게 신경쓸만한 차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각 팀의 선수들이 대결하는 방식이라고 해야겠다. 축구는 양 팀 11명, 총 22명이 필드 위에 제한없이 풀어져서 뛰는 반면, 야구는 기본적으로 투수와 타자의 1:1 대결이다. 그래서 야구의 방식은 축구의 승부차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앞서 나간 주자가 도루를 시도하면서 타자와 승부하는 투수를 흔들기도 하고, 타격이 이뤄진 후에는 나머지 선수들이 진루를 막기 위해 수비를 한다.)

이러한 대결 방식으로 인해 야구는 양 팀이 9번에 걸쳐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가며 승부를 가리지만, 축구는 전후반 90분간 한 필드 위에서 양팀의 공격과 수비가 자유롭게 교차되며, 때로는 강팀이 약팀을 상대로 일방적인 공격을 쏟아붓기도 한다. 내가 처음에 아스날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상대 골문을 향해 빠른 패스와 질주로 폭풍같이 몰아치는 공격이었는데(물론 지금은 이미 이런 모습이 사라졌지만) 아스날이 야구팀이었다면 그런 모습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야구에서 득점을 하기 위해 상대 골대에 골을 넣는 것이 아니라 선수가 직접 1, 2, 3루를 거쳐 다시 홈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움직일 수 있는 기회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출처: XTM] 

대신 야구는 축구보다 전략적이다. 물론, 축구에도 포메이션이 있고 전술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얼만큼 계획대로 실행에 옮기느냐는 필드 위 선수들의 역량에 따라 많이 좌지우지 된다. 시시각각 끊임없이 펼쳐지는 다양한 상황에 맞춰 선수들은 각자의 독립적인 판단으로 순간을 대처한다. 그러나 야구에서는 경기의 분절이 많은 만큼 그때그때 변수가 통제된 상황에서 감독은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거나 또는 시기 적절하게 선수를 투입한다.

선발 투수가 저조하면 계획보다 일찍 중간 계투를 내보내고, 홈런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한 방이 있는 대타를, 도루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발빠른 대주자를 투입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까닭에 야구에서는 특정 능력만을 갖춘 스페셜리스트가 존재할 수 있고 때에 따라 적재적소에 투입된다. 반면, 축구는 경기 중에 3명의 교체밖에 불가능한 만큼, 특정한 능력 하나만으로는 필드 위에 오르기 힘들다. 소위 '프리킥 스페셜리스트'라고 불리는 선수들조차도 프리킥 능력 하나만으로는 팀에 남아있기 어렵고 드리블, 패스, 터치와 같은 운동능력을 종합적으로 다 갖춰야만 한다.

[출처: SPOTV] 

이렇게 축구와 야구의 다름은 알아갈수록 참 흥미로웠다. 그렇다면 원점으로 돌아와서, 나에게 스트레스만 안겨주는 아스날을 대신해서 트로피를 들어올릴만한 야구 우승권 팀은 어떤 기준으로 골라내야 할까? 최근 몇 년간 팀의 순위를 보면 명백하게 삼성이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따져보고 야구에서의 승리 방정식을 찾아내려고 시도했다. 모든 스포츠가 그러하듯 모든 포지션에 가장 잘하는 선수들이 있다면 우승할 수 있겠지만, 그런 단순하고 비현실적인 발상 말고 현실적인 범위 내에서 말이다. 야구라는 공놀이는 어떻게 접근하여야만 효율적으로 가장 우승에 근접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나는 두 가지 이론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첫 번째는 야구 특유의 대결 방식으로 미루어 투수력이다. 일반적으로 타자는 한 경기에 서너번 정도 투수와 상대하지만, 선발 투수는 제 몫을 해준다는 가정하에 한 경기에 적어도 열댓명의 타자를 상대하는 점을 주목했다. 물론, 선발 투수는 타자처럼 매일 경기에 출장할 수 없기에 등판일 간격으로 나눠보면 비슷하다는 계산도 할 수 있으나, 아무리 좋은 타자라도 홈런을 치지 못한다면 진루하더라도 후속 타선에서 안타가 나오지 않는 이상 점수를 낼 수 없다. 좀더 원초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사각형의 스트라이크 존 공간 어느 한 곳에 투수가 던진 공이 꽂히고, 공이 그리는 마지막 위치와 타이밍을 정확히 포착하여 타자가 방망이를 휘둘러 타격을 할 확률은 타격하지 못할 확률보다 물리적으로 훨씬 낮다.

[출처: XTM] 

그러므로 똑같은 수준의 좋은 투수와 좋은 타자의 싸움은 기본적으로 좋은 투수가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선발 투수의 뒤를 이어 훨씬 적은 수의 이닝을 소화하면서 전력으로 투구하는 중간 계투와 마무리 투수가 갖춰진다면 적어도 ‘지지 않는’ 방정식이 완성되는 것이다.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닐테니까. (강타자를 모아서 공격력을 극대화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타자는 타격만 하는 것이 아니므로 수비력, 작전 수행능력 등을 고려해야 한다.) 가장 투수력이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삼성, 이들이 최근 몇 년간 꾸준하게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의 시각으로는 삼성이 승리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이고 정확한 접근을 하고 있다고 본다.

[출처: GM] 

두 번째는 아마도 야구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스포츠팀에 해당되는 이야기일텐데 ‘유망주들의 동시다발적인 폭발’. 말은 쉽지만 정말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좀더 설명을 하자면, 모든 포지션에 A급 선수들을 채우면 당연히 강한 팀이 되고 우승에도 가까워진다. 그러나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선수들을 영입하기 위해서는 합당한 연봉을 책정하기 위해 고액을 지불해야하고, 다른 팀들과의 영입 경쟁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정점을 찍은 선수는 대체로 나이가 꽤 있는 편이라 앞으로 기량이 향상되기보다는 하락할 가능성이 많다.

장시간동안 리그에서 군림하는 팀을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유망주들이다. 이들은 어리고 가능성있는 선수들로 자체적으로 길러내거나 영입하더라도 아직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싸지 않은 장점이 있다. 그리고 나중에 이들이 성장해서 자신의 잠재력을 터뜨리고 스타 플레이어가 된다면, 한 명이 아니라 다수의 유망주들이 다수의 스타 플레이어로 성장한다면, 그 팀은 어느 순간 놀라운 팀이 되어있을 것이다. ‘역사에 남을 강팀’으로서 말이다. 여기서 문제는 대다수 유망주들의 경우 우리의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하고 그저 그런 선수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유망주를 로또라고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다.

[출처: Arsenal Season Review 2008-09] 

애써 모은 유망주들이 동시다발적인 ‘폭발’이 아니라 ‘폭망’을 하면 팀은 오히려 암흑기를 보내기도 하는데 아스날이 매우 좋은 예이다. 참고로, ‘DDS(데닐손, 디아비, 쏭)’라는 단어는 그렇게 아스날의 암울했던 시대를 풍미한 고유대명사가 되었다. 반대로, 정말로 유망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한다면 긱스, 스콜스, 베컴, 네빌 형제로 대변되는 2000년대 초반의 맨유 혹은 메시, 피케, 이니에스타, 페드로, 부스케츠 등이 중심이 되어 6관왕을 이룬 바르셀로나처럼 일류의 강팀이 형성된다. 우리나라 야구팀중에 다수의 유망주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앞으로의 가능성을 꿈꾸는 팀이라면 아무래도 '화수분 야구'라고 불리는 두산이 아닐까. 안좋은 쪽으로도 아스날과 많이 닮았다는 점은 약간 우려스럽지만 말이다.

이렇게 걸러낸 삼성과 두산. 공교롭게도 이 두 팀이 작년 한국시리즈 상대팀이었던 점은 흥미롭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뿐 현재는 모르는 일이다. 삼성은 최고의 마무리 투수였던 오승환을 잃고 얼마나 투수력이 유지되었나, 두산 역시 FA로 잃은 선수들의 공백을 어떤 새로운 선수가 등장해서 활약을 이어갈 것인가. 여러 미지의 변수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질문. 과연 나는 아스날이 아닌, 축구도 아닌, 야구와 새롭게 관계를 쌓아나갈 수 있을까. 축구에서 느껴지는 역동성은 없는 대신 야구에는 투수가 던지는 공 한 구, 한 구의 섬세한 컨트롤이 있다. 큰 점수 차이가 벌어져있어도 한 이닝에 많은 점수가 나서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의외성까지. 거기다가 축구처럼 주말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중 3연전, 주말 3연전, 쉼없이 경기가 펼쳐지다보니 일주일 내내 지루할 새가 거의 없다. 물론, 응원하는 팀이 헤맨다면 괴로운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출처: 아스날 플레이어] 

야구라는 새로운 공놀이와 연애 가능성을 탐구해본 결과, 확실히 축구와는 다른 공놀이였다. 만약 축구와 비슷했다면 그냥 축구를 봤을테니 오히려 달라서 다행이다. 아스날이 잘했다면 이런 고민도, 다른 곳에 눈을 돌릴 필요도 없었을텐데... 전부 이번 시즌 후반기에 9호선 포스를 뽐낸 덕택이다. 사실은 이와 비슷하게 아스날이 아닌 다른 팀으로 눈을 돌리려고 한 적이 난 이미 한 번 있었다.

2011-12 시즌, 맨유에게 당한 8-2 대패, ‘가르마 참사’라고 불린 경기였는데, 정말 더이상 축구볼 맛이 안나서 독일 분데스리가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 마음을 붙여보려고 했다. 도르트문트는 위르겐 클롭이라는 호탕한 젊은 감독과 독일의 메시라고 불리던 마리오 괴체를 필두로 바이에른 뮌헨의 아성에 도전해 우승까지 차지한 멋진 팀이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나에게 아스날은 될 수 없었다. 야구는 아예 다른 스포츠 종목이니까 조금은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출처: 아스날 플레이어] 

이런 흔들리는 내 마음을 헤아린건지, 아스날은 지난 주말 위건과의 FA컵 준결승에서 120분 연장전과 승부차기 혈투 끝에 극적으로 승리하며 고대하던 트로피까지 딱 한 걸음을 남겨두게 되었다. 장장 9년만에 우리는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을 것인가. 아직 리그에서는 5위를 헤매며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에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불확실하지만, 그래도 어젯밤은 웨스트햄을 상대로 3:1 역전승을 거두며 희망의 불씨를 피우기 시작했다. 아스날에서 만족스럽지 않다던 인터뷰로 구설수에 오른 카솔라와 포돌스키까지 만점 활약을 했고, 부상자들도 속속 복귀하는 중이다. 조금은 위태로운 이번 시즌, 남은 기간동안 유종의 미를 잘 거둘 수 있을까.

좋아하는 팀을 그저 즐겁게 응원할 수 있으면 참 좋을텐데, 아스날은 원치 않는 스트레스와 답답함, 좌절감, 자격지심까지 내게 선물한다. 이런 팀을 뭐가 좋다고 매주 지켜보며 일희일비 하는건지. 오래된 부부가 “정때문에 산다”고 말하는 경우를 가끔 볼 수 있는데, 단지 오래 봤다고 해서 정때문에 아스날을 좋아하고 싶지는 않다. 아스날과 나의 연애는 늘 새롭고 반짝거리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반짝거리는 트로피도 필수다. 우승에 대한 목마름으로 야구에 한 눈 팔고 싶어지기도 하는 요즘이지만, 결국 내 마음의 갈증을 가장 시원하게 풀어줄 수 있는 것은 아스날의 우승 트로피가 아닐까. 오랜 인고의 시간을 참아온 아스날 팬들을 위해서라도 값진 FA컵 트로피와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 획득이라는 마지막 자존심만은 지켜주길. 그리하여 다가오는 새 시즌을 위한 단단한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 시즌 종료까지 얼마 안남은 이 시점에서 또 미끌미끌하다가 결국 5위가 되어버리면, 나 정말로 야구와 눈 맞아버릴지도 모르니까.
교정 : @yesd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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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아아,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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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등학교 때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내가 매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시의 나는 공부에 열중하느라, 즉, 공부와 연애하느라 여자 친구를 사귈 시간이 없었다. 물론, 이런 내 주장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과생임에도 불구하고 나와 가장 친밀했던 아이는 언어 영역이었다. 그렇다고 책을 많이 읽는 편도 아니었고 그저 언어 영역 문제들을 매일 신나게 풀 뿐이었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집중적인 독서를 했던 때가 바로 이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때 밤을 새며 읽어내려갔던 수많은 문학 작품 중에 만해 한용운님의 시 한 편이 떠오르는 오늘이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

[출처: KBS]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출발해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해상에서 침몰했다. 탑승객 476명중 174명밖에 구조되지 못했고, 나머지 300여명은 실종 혹은 사망. 더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그 안에 수학여행을 온 단원 고등학교 학생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사고가 났을 때 누구보다 승객들을 챙겨야했을 선장은 가장 먼저 배에서 나와 구조되었고, 대피 방송은 커녕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으로 인해 탑승객의 대부분은 탈출 시도도 하지 않은채 꼼짝없이 배와 함께 가라앉아 버렸다.

매일 아침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구조된 사람의 숫자를 확인했지만 늘어나는 것은 원치 않은 사망자의 수뿐이었다. 희박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생존자라도 구하고자 찬 바다로 뛰어드는 민관경 잠수사들의 노력이 부디 결실을 맺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 아마도 국민 모두의 바람이 아닐까. 어딘가에선 침몰한 배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이 있고, 그 가족은 슬픔에 오열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아스날이 오랜만에 시원한 3-0 승리를 한 주말마저도 그저 침통한 심정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평상시처럼 축구 얘기를 꺼내기란 참 어려웠다. 그저 공놀이로만 보이는 축구에서도 수많은 사상자를 낸 커다란 사건사고들이 있었고, 오늘은 그 중 하나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출처: BBC 파노라마 힐스보로] 

96명이 목숨을 잃고 766명이 부상을 당하면서 잉글랜드 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사고로 기록된 ‘힐스보로 참사

참사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사고가 있기 몇 개월 전, 셰필드의 한 젊은 경찰관이 복면을 쓴 무장 강도들에게 머리에 총구가 향해진 채로 바지가 벗겨져서 사진을 찍히는 일이 있었다. 이 일은 동료 경찰관의 장난으로 드러났지만 해당 경찰관은 큰 수치심을 느꼈고 이에 불평을 제기하면서 공식적인 조사가 이뤄졌다. 결과적으로 4명이 해고되었고, 2명이 좌천되었으며, 2명은 벌금이 부과되었다. 총경이었던 브라이언 몰은 이 일에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책임을 지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게 되었고, 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새 총경은 축구 경기장에서 관중 통제를 해본 경험이 전혀 없는 데이비드 더큰필드였다.

[출처: 30 for 30 Soccer Stories] 

1989년 4월 15일,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준결승전이 셰필드 웬즈데이의 홈구장인 힐스보로에서 열렸다. 당시의 경기장은 입석이 많았고, 내부에는 팬들의 충돌을 막기 위해 철제 구조물로 구역을 분리하고 있었다. 경기 당일, 수많은 리버풀 팬들은 자신들의 구역인 ‘레핑스 레인’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오직 작은 회전문을 통해 경기장 안으로 입장할 수 있었기에 입장 속도는 매우 더뎠다. 킥오프 시간이 임박했지만 경기장 밖에서 미처 들어오지 못한 팬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제 시간 내에 입장이 완료되지 않으면 킥오프도 지연되는 탓에, 어쩔 수 없이 경찰은 인파 해소를 위해 일반적으로 경기가 끝난 후 관중의 퇴장을 위해 열던 게이트 C를 열었다.

[출처: BBC] 

문제는 이미 경기장 안쪽 중앙 구역은 수용인원을 꽉 채운 상태였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을 측면으로 입장시켜야 했지만 새로 부임한 데이비드 더큰필드로부터 그런 지시는 전혀 내려오지 않았다. 앞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활짝 열린 게이트를 지나 피치를 향해 물밀듯이 전진했고, 중앙 구역의 수용인원은 기준치의 두 배를 넘어섰다. 끝없이 사람들의 압력은 더해지기만 했고 일부는 담장을 넘어 옆 구역으로 넘어갔지만, 앞쪽에 먼저 들어와있던 사람들은 철책과 인파 사이에서 무참히 짓눌릴 뿐이었다.

[출처: 30 for 30 Soccer Stories]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경찰은 킥오프 6분만에 경기를 중지시켰다. 힘겹게 열린 철책의 작은 문으로 사람들은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고, 압력에 질식한 사람들을 업고 나와 피치 위에서 심폐소생술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찰들은 리버풀 팬과 노팅엄 포레스트 팬의 혹시 모를 충돌을 막는다는 이유로 그저 일렬로 늘어서있을 뿐이었다. 이 사고로 당일에 93명이 사망했고, 2명이 병원에서 며칠간의 사투끝에 숨을 거두었으며, 1명은 4년간 혼수 상태로 있다가 결국 생명 유지장치를 떼면서, 총 96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출처: 30 for 30 Soccer Stories] 

리버풀팬들은 현재까지도 잉글랜드의 일간지 ‘더 선’과 유난히 사이가 나쁜데 그 계기도 힐스보로 참사였다. 이 사고가 있은 후 며칠 뒤, ‘더 선’은 ‘진실(The Truth)’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를 내보냈다. 내용인즉슨, 술에 취한 수백명의 리버풀팬들이 티켓없이 경기장에 매우 늦게 도착해서는, 닫혀있던 게이트를 강제로 열고 들어와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부상자들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던 경찰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고, 소변을 갈겼으며, 쓰러진 사망자들의 주머니를 털고 있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리하여 사건의 희생자들은 가해자가 존재하지 않는 사고사처리 되었고, 힐스보로의 통제를 책임지고 있던 데이비드 더큰필드 총경에게 책임을 묻는 기소조차 증거부족으로 기각되었다.


(관계자들의 진술서들을 비롯하여 힐스보로 보고서의 모든 내용은 온라인으로 자유롭게 열어볼 수 있다.)
[출처: 30 for 30 Soccer Stories, 힐스보로 보고서

그리고 23년이 지난 후, 잃어버린 명예와 정의를 되찾기 위해 유가족들의 요청으로 구성된 ‘힐스브로 독립 패널’은 힐스보로 참사 피해자들의 무고함을 증명할 새로운 증거들을 찾아냈다. 이들이 발표한 45만 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에는 사고 상황을 목격했던 경찰들의 증언 164개가 임의로 수정된 부분과 당시 적절한 치료를 받았다면 40여명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정황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2012년 9월, 데이비드 캐머론 잉글랜드 총리는 유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한다.
“그 날 일어난 일은 잘못되었다. 정부를 대표하여, 국가를 대표하여, 이러한 이중 불의(double injustice)가 바로잡아지지 않은채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흐른 것에 깊이 사과한다.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머지사이드의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끔찍하게 목숨을 잃은 대가는 오히려 그들을 사고의 주범으로 몰아세운 것이었다. 많은 나라에서 훌리건에 대해 명확하지 않게 바라보고 있음에도, 이 날의 보고서는 흑백 논리로 씌여졌다. 리버풀 팬들은 참사의 원인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의 가슴에 상처를 낸 힐스보로 참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잉글랜드 축구계를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4년부터 프리미어 리그에서 입석은 사라졌고, 음주는 금지되었으며, 이에 맞게 경기장들은 보수되거나 새로이 지어졌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수준 높은 프리미어 리그를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는 축구 문화가 형성 된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누군가의 슬픔과 눈물이 없었다면 더 좋았으련만...

[출처: 30 for 30 Soccer Stories] 

2014년 4월 13일, 리버풀의 홈구장인 안필드에서 리버풀과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가 펼쳐졌다. 이 날은 힐스보로 참사 25주년을 기념하여 96명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96개의 관중석을 비워놓기도 했다. 이 마음을 하늘에서 듣기라도 한 것일까. 리버풀은 3-2의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1990년 이래로 첫 프리미어 리그 우승에 한 발 더 다가갔다. 아직 시즌은 끝나지 않았고 우승의 향방은 알 수 없지만, 리버풀이 정말로 이번 시즌에 우승을 차지한다면 그들에게 참 뜻깊은 일이 될 것 같다. 아스날팬인 나로서는 여전히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지만 말이다.

어느새 세월호가 침몰한 지도 일주일이다. 애타게 기다리는 생존자는 나오지 않고 있고, 연일 뉴스에서는 세월호를 둘러싼 각종 의혹과 불편한 소식들만 이어지고 있다. 커다란 참사에서 책임 규명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이런 혼란을 자신의 기회로 삼는 이들을 제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다. 그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고 상실감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피해자 가족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은 어디있는가? 이들에게는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내가 언어 영역과 연애하던 시절, 그 시절을 보내고 있던 학생들이 아직까지 물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즐거운 추억으로 가득해야할 수학여행이 끔찍한 비극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너무 늦어버린 구조 활동으로 생존자를 기대하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작은 희망을 놓을 수 없다. SNS에 ‘노란 리본’ 캠페인이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보면 나와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아직 이 세상에는 많은 것 같다. 유명 연예인들과 스포츠 선수들도 선뜻 기부에 나서며 한 마음으로 세월호로부터 좋은 소식이 들려오길 기다리고 있다. 아스날의 센터백인 페어 메르테사커도 트위터를 통해 직접 한글로 '기적을 빕니다' 라고 남기며 뜻을 같이했다. 기적이라는 것이 정말 있다고 믿고 싶다.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까 부디 살아 돌아오기를.

[출처: 페어 메르테사커 트위터] 

마지막으로, 세월호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모든 이들을 위해 앞에서 읊조리던 ‘님의 침묵’ 뒷부분을 바치고 싶다.

.....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교정 : @yesd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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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공간을 지배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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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열렬한 사랑을 독차지하는 스포츠가 등장했다. 축구? 야구? 농구? 모두 아니다. 그 주인공은 훗날 ‘e스포츠’라고 불리게 된 ‘스타크래프트’였다. 물론, 게임 자체의 재미도 있었지만, ‘스타 리그’의 탄생은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을 세상에 알렸고, 이들의 플레이는 TV의 전파를 타며 스타크래프트는 전국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두 명의 불세출의 게이머를 만나게 된다.

[출처: 온게임넷] 

‘테란의 황제’ 임요환과 ‘폭풍 저그’ 홍진호. 경이로운 컨트롤과 상대의 허를 찌르는 임요환의 플레이, 별명대로 폭풍처럼 끊임없이 몰아치는 홍진호의 플레이는 우리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 둘이 서로를 상대하는 날은 '임진록'이라 불리우며, 수없이 많은 명경기를 낳았다. 임요환 못지 않은 실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홍진호는 그의 그림자에 가려 단 한 번도 우승해보지 못하고 영원히 2인자에 머문 것도 나름 드라마라면 드라마랄까. 이 두 사람의 플레이를 보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일꾼을 뽑아 자원을 캐고 병력을 생산하여 상대방을 공격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어떻게 해야 상대보다 더 빠르게 많은 병력을 모으고, 효율적으로 공격하며,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 수 있을 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게임은 어느새 단순한 마우스 클릭이 아니라 ‘전략’의 승부가 된다.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전략’을 수립하는 것은 어느 분야에서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물며 축구도 마찬가지. 축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 바로, 골이다. 정확하게는 상대팀보다 많은 골을 넣고 적은 골을 먹히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피치 위에 11명의 선수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치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효과적인 공격과 수비를 할 지는 팀의 최우선 과제가 된다. 이것이 축구 전술과 포메이션의 시작이다. 140여년의 축구 역사가 이어져오는 동안 W-M 포메이션, 4-2-4/카테나치오, 네덜란드의 토탈 풋볼 등 여러 전술들이 각각 한 시대를 풍미한 후 다른 전술로 대체되었다. 이 긴 역사를 일일히 나열하기에는 여백이 충분하지 않아 옮기지는 않는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처럼) 다만, 이번 주에는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관심 가질법한 ‘현대 축구 전술의 기초’를 맛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하자.

[출처: SBS] 

수많은 축구 전술들이 있지만 그 지향점은 하나로 압축된다. ‘공간’. 100년이 넘는 전술의 역사라는 것도 결국 골을 넣기 위해 효율적으로 공간을 장악하려는 시도였고, 이후 등장하는 다음 전술은 이전의 시도에서 노출된 공간을 방어하고 대신 새로운 방식으로 상대의 공간을 장악하려는 도전이다. 물리적으로 설명하자면, 피치 위에서 어느 한 쪽의 공간이 사라지면 다른 쪽에 새로운 공간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11명이 모든 공간을 커버하기에 축구 경기장은 너무 넓기 때문이다. 즉, 축구 전술의 변천사는 공간을 지배하기 위한 끝없는 진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재미있는 점은 몇 가지 전술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주기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해왔다.) 그리고 축구에서 공간의 지배에 관한 대표적인 두 가지의 철학이 있다. 아리고 사키의 압박(Pressing)과 요한 크루이프의 소유(Possession)이다.

[출처: Sky Sports] 

1970년대에 전원 공격, 전원 수비로 대변되는 네덜란드의 ‘토탈 풋볼’이 등장하여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감독으로 있던 아리고 사키에게도 큰 감명을 주게 된다. 상대가 공을 잡으면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압박하는 ‘토탈 풋볼’은 사키가 원했던 공격 축구와도 일맥 상통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전원이 공격과 수비에 모두 가담하는지라 체력적인 소모가 많았고, 자칫 팀의 밸런스가 무너지기도 쉬웠다. 그래서 빠르고 효율적으로 압박하되 동시에 팀의 밸런스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그가 생각해낸 것은, 선수들을 피치 위에 고르게 분포시키고 각자에게 책임 구역을 할당하여 그 공간을 지배하도록 한 것이었다. 촘촘하게 선수들을 배치한 후 앞으로 전진시켜 수비라인을 형성함으로써, 상대의 공간을 줄이고 빠르고 강하게 압박하여 볼을 뺏어내는 것. 이러한 철학이 그대로 녹아들어있는 4-4-2 포메이션은 현대 축구 전술의 바탕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사키의 개념은 수많은 감독들에게 계승되고 발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현대 축구에서 아리고 사키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인물은 요한 크루이프이다. 그는 아리고 사키가 감명을 받았던 ‘토탈 풋볼’을 선수로서 직접 뛰었던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철학도 ‘토탈 풋볼’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지만, 사키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크루이프의 한 마디 말은 자신의 철학을 간결하게 설명해준다. “볼을 소유하고 있다면, 수비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볼은 딱 하나이기 때문이다.”상대에게 볼을 뺏으러 가기보다는 애초에 뺏기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상대의 압박 속도보다 빠르게 짧은 패스를 주고 받는다면, 압박에서 벗어나 볼을 소유를 유지할 수 있고, 이는 상대에게 공격당하지 않고 오직 공격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 기본이 되는 짧은 패스를 물흐르듯 주고 받기 위해 선수들의 삼각형 형태의 위치를 유지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했다. 계속 삼각형을 유지하며 움직이고 패스를 주고받으며 점유율을 높이는 것. 이것은 현대 바르셀로나의 철학 그 자체가 되었다.

이후의 축구 감독들은 이 두 사람의 철학을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각색하여 각자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물론, 감독의 스타일에 따라 똑같은 구성의 포메이션도 완전히 다른 색채를 띌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일반적으로 축구 전술을 이야기하면 선수들의 배치를 의미하는 숫자의 나열을 떠올리곤 하는데, 사실은 숫자는 그저 숫자일 뿐이다. 밑바탕이 되는 기본적인 형태일 뿐, 이 팀이 공격적인지 혹은 수비적인지, 실제로 각각의 포지션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강점과 약점이 어디인지 무엇도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주요 포메이션들의 기본 형태를 이해함으로써 본래 지니고 있는 강점과 약점을 감독들이 어떻게 보완하고 극대화하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 골키퍼를 제외하고 10명의 선수를 배치하는 방식에 따라 수많은 포메이션이 만들어질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현대 축구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세 가지 포메이션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자.



아르센 벵거 “4-4-2 포메이션은 축구 피치의 크기에 가장 딱 적합한 포메이션이다. 그 이유는 2명의 중앙 수비수, 2명의 중앙 미드필더, 2명의 스트라이커가 자연스럽게 피치의 60%를 커버한다. 그리고 양쪽 측면의 2명의 선수는 각각 40%의 피치를 커버한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수학적으로 축구 피치를 지배하는데 최고의 포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lineupbuilder] 

4명의 수비수, 4명의 미드필더, 2명의 공격수로 이루어진 4-4-2포메이션은, 피치 위에 고르게 선수들을 분포하여 책임 공간을 나눈 형태였기에 아리고 사키는 4-4-2를 두고 ‘가장 이상적인 공간 장악이 가능한 포메이션’이라고도 표현했다. 공격수부터 수비수의 사이의 간격을 25m로 유지한 상태에서 수비라인을 위로 끌어올려 뒷공간은 오프사이드 트랩으로 잡아내고, 상대방의 유효 공간을 좁혀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압박할 수 있었다. 팀 전체가 하나의 유닛으로서 움직이며 빠르게 압박해서 볼을 되찾으면 바로 역습으로 이어진다. 팀이 공을 얼마나 오래 소유하고 있는 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한 명이 앞으로 전진하면 나머지 셋이 빈 공간을 향해 함께 전진하고 커버하며 끊임없이 간격을 유지하는 능동적인 공간 압박이 사키의 4-4-2 였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2명의 중앙 미드필더는 수비시에 후방의 수비 라인을 보호하고, 공격시에 공격수들에게 볼을 배급하며 간격을 유지할 수 있는 공수 만능형의 BTB(박스-투-박스) 미드필더가 포진되어야 했고, 측면에는 직선적인 타입의 클래식 스타일 윙어가 위치하여 공격시에는 앞으로 전진해 중앙의 스트라이커들에게 집중된 수비를 분산시켜야 했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4-4-2의 경우이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스날식 패스 & 무브)

아주 가까운 예로, 아르센 벵거가 구사하는 아스날의 4-4-2는 일반적인 4-4-2와 달랐다. 일자의 미드필드 구성에 따른 단조로운 빌드업과 측면 돌파에 의존하는 공격 방식을 ‘패스 앤 무브’로 해소한 것이었다. 앞서 요한 크루이프는 짧은 패스를 연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해 가장 중요시한 것이 삼각형이라고 했는데 4-4-2는 선수들이 일렬로 나열된 형태라 삼각형이 나오기 어렵다. 아르센 벵거가 이를 풀어낸 방식은 다음과 같다. 선수 A가 옆에 있는 선수 B에게 패스한 후 앞으로 전진하고, 선수 B는 볼을 받아 앞으로 전진한 선수 A에게 패스하면서 자신도 전진. 이런 방식으로 임의로 삼각형 형태를 만들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즉, ‘패스를 한 후에 리턴 패스를 받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패스 앤 무브’의 핵심이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기존 4-4-2 포지션과는 다른 능력을 지닌 선수들을 필요로 했다. 공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했고, 패스의 질도 좋아야 했으며, 이는 측면에 위치한 선수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2007-08 시즌, 아스날의 양 측면에 로시츠키, 흘렙과 같은 중앙 지향적인 공격형 미드필더들이 배치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출처: lineupbuilder] 

2005년, 4-4-2 포메이션이 주류를 이루던 축구계의 패러다임에 큰 변화가 생기는 일이 발생한다. 바로, 오프사이드 룰의 완화였다. 작은 변화였지만 그 여파는 컸다. 기본적으로 높은 수비라인을 형성하던 기존의 4-4-2 포메이션은 뒷공간에 대한 부담으로 공수의 간격이 벌어지게 되었고 자연스레 개개인이 커버해야하는 공간도 늘어났다. 이는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의 3선 사이사이의 빈공간이 넓어지고 상대팀이 파고들기가 더욱 쉬워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기존의 3선에서 4선 형태로의 포메이션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또한, 기존 전술은 압박을 기초로 하고 있었기에 선수들의 볼 경합이 잦았고 피지컬이 중요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오프사이드 룰 개정 이후, 공간이 늘어나면서 선수간의 경합이 줄어들고 메시, 사비, 이니에스타와 같이 작고 테크닉이 뛰어난 선수들이 만개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흐름에 맞게 기존 4-4-2의 약점을 보완하여 나타난 것이 4-2-3-1포메이션이었다. 스페인에서는 2000년대부터 이미 많은 팀들이 사용하고 있었고, 특히 2010 월드컵을 기점으로 현대 축구팀의 전술적 주류가 4-4-2에서 4-2-3-1로 완전히 넘어갔다. (포메이션 상으로 큰 변화같지만 사실상 4-4-2의 투톱 중 한 명이 아래로 내려와서 세컨탑/플레이메이커가 되고 양 윙어가 앞으로 전진하면 4-2-3-1이 된다.)

4-2-3-1 포메이션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4-4-2 포메이션의 중앙에서 공격과 수비를 함께 도맡았던 BTB 미드필더가 사라지고 1명의 공격형 미드필더와 2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역할이 분담된 것이다. 특히 수비형 미드필더들은 미드필더와 포백 사이의 공간에 위치하면서 상대팀의 세컨탑/공격형 미드필더의 공격을 무마시켰다. 여기서도 한 단계 더 분화하여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한 명은 오직 수비만을 전담하는 ‘마케렐레 롤’을 소화하고, 다른 한 명은 사비 알론소와 같이 후방 플레이메이커로서 팀에 패스를 배급하는 역할을 했다. 이렇게 피치의 중앙은 두터워지면서 안정되었지만, 그것은 그만큼 측면에 공간이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4-2-3-1은 4-4-2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상대 풀백의 전진을 측면 미드필더를 전면 배치함으로써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우리팀 풀백과의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고 그 공간을 메꾸기 위해 풀백의 전진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정리하자면, 4-2-3-1 포메이션이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 상대 풀백과 경합하는 측면 미드필더의 수비력과 빈 공간으로 전진하는 풀백의 공격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출처: lineupbuilder] 

마지막으로 둘러볼 전술은 4-3-3포메이션이다. 언뜻 중앙의 3명의 미드필더가 정삼각형 형태가 아닌 역삼각형의 형태로 배치된 것을 제외하면 4-2-3-1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4-3-3 포메이션의 원형은 1960~70년대 4명의 공격수를 활용했던 4-2-4 포메이션에서 유래된 것으로 4-2-3-1과는 진화 과정이 다르다. 그러므로 4-3-3 포메이션 양측면의 윙포워드는 순수한 포워드에 가까운 선수들이 배치되었고, 윙어 타입의 선수와 섞여서 비대칭적인 형태를 하고 있었다.

현대에 들어 4-4-2가 기본 포메이션으로 자리 잡았고, 4-3-3은 3명의 공격수가 전진해있었기에 수비시에 미드필드에서의 수적 열세로 인해 잘 쓰이지 않았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최전방 공격수들의 적극적인 압박이 수반되어 상대가 공격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해야했다. 포메이션의 구성상 삼각형의 형태가 쉽게 만들어지는 덕택에 패스 플레이를 하기에도 좋고 역으로 공격시에는 수적 우위를 점할 수도 있었지만, 구현하기가 어려운 전술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조세 무리뉴와 펩 과르디올라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단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극대화하여 새로운 4-3-3으로 재탄생되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각자 다른 포메이션을 진화시킨 형태가 둘다 4-3-3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옳다. 무리뉴는 4-4-2 다이아몬드 / 4-3-1-2의 포메이션을 4-3-3으로 발전시켰고, 과르디올라는 4-2-3-1에서 측면 미드필더를 앞으로 더 전진시키고 플레이메이커를 밑으로 내려서 4-3-3을 형성했다.)


(4-3-3 vs 4-4-2)
[출처: lineupbuilder] 

조세 무리뉴“나에게 클로드 마케렐레가 밑에 있고 다른 두 명의 선수로 구성된 삼각형의 미드필드가 있다면, 나는 나란히 중앙 미드필더들이 배치된 순수한 4-4-2를 상대로 언제나 이점을 지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언제나 한 명의 선수가 더 많기 때문이다. 일단 미드필더와 공격수들 중간에 있는 마케렐레로부터 시작된다. 만약 아무도 그에게 접근하지 않는다면 그는 피치 전체를 볼 수 있고, 그럴 시간도 있다. 반대로, 누가 그에게 압박해들어오고 상대팀의 윙어가 이를 돕기 위해 안쪽으로 들어온다면, 그것은 우리의 윙어 혹은 풀백에게 측면 공간이 열린다는 의미이다. 4-4-2는 이러한 일들을 막을 수 없다.”

2003-04 시즌, 아스날은 리그에서 무패 우승을 달성했지만, 바로 다음 시즌에 조세 무리뉴의 첼시는 숨막힐 듯한 4-3-3을 앞세워 단 1패를 기록하며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현대 축구에서 미드필드는 가장 중요한 격전지였고 주변 선수들의 지원 없이는 기본적으로 중앙에 미드필더 2명을 두고 있는 4-4-2가 3명을 둔 4-3-3과 4-2-3-1에 상대적으로 열세였다. 하지만 4-3-3에도 수비적인 약점이 분명히 존재했고 4-4-2가 측면을 통해 공략할 여지가 있었으나 무리뉴는 이를 기막히게 극복해냈다. 그 비결은 공격시에는 4-3-3, 수비시에는 4-5-1로 포메이션을 변형하는 것이었다. 볼을 잃으면 양쪽 측면의 윙포워드를 수비라인까지 끌어내려 안정적인 수비에 집중하다가 공세가 전환되면 윙포워드의 빠른 역습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4-3-3은 공격력과 수비력, 중원 압박과 삼각형 형태를 두루 갖춘 약점없는 전술로 보였다. 문제는, 이러한 전술을 수행하기 위해 공격에 능하고, 미드필더도 되면서, 역습시에는 드리블을 하고, 공수 전환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일 수 있는 체력까지 갖춘 윙포워드를 여러명 필요로 했다. 홀로 상대 센터백을 압박하며 필요할 때마다 원샷 원킬을 해주는 스트라이커도 필요했고, 중앙에서도 기동력과 공수 밸런스를 두루 갖춘 미드필더들도 필요했다. 과연 얼마나 많은 팀들이 이런 선수들을 다 구해서 무리뉴식 4-3-3을 쓸 수 있을까?

펩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는 무리뉴와 다른 방식으로 4-3-3 포메이션을 접근했다. 기본적으로 수비 라인을 매우 높은 곳까지 올린 상태에서 공격시에는 풀백이 적극적으로 전진하다가, 수비시에는 수비형 미드필더가 밑으로 내려와 세 번째 센터백으로 활용되었다. 중앙의 미드필더들은 패스 능력을 바탕으로 점유율 축구를 하다가 볼을 빼앗기면 바로 압박하여 다시 볼을 되찾아오는 극단적으로 공격적인 4-3-3을 운용했다. 이 역시도 완벽한 수비 라인 컨트롤과 끊임없이 패스를 주고받을 수 있는 개개인의 테크닉과 기동력이 바탕에 깔려있어야 했다. 형태상으로는 똑같은 4-3-3 포메이션이었지만 바르셀로나는 첼시와 같은 선수비 후역습이 아니라 4-3-3과 3-4-3을 혼용하며 삼각형 형태를 끊임없이 만들고 점유율을 높이 가져가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


(높은 볼 점유율이 반드시 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출처: SPOTV] 

축구 전술의 진화는 끊임없이 현재진행중이다. 위에서 말한 이야기들도 어느새 과거가 되고 벌써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만 같았던 4-4-2가 다시 리그에 등장하여 4-2-3-1을 쓰는 팀을 잡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3선의 넓어진 간격을 어떻게 대처했을까? 의외로 그 답은 간단했다. 요한 크루이프의 철학에 따르면, ‘두 팀의 모든 조건이 동등하다면 삼각형은 언제나 선을 이긴다’는 관념이 있었지만, 패스를 주고받는 삼각형 대형이 아무리 많이 만들어져봤자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결국 골을 넣어야 한다는 것. 4-4-2의 미드필더와 수비라인을 깊이 아래로 내려서 공간을 최소화 하고 있으면 그 밖에서 상대가 수백, 수천의 패스를 주고받아봤자 ‘의미없는 점유율’만 높아질 뿐이다. 오히려 그 과정 속에서 실수가 나오면, 번개처럼 역습을 하여 골을 넣고 오는 것이 최신 4-4-2의 트렌드였다. 아리고 사키가 주창한 4-4-2는 능동적인 압박이었고 그 의미가 조금 달라졌지만 대응적인 포메이션으로서 4-4-2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리고 4-4-2 본래의 모습과 비슷한 형태도 라 리가에서 발견되고 있다. 현재,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제치고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는 디에고 시메오네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이다. 이들은 4-2-3-1의 고향과도 같은 스페인에서 4-4-2 포메이션을 쓰고 있다. 4-4-2가 안고 있는 중앙 미드필드에서의 수적 열세를 디에고 코스타와 다비드 비야의 놀라운 활동량으로 보완했고, 두 명의 스트라이커는 수비에 적극적으로 가담함으로써 미드필드 싸움에 기여하고, 4-4-2 특유의 압박 축구가 여전히 통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하고 있다.

4-2-3-1에도 새로운 변화가 찾아오고 있다. 기존에는 중앙에 위치한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가 한 명은 볼을 빼앗아오기만 하고, 다른 한 명은 볼을 패스하기만 했었는데, 요즘은 둘 모두 태클을 하여 볼을 뺏고, 볼배급을 하며, 그 중 한 명은 앞으로 전진하여 자칫 고립될 수 있는 공격형 미드필더를 돕는 역할까지 수행하기 시작했다. 아스날의 아론 람지가 좋은 예이다. 4-4-2에서 존재했던 BTB 미드필더는 4-2-3-1의 등장으로 사라지고 각 포지션에서 역할이 전문화되었는데, 전문적인 포지션에서 다시 만능의 선수를 찾고있는 모양새는 참 아이러니하면서 흥미롭다.

[출처: Sky Sports] 

이쯤에서 한 번 결론을 내려보자. 그럼 축구에서 승리하기 위해 어떤 전술과 포메이션을 써야할까? 조금은 교과서적인 대답같지만, 현재 보유하고 있는 선수들 구성에 가장 적합한 전술을 써야한다. 예를 들어, 월드클래스 스트라이커 두 명이 있는데 원톱을 쓰는 전술이 대세라는 이유로 좋은 선수를 벤치에 앉히는 것은 낭비일테니 말이다. 반대로, 월드클래스 윙어가 있지만 좋은 스트라이커가 없다면, 스트라이커라는 이유로 그를 골 넣는 역할로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상대 수비를 이끌어내고 윙어가 뒷공간으로 파고들 수 있는 전략을 제시하는 것이 훌륭한 선택일 것이다. 축구 전술이 겉으로는 그저 공간을 잘 파고들어 골을 잘 넣기 위한 방법론같지만, 한 단계 깊이 생각해보면 11명의 선수들이 지니고 있는 특질들을 효율적으로 하나로 묶어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한 노력이다. 단순히 특정 포지션의 이론적, 구조적인 이점만으로 시스템에 선수를 끼워맞추는 것은 좋은 결과를 얻지도, 선수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전술은 보유하고 있는 선수들의 능력을 가장 극대화할 수 있는 전술일 것이다.

과거에는 일부 축구 전문가들의 전유물처럼 느껴졌던 축구 전술에 대해 일개 아스날 팬인 내가 어느새 조잘조잘 떠들 수 있다니 참 오래살고 볼 일이다. 나름대로 그동안 축구 전술에 대한 책도 읽고 칼럼도 많이 읽었지만, 아스날 경기를 보는 날에는 그런 지식은 전부 날아가고 누가누가 잘하나 못하나밖에 보이지 않게 된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연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가끔씩은 주변에 축구 전문가같은 사람들이 등장하여 아스날을 분석하는 것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의아한 마음도 든다. 언제 아스날을 그렇게 분석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나 하면서 말이다. 나는 잘 못하겠다. 내게 연애학개론은 사랑하기 전까지 효용이 있을지는 몰라도 일단 사랑에 빠지면 감정 흘러가는대로 열심히 사랑할 뿐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니까. 아스날이 어떤 포메이션과 어떤 전술을 쓰는지 이해하지 못해도 좋으니까 오늘도 내일도 이기면 좋겠다. 내게는 그것이면 충분하다.
교정 : @yesd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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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위라는 이름의 트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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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변의 많은 일들을 성공과 실패라는 두 가지 잣대로 나눠서 평가하곤 한다. 시험을 보고 합격하면 성공, 불합격하면 실패.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고 사귀면 성공, 거절 당하면 실패. 축구에서 상대팀에게 이기면 성공, 지면 실패. 실은, 우리네 삶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데 말이다. 당장은 실패처럼 보이는 일이 밑거름이 되어 미래의 더 큰 성공의 발판이 되기도 하고, 당장의 성공에 방심하다가 본전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단 성공을 원한다. 바로 오늘, 우리는 잘되길 바란다. 아직 찾아오지 않은 내일을 위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 중에서 스포츠팀의 감독이라는 자리는 가장 냉정하게 평가받는 직업 중 하나일 것이다. 매주 승리와 패배라는 결과로 세상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이다. 어떤 감독이 완벽한 1년의 장기 계획을 세우더라도 지금 패배를 면치 못하고 있다면, 팬들은 결과에 분노하고, 능력없는 감독이라고 이야기하며, 구단주는 감독 교체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프리미어 리그에서 시즌 중에 서너명의 감독들이 중간에 자리를 잃는 것은 이제는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스날에서 18년간 감독직을 이어오고 있는 아르센 벵거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축구 감독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아스날을 지켜보고 있는 팬들의 시선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아스날

[출처 : BT Sport]

 

아르센 벵거는 18년의 재직기간동안 프리미어 리그 우승 3회(1997-98, 2001-02, 2003-04), FA컵 우승 4회(1997-98, 2001-02, 2002-03, 2004-05)를 차지했으니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팀을 여러차례 우승으로 이끈 훌륭한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전 벵거는 자신의 1,000번째 경기를 맞이하여 이와 관련된 여러가지 통계들이 나왔는데 그 중에 눈길을 끌던 것이 있었다. 1996년 아스날 부임 이후 첫 500경기를 치르는 동안 7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그 다음 500경기에서는 아무 트로피도 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물론, 올해에 FA컵 우승의 가능성이 있다.) 빅클럽이라고 불리는 명문 축구팀에서 8년 넘게 작은 트로피조차 하나 들지 못하고 그가 감독직을 유지하고 있는 일은 전세계에 아르센 벵거가 유일무이하다. 무리뉴가 벵거를 두고 비아냥거린 ‘실패의 전문가’ 코멘트가 참 따갑고 한편으로는 공감되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르센 벵거“올해는 처음으로 핵심 선수를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핵심적인 선수를 영입했다. 중요한 점은 기대치가 높다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선수들을 잃어왔고 기대치가 낮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점은 내게 매우 힘들었다. 2005년까지 우리는 우승을 놓고 다투는 팀이었다. 새로운 경기장으로 옮긴 후, 갑자기 우승에서 멀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몇몇 시즌에는 우리가 우승에 가까웠지만 이루지 못했다. 어쩌면 약간의 경험과 4월에 차이를 만들어낼 퀄리티가 부족했던 것 같다. 이번에 돌아오는 4월에는 우승을 놓고 예전보다 좀더 경쟁적인 위치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시즌 시작이 될 때쯤 아르센 벵거가 늘상 하는 말들이 있다. “올해는 우승을 할 수 있다. 뭔가를 이루겠다.” 라는 맥락으로 올해만큼은 작년 혹은 제작년과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기세좋게 시즌을 시작하고 나아가다가 12월쯤 하나둘씩 부상 선수들이 늘어난다. 그리고 겨울 이적시장이 끝날 때쯤에 ‘새로운 영입과도 같은’ 부상자들이 복귀하면서 새로운 선수는 영입하지 않은 채 시즌 후반기를 맞이한다. 3, 4월이 되면 선수들의 누적된 피로와 부상으로 무승부와 패배가 계속 늘어가고, 결국 5월이 되면 4위 언저리에서 시즌을 마친다. 매년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아스날의 1년은 놀라울 정도로 반복되는 레파토리였다. 그래서 올해 한참동안 아스날이 1위를 달릴 때에도 사람들은 후반기에 추락할 거라고 예상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실수 혹은 문제점이 수년간 개선되지 않고 재발되고 있으니, 아스날팬들은 답답해하며 벵거의 능력 혹은 고집을 탓할 수 밖에 없다.

 

아르센 벵거 “내 관점으로는 다섯 개의 트로피가 있다. 첫째는 프리미어 리그 우승, 둘째는 챔피언스 리그 우승, 셋째는 챔피언스 리그 진출, 넷째는 FA컵 우승, 다섯째는 리그컵 우승이다. 최고의 선수들을 불러오려고 할 때, 그들은 당신에게 '리그컵에서 우승했는가?'라고 묻지 않는다. 대신, '챔피언스 리그에서 뛰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아스날

[출처 : BBC Match of the Day]

 

지난 주말은 이번 시즌 프리미어 리그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맞대결이 있었다. 리버풀과 우승을 다투는 맨체스터 시티, ‘4위 트로피’를 놓고 아스날과 경쟁중인 에버튼, 이 두 팀의 한 판 승부였다. 결과는 3-2 맨체스터 시티의 승리. 이로인해 맨체스터 시티는 우승을 향한 희망의 불씨를 이어가게 되었지만, 반면 4위 자리를 놓고 아스날과 경쟁하던 에버튼은 패배로 승점 차이를 좁히지 못하면서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 획득이 무산되었다.

 

프리미어 리그에서 4위와 5위의 차이는 매우 크다. 왜냐하면 4위는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에 참가할 수 있지만, 5위는 그보다 하위 대회인 유로파 리그에 참가하기 때문이다. 권위적인 부분이나 금전적인 이득, 그리고 흥행 면에서도 챔피언스 리그와 유로파 리그는 그 차이는 굉장히 크다. 그러므로 리그에서 우승 경쟁만큼이나 치열한 것이 4위 경쟁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스날은 17년간 챔피언스 리그를 진출해왔으니, 트로피를 들지 못하고 무관의 시기를 보내고 있던 시절에도 사실은 꾸준하게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아스날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가 아르센 벵거에 대한 비판론자와 옹호론자가 갈라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스날 

[출처 : BT Sport]

 

아르센 벵거 “우리는 클럽을 계속 성장시켜야 했고, 우리는 재정적으로 조금 어려워질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 결정(새 경기장 건립)을 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맨체스터 시티는 커다란 투자를 감행했고, 첼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중으로 타격을 받은 것이다. 당시에 우리는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2006-07 시즌, 아스날은 기존의 하이버리 구장을 떠나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으로 홈 경기장을 옮기게 되는데, 이 새로운 경기장은 아스날에 막대한 부채를 안겨준다. 이는 즉각적으로 팀에 금전적인 압박으로 작용했고, 이후 아스날은 기량이 만개한 선수를 영입하는데 돈을 쓰기보다는 어린 선수를 길러내는 길을 택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억만장자의 구단주를 등에 업은 첼시와 맨체스터 시티가 등장하면서 리그에서 아스날의 위치를 더욱 어렵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팬들의 시각으로는 비록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분명히 아스날에게 우승 기회가 있었다는 것. 특히, 벵거는 겨울 이적시장에서 소극적이었는데, 팀에서 성장하는 유망주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며, 부상자가 돌아온다며, 혹은 "우리에겐 퀄리티가 있다"며 단기적인 보강을 꺼려왔다. 시즌의 절반을 넘어오는 동안 팀에 드러난 문제점들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면 이야기는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실제로, 2008-09 시즌 겨울 이적시장에서 아스날로 이적한 안드레이 아르샤빈은 흘렙과 플라미니의 이탈로 추락하고 있던 팀을 구해냈다.)

 

아스날

[출처 : 2008-09 Arsenal Season Review]

 

이번 시즌도 마찬가지였다. 작년 여름부터 반 페르시의 공백을 메울 월드클래스 스트라이커 영입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지만, 벵거는 20살 유망주 야야 사노고를 데려온 것이 고작이었다. 결국, 단 한 명의 스트라이커 올리비에 지루로 5개월을 버틴 것이다. 아스날이 전반기에 128일간 리그 1위를 달렸지만, 그 사이 오른쪽 측면의 공격을 전담했던 테오 월콧마저 십자인대 부상을 당했다. 그러므로 겨울 이적시장에서 아스날이 공격수를 영입하는 것은 누가 봐도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벵거는 모두의 예상을 비웃듯이 31살의 미드필더 킴 셸스트룀을 임대해온 것이 전부였다. 이후, 아스날은 5위까지 떨어졌다가 부상에서 돌아온 아론 람지와 메수트 외질의 활약에 힘입어 간신히 4위를 턱걸이로 마친 것을 두고, 17년 연속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이뤄냈다며 축하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이것은 성공일까 실패일까. 성공이라고 하기에는 기대치에 턱없이 못 미치고, 실패라고 부르기에는 나름의 성과는 성과이므로, 정리하자면 실패를 면한 정도라고 해야할까.

 

아스날

[출처 : BT Sport]

 

때마침 이번 시즌이 끝나면 아르센 벵거의 계약기간이 만료된다. 그와 재계약을 하는 것이 맞을까, 하지 않는 것이 맞을까. 혹시 재계약을 하게 되면, 아스날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4위 언저리에서 헤매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좀더 승부사적 기질이 있는 감독을 데려와 우승을 노려보는 것은 어떨까. 혹시 감독을 바꿨다가 맨유처럼 작년 1위였던 팀이 7위로 추락하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좀더 벵거를 믿어봐야 하나.

 

아르센 벵거 “날 보라. 당신은 다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FA컵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당연히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는 명백한 일이다. 여러차례 말했듯이, 나의 헌신에는 변함이 없으며 실제로 내가 클럽에서 쓸모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과 관련이 있다. 클럽에 의심을 품었던 순간조차 없다. 내가 만약 아스날의 감독직에 의심을 품었다면 몇 년전에 떠났을 것이다. 수많은 제의를 거절해야 했고, 나는 많은 압박을 받으며 이 클럽에서 헌신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팬들의 찬반 의견에 관계없이 벵거는 재계약을 하고 아스날에잔류하는 모양새다. 어찌하겠는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해봤자 우리는 구단주가 아니라 일개 팬일 뿐인걸. 금전적인 압박이 사라진 지금, 실망스러운 시기를 뒤로한채 아르센 벵거의 시대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의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없는 트로피가 챔피언스 리그 트로피인데, 벵거는 과연 은퇴하기 전까지 비어있는 챔피언스 리그 트로피를 채워 넣고, 다시 한 번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아스날에서 이뤄낼 수 있을까.

 

아스날

[출처 : FA TV]

 

비록, 올해도 프리미어 리그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은 남의 집 잔치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FA컵 결승전이 남아있고, 끝없이 흘러가기만 했던 무관의 시계를 드디어 멈출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이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내가 꿈꾸었던 곳은 더 높은 곳이었다면서 아스날의 4위에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기 보다는, 멀게만 느껴졌던 트로피가 손에 잡힐듯 가까이 다가왔으니 일단 잡았으면 좋겠다. 이번 시즌의 많은 아쉬움들을 FA컵 우승으로 달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이 우승의 기운이 다음 시즌까지 이어져서 내년 프리미어 리그와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더 멋진 추억을 만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제는 4위라는 이름의 무형의 트로피 말고,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 트로피와 함께.


교정 : @yesd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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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무협소설 입문자에게 강력 추천, 『성운을 먹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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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데스노트』로 유명한 오바 츠구미ㆍ오바타 타케시 콤비의 『바쿠만』을 아는가? 스토리 작가와 만화가가 콤비를 이룬 『바쿠만』은 자신들같이 콤비를 결성한 만화가 지망생 둘이 합작한 작품으로 잡지의 공모전에 출품하고, 데뷔하여 성취와 좌절을 반복하며 커리어를 쌓아 나가는 이야기다. 실제 일본 만화업계의 일면을 보여주어 만화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많이 회자되기도 했지만, 『바쿠만』의 포인트는 ‘만화 그리는 만화로 소년만화의 왕도인 배틀물을 제대로 표현해냈다’는 지점이다. 지금 『성운을 먹는 자』소개 대신 왜 『바쿠만』이야기냐고?


김재한 작가의 화제작 『성운을 먹는 자』의 플롯은 소년만화의 결을 고스란히 따른다. 『바쿠만』식으로 표현하자면 ‘소년만화의 왕도는 배틀물’. 왕도 중의 왕도의 길을 걷는 작품이다. 형운이라 불리는, 모든 것이 평범하고 혹은 그 이하라 핍박받는 삶을 살다가 귀인에게 도움을 받아 스승으로 모시며 무공을 쌓아 최강이 되는 길을 걷는다. 도중에 기재의 부족에 좌절하기도, 혹독한 수련에 도리질치기도 하다 라이벌을 만나고, 아름다운 여인의 등장에 설레기도 하며 힘겹게 성공의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라간다. 비범한 기운은 있으나 실력은 일천한 주인공이 동료를 만나 힘을 합쳐 적을 물리치고, 우정도 쌓고, 실력도 쌓아가며 점점 더 강한 적수를 물리치고 주인공이 원하는 본질에 점점 다가가는 것. 어라, 어디서 본 적 없나? 있다. 너무 많다. 그럴 것이다. 『성운을 먹는 자』는 일단 재미 없을 수가 없다. 누구나 인정하는, 안정적으로 재미를 담보하는 극 진행. 거기에 판타지와 무협. 각종 무술의 이름이 쏟아지고 기기묘묘한 적수들이 쏟아지며 연단술(연금술)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불안정하고도 매력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자 이제 『성운을 먹는 자』의 디테일을 보자. 실패확률 낮은 탄탄한 스토리 라인에 무엇이 바뀌고 뒤틀렸는지, 어떤 미덕이 추가되었는지. 오십 년에 한 번 하늘에서 거대한 별이 떨어지고, 그 기운을 품은 이가 태어난다. 세상을 능히 지배할 만한 기재를 가지고 태어난 천재들을 탐하는 자가 넘쳐난다. 그런데 주인공 형운은 성운이 떨어진 날에 태어났지만 그 기운의 부스러기도 얻지 못했다. 모두가 탐내고 원하는 주인공이었다면 작품의 제목을 ‘성운을 먹는 자’가 아닌 ‘성운을 타고난 자’로 바꿔야 마땅하겠지. 모자란 주인공을 위기에서 구해 제자로 삼는 이는 연단술사 조직 ‘별의 수호자’의 수석 수호자 ‘귀혁’이다. 그는 성운에 태어난 기재들을 싫어한다. 그래서 천재들을 능가하는 범재를 키우고자 마음을 먹었고, 형운을 이끈다. “어떻게 하늘에게 선택받은 천재를 범재가 이길 수 있나요?”라는 형운의 물음에 귀혁은 답한다. “하늘이 부여한 재능이라 해도 그것을 담는 그릇은 사람이다. 그러니 그것을 이길 방법은 사람이 쌓아올린 것을 활용하는 것이지. …돈이다.” …돈? 청렴하게 산중 깊은 곳에서 폭포수 맞으며 기를 모으고 구름을 밟아도 시원찮을 마당에, 돈? 이거 사파 아닌가? 답은 『바쿠만』에 나온다. 『바쿠만』속 아시로기 무토는 소년만화의 전형을 따르면서도, 주제의식과 디테일은 왕도가 아닌 사도에 한없이 가까워 다양한 독자층에 어필한다. 심지어 그들의 데뷔작은 『이 세상은 돈과 지혜』. “부자예요?”라는 질문에 “어, 나 부자.”라고 답하는 스승을 얻어 남들은 귀해서 일생에 한 번 먹어볼까 말까한 연단술로 만든 비약을 정기적으로 섭취하며 착실히 커나간다.

형운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자는 성운을 타고난 동갑내기 소년 천유하. 모두가 그를 원해 이전투구를 벌이는 동안 시크하게 유하를 도운 뒤 취하려하지 않고 떠나는 귀혁. 유하는 유일하게 자신을 원하지 않는 귀혁에게 첫눈에 반…해 버리지는 않지만 선택받지 못한 것에 마음을 쓰며 무공을 쌓는다. 당연하게도 형운에게 유하는 라이벌이라기엔 너무 크고 먼 존재. 모든 것을 다 가진 유하에게 맞서기 위해 천하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실력가인 스승, 귀혁에게 모든 것을 전수 받기위해 노력한다. 아시로기 무토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천재 만화가 니즈마 에이지가 『성운을 먹는 자』로 치자면 천유하가 아닐까. 엄청난 재능과 노력으로 이미 데뷔부터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천재. 에이지의 담당자가 되길 원하는 편집자는 차고 넘친다. 기재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몇 곱절에 달하는 노력이다. 잠자리부터 먹는 것 하나까지 수련의 연속인 형운의 날들처럼.

판타지 무협 소설의 독자들은 김재한 작가의 최고작을 『폭염의 용제』 로 꼽는다. 후반부로 갈수록 광대해지지만 초반 설정과의 긴밀함을 놓지 않는 치밀함, 매력적인 캐릭터와 특유의 편안한 문체까지. 그렇다면 『성운을 먹는 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판타지와 무협소설의 세계에 입문하는 독자들에게 강력 추천하는 작품. 위에 언급한 작가의 장점을 놓치지 않고, 익숙한 이야기 구조로 소재가 주는 위화감을 누르면서, 거기에 더해 어려운 용어는 부족한 주인공에게 일일이 일러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읽고 습득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돈’이라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아이템을 끌어와 그 따위 필요 없을 것 같은 세계에 일부러 던져놓아 독자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고양감을 준다. 형운의 성장과 귀혁의 가려진 본심, 팽창하는 세계를 누비며 활약하는 인물들의 뒤를 눈으로 좇아가자. 최신화까지 독파하는 건 시간문제다. 웰컴 투 판타지 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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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운을 먹는 자김재한 저 | 월, 수, 금 연재
무협풍 동양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 50년에 한번 성운의 기재라 불리는, 하늘에서 떨어진 별의 힘을 받은 절세의 기재들이 세상에 나타난다. 이들의 재능이 너무나도 뛰어나기에 언제나 세상이 그들에 의해 요동치고는 한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성운의 기재가 태어나는 시기, 그들을 원하는 집단에 의해 핍받받은 객점의 심부름꾼 소년 형운은 기인 귀혁을 만나 제자가 된다. 성운의 기재와 같은 날에 태어났음에도 아무런 재능도 갖지 못한 형운에게 그는 성운의 기재를 능가할 한 가지 방법을 이야기하는데, 그 방법이란 바로…….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자녀에게 부모의 시간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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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 부모들은 아이를 키울 때 ‘아이에게 최선은 무엇인가?’를 가장 먼저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에 부모가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


스웨덴에서 우리 부부와 친하게 지낸 마츠 부부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매를 두었다. 이들 부부는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갖기 위해 둘 다 근로시간의 90%씩만 일하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이 일주일에 40시간을 일할 때 이들은 36시간씩만 일한다. 부모 중 한 명이 아이들의 등교를 챙기면 다른 한 명은 아이들의 하교와 그 후의 일과를 챙긴다. 아이들이 학교 수업 외에 취미 활동을 하면 부모가 아이들을 차로 데려다주고 데려온다. 아이들이 하는 취미 활동 클럽에 참여하고 도와주기도 한다.

마츠 부부는 아이들과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일도 많이 하고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고 취미 활동도 즐겼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들을 돌보고 함께 지내는 데 시간을 투자한다. 또 아이들을 키우기 좋은 환경을 찾아 이사도 갔다. 이처럼 마츠 부부는 아이를 낳은 뒤 모든 것을 아이 중심으로 바꾸었다.

한국에 있는 내 친구 A는 두 딸을 두었다. 부모가 저녁 늦게까지 일하기 때문에 이 아이들은 알아서 저녁을 차려 먹고 부모가 올 때까지 자기들끼리 지낸다. 열세 살짜리 큰딸은 힘들게 일하는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무슨 일이 생겨도 부모에게 얘기하거나 상의하지 않았다. 부모는 일을 집까지 가져왔고 주말에도 일하기 일쑤였다. 큰딸은 몸이 좋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도 부모에게 아프다고 하소연하지 않았다.

이 부부는 열심히 돈을 벌어야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해줄 수 있고, 아이들도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걸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부부가 고생하는 것도 다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아이들이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고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경험하길 원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 부부는 자신들의 사회적인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마츠 부부와 친구 A 부부 중 어느 쪽이 더 아이들을 위해 희생한 것일까? 물론 양쪽 부모 모두 아이들을 위해 나름의 희생을 감수했다. 다만 가치관과 방식이 다를 뿐이다. 특히 한국의 많은 부모들은 아이를 위해 자신들이 희생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런데 그 희생이 결국 물질을 좇기 위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런 생활을 지속한 결과, 아이들은 부모의 무관심을 원망하고 부모는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일했는데!’라며 자식을 원망하게 된다.

한국의 많은 부모들은 자녀가 성인이 되어 안락하고 성공한 인생을 살길 바란다. 부모와 함께 보내지 못한 시간은 돈이나 물질로 보상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사랑과 걱정 때문에, 좋은 삶을 살게 해주겠다는 욕심에서 아이들의 현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스칸디 부모들은 아이들과 함께 삶의 순간순간을 서로 부대끼고 음미하며 살아간다. 아이들을 위해 온전히 부모의 시간을 저축하고, 그 시간을 기꺼이 자녀에게 선물한다. 아이가 부모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충분히 옆에 머물며 시간을 통해 증명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지원은 그 다음 일이다. 물질은 아이들에게 줘버리면 그만이지만 함께하는 시간은 부모 자신도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이가 대학에 들어간 뒤에’, ‘돈을 많이 번 다음에’가 아니라 지금 당장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교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두 살, 여섯 살, 열 살, 열다섯 살, 모든 나이의 아이들이 그때를 가장 행복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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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 부모는 자녀에게 시간을 선물한다황선준,황레나 공저 | 예담friend
행복한 아이를 만드는 스칸디나비아식 교육법. 아이들의 행복성적표를 들여다보면 북유럽 아이들이 우리나라 아이들에 비해 자신감과 행복지수 면에서 월등히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까? 이 책은 두 저자가 북유럽 부모들의 육아와 교육의 본질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몸소 체험한 결과물이다. 가부장적이고 고집 센 경상도 남자가 자유롭고 합리적인 스웨덴 여성을 만나, 26년간 스웨덴에서 세 아이를 낳아 키우고 교육하며 ‘스칸디 맘’의 남편이자 ‘스칸디 대디’로 살아온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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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경 “로맨스 쓰고 자유를 얻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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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 e연재에 두 작품을 동시에 연재하고 있는 작가가 있다. 정희경 작가가 바로 그 주인공. 그는 제 8회 디지털 작가상 장려상 수상작인 <러브버거 외 두 편>과 1920년대 경성 기방에서 이야기꾼으로서의 삶을 당당하게 개척해 나가는 이본이라는 여성의 성장담<살롱 드 경성>를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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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는 예스24와 인연이 꽤 깊다.  “내일(2014년 1월 28일)이 예스24에서 블로그를 한 지 10년이 되더라고요.” 정희경 작가는 블로그 10주년을 맞이하는 소회를 밝히며 블로그에 아래와 같은 포스팅을 남기기도 했다.


“오래 한 것이 자랑은 아니다. 나이 든 것이 자랑거리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반짝이는 순간보다 꾸준한 시간이 더 아름답다. 무슨 일을 이루기 위해는 최소한 만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만시간은 하루 세 시간 씩 십 년이라고 한다. 블로그가 십 년이 되었고 글을 써온 시간도 얼추 십 년이 되어 간다. 아쉽게도 하루 세 시간을 온전히 쓰는데 바치지는 못했다. 만 시간을 향해 오늘도 키보드를 두드린다.”

(2014년 1월 28일에 쓴 포스트 ‘만 시간의 법칙’ 중 )


10년 동안 “아쉽게도 하루 세 시간을 온전히 쓰는 데 바치지는 못했”음에도 글을 써온 지 7년째 되는 2010년. 그 해 정희경 작가는 글쓰기에서 뚜렷한 성과를 이루는데, 전북일보 신춘문예와 농민신문 신춘문예 두 곳에 당선이 된 것이다. 그렇게 등단이 된 뒤  “문학잡지에서 꾸준히 청탁을 받고 책이 나와 이름만 대면 웬만한 일반인이 알 만한” 그런 작가를 꿈꾸기도 했지만, “예상했던 대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소설을 쓰기만 하면 잘 쓴다, 정말 재미있다는 칭찬을 무척 많이 받았어요. 중앙지 신춘문예에도 계속 도전을 했는데 당선이 계속 안 되는 거예요. 로맨스를 쓰기로 마음 먹은 지금에서야 깨달았어요. 제가 너무 주눅이 들어 있더라고요. 순수 문학에 주눅이 들어서 어깨가 무거운 거예요. ‘나 같은 게 뭘’, ‘내가 감히… ‘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나의 한계를 스스로 만든 거죠. ‘로맨스 쓸게요!’하는 순간, 나 자신이 굉장히 가벼워지고 자유를 얻은 느낌인 거에요. 글이 죽죽 막 나가더라고요. 어깨에 짐이 없어지는 느낌? 쓰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았어요.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했지만 주눅은 안 들었어요.”


소설로 승부를 걸어보겠다, 하고 마음을 먹은 뒤 처음으로 느껴 본 홀가분한 기분으로 쓴 첫 번째 로맨스 소설이 2013년 여성중앙 로맨스 공모전에서 당당히 대상을 받은 ‘스페셜 향수 시리즈’다.


“여성중앙 로맨스 공모전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소재를 찾으러 도서관에 갔어요. 서가에 꽂혀져 있는 책들을 손가락으로 스르륵 서핑 하여 딱 걸린 책이 『향수』였어요. 이 책을 빌려서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데 저도 모르게 소설의 모든 얼개가 잡히더라고요.”


일필휘지로 거침없이 쓴, 작가의 첫 번째 로맨스 소설. 작가는 ‘스페셜 향수 시리즈’를 쓰는 시간이 즐거웠다. 아예 처음부터 이런 마음으로 장편에 도전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한다. 투고를 한 뒤, 대상은 분명 내 차지일 거라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호언장담까지 했다. 그래서 대상 소식을 알리는 전화가 왔을 때도 너무 담담하게 받아서 담당 에디터가 오히려 놀랐다고.


작가의 첫 번째 로맨스 장편 <살롱 드 경성>도 예스24 e연재를 통해 소설 연재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담당자의 전화를 받고, 바로 구상에 들어갔다.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 ‘연애의 시대’ 편에서 대한민국 1920~1930년대의 구여성 이야기가 나왔는데, 신과 구의 가치가 혼재되어 있는 그 시대 여성들이 자신들의 독립적인 삶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었다. 이런 소스를 밑바탕으로 작가는 바로 이야기의 플롯을 잡았다고 한다. “내 본성에서 나온 글”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까? 작가를 툭 치기만 하면 탁하고 이야기가 술술 풀려 나오는 느낌이다. 


10여 년 동안 글쓰기를 해왔지만 사실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지는 않았다. 198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닌 작가는, 그 때는 누구나 문학소녀였다며, 지금 학생들이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윤동주 같은 작가를 좋아하는 분위기에, 문학은 폼 잡는 용도이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이라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또 대학 졸업 후 직장 다니고 아이를 키우는데 전념하던 그 시간이 역설적으로는 문화적 공백기여서 책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러나 인터넷서점이 생기고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무엇보다 아이가 유치원에 가고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는 작가를 향한 꿈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작가가 되고자 결심하고 나서 첫번째로 한 일은, 책을 집중적으로 읽은 것.


“얼마 전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가 인기였잖아요. 사실 그 시기가 제게는 문화적 공백기에요. 그 시대의 책, 노래, 영화, 드라마 등을 저는 별로 누리질 못해서 오히려 요즘 저는 그 시대를 향유한 사람들에게 질투가 느껴져요. 2000년 대로 넘어오면서 아이가 유치원에 가고 학교에 가면서 시간이 생겼고 비로소 책을 읽을 여유가 생겼어요. 인터넷으로 책을 사고 글을 쓰면서 내가 다시 써볼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문화적 공백기를 채우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책읽기라 생각하고 3년 동안 집중적으로 책을 읽었어요. 일주일에 3권씩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면, 빌린 책들을 다 읽고 반납하고 다른 책을 빌리는, 그런 시간을 3년 동안 보낸 거죠.”


어떤 소설을 쓰고 싶냐는 질문에,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하는 작가는 “너무나 훌륭하게 잘 커준 딸은 대학 다니느라 서울로 출가 중인(작가는 경기도에서 거주한다) 지금, 신경 쓸 게 아무 것도 없어서 집중적으로 소설 쓰기에 최고의 시간”이라며 너무나 좋단다.


“나는 그 카펫을 사뿐히 밟고 새로운 글쓰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생전 처음 내가 가진 작은 재주가 의외의 결과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생긴다. 컴퓨터는 종이 판매량을 줄이지 못했지만 스마트폰은 종이 판매량을 급감시켰다. 아무래도 나는 꽤 성공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런 호언 장담이 부끄럽지 않게 되기를 빈다.”

(2013년 12월 16일에 쓴 포스트 ‘호언장담’ 중)


요즘 최고의 화제 영화 <겨울왕국>의 엘사는 'let it go'라는 노래를 통해 말한다. 이제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능력을 펼치며 살겠노라고. 그렇게 결심 후 비로소 엘사의 얼굴은 엘사만의 아름다움을 찾는다. <살롱 드 경성>의 본이가 그러하다. 정희경 작가 역시 마찬가지. 이제는 “내 본성에서 나온 글”을 인정하여, 스스로 자유를 획득했기에. 이런 이유로 정희경 작가의 건투와 성공을 간절하게 바란다. 그 누구나 자신의 본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권리는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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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드 경성정희경 | 로맨스 | 매주 화, 목 연재
'본이'가 남편의 연애로 인해 세상에 내동댕이쳐졌을 때 그녀를 구원한 것은 '이야기'였다. 이야를 가지고 세상과 싸워나가는 본이의 성장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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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버거 정희경 | 로맨스 | 연재 완결
대한민국 디지털 작가상 동상 수상작으로 러브 버거, IP, 불임의 시간 세편의 단편 소설입니다.




고려 초기 왕족의 사랑을 상상력으로 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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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말 통일신라 말기. 아니 후삼국시대라 부르는 것이 더욱 마땅하다 여겨질 정도로 민심은 나뉘고 한반도는 혼란스러웠다. 각지에서는 농민봉기가 발생했다.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지자 지방 호족들의 세력은 조정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부와 세를 불린다. 이 중 송악(개성) 지방의 호족이었던 왕건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된다. 『빛나거나 미치거나』는 조선-구한말을 배경으로 하면서 일거 붐을 조성했던 로맨스 소설들보다 조금 더 시선을 과거로 가져간다. 고려 건국 초기의 왕실에 만화경을 가져다 댄다.

 

빛나거나미치거나


 
세를 과시하는 각 지방의 호족들을 발 아래에 두고 황제로 군림하기 위해서 태조 왕건은 무려 스물아홉 번의 혼인을 치른다. 물론 온 세상 여인들을 다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 결혼은 아닐 터, 스스로의 정치적 군사적 기반을 공고히 다지며 경제적 풍요까지도 노린 선택이었다. 부인이 많아 자식도 많다. 줄잡아 열 명도 넘을 황자가 체육계, 학자계 등 계열별로 준비되어 있었다. 먼저 태어난 형을 모조리 죽이지 않는 이상 결코 왕위를 물려받을 일이 없는 황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도 유독 왕건의 눈에 들어차는, 황제의 위엄과 담대함(그리고 주인공으로 손색없는 미모까지)을 갖춘 황자는 다름 아닌 넷째, ‘왕소’였다.
 
왕소는 왕위에 관심이 없었다. 황궁에서의 삶은 숨이 턱턱 막혔다. 어차피 왕위를 이을 수 없다면 바라는 대로 기방에서 여인을 품고, 이 지방 저 지방을 돌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왕권에 위협이 아님을 보이는 게 낫다는 걸 몸소 터득한 똑똑한 자였다. 그런 왕소가 이국에서 수면향을 맡고 납치가 된다. 눈을 떴을 때 그는 결혼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여인을 보쌈 해서 내 것으로 취하는 상것들의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남자를 납치해 혼인을 올리다니. 기이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잠시 장단을 맞춰볼까 싶었던 왕소의 앞에 ‘혼인’ 대상이 나타난다.

 

청해상단의 ‘실질적’ 수장인 열아홉 소녀 신율. 출생의 비밀을 가슴에 품고 거상의 집안에 양녀로 몸을 의탁해 자라나 어느덧 집안의 기둥이 된 강단 있는 소녀였다. 하룻밤 눈속임만 된다면 언제 쓰레기통에 처넣어도 상관없는 결혼식이나 신율은 남자를 눈여겨보고, 왕소는 “경국지색은 아닌” 어린애에겐 그다지 관심이 없다. 둘은 선선히 헤어지지만 여기서 인연이 끝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겠지?!
 
의형제가 된 왕소와 신율, 그리고 야심을 품은 자 왕욱
 
오 년 후, 그와 그녀는 다시 만나지만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린다. 새로운 장애물도 나타난다. 연적이 없으면 곤란하다. 마음에 품었던 단 한 명의 여인이 형인 왕소만을 바라보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고, 그럼에도 정치적인 목적으로 아버지인 왕건의 후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또 한 번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회한에 사무친 사내가 있었다. 어미의 피를 물려받아 누구보다도 뛰어난 미모를 가졌고, 총명한 두뇌를 지녔으며 무엇보다도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 다시는 사랑하는 여인을, 그 무엇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야심을 품은 자. 여섯 째 황자인 ‘왕욱’.

 

아버지의 후궁으로 들어간 그의 사랑 ‘다녕’과 꼭 닮은, 하지만 상단의 수장답게 배포 넘치고 총명하고 씩씩해 여느 여인들과 사뭇 다른 신율에 빠져드는 왕욱은 이내 자신이 찾아낸 보석 같은 존재가 또다시 다른 곳에 마음이 향해 있다는 걸 안다. 얄궂게도 상대는 이번에도 왕소. 상황은 반복되지만 다녕을 놓쳐야만 했던 그 때의 왕욱이 아니다. 아버지 왕건을 황제의 자리로 옹립했지만,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왕건을 대신해 만인지상의 자리에 자신과 결이 맞는 자를 새로 추대하고자 수를 쓰는 숙부와 결탁해 왕위찬탈을 구상하는 동시에 신율에게는 신율이 가장 바라는 것들을 무리하지 않고 얻도록 해준다. 잃어버린 핏줄을 찾아주거나, 보통 여자들은 관심도 없을 만한 서책을 구해 신율에게 바친다거나.
 
그러나 마음만큼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남자 복식을 한 신율에게 의형제를 맺자며 우악스럽게 팔에 목을 끼우고, 기방에 신율을 데려가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던 왕소에게 신율은 말할 수 없이 이끌리고, 남자인 줄 알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리던 왕소는 그가 실은 그녀였다는 사실에 겨우 눌러 담았던 사내의 연심을 한껏 발산한다. 그토록 독립적이고 몇 수 앞을 내다볼 정도의 혜안을 가진 신율이 사랑하는 사내 앞에서는 의존적인 성질을 숨기지 않고, 여자에게 무심한 듯 표정 없던 왕소 역시 소유욕을 거침없이 드러낼까? 모두에게 똑같지만 너에게는 솔직해지길 허락받은 것처럼. 둘의 마음은 이제 막 통하였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진 실낱같은 인연은 줄곧 지금의 만남을 암시하고 있었다.
 
애틋한 러브라인을 뛰어 넘는 흥미진진한 ‘밸런스’에 주목하자
 
지금까지 세 남녀의 러브라인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았지만, 정작 『빛나거나 미치거나』의 묘미는 삼각관계와 닿을 듯 말 듯한 애틋한 로맨스가 아니다. 밸런스다, 모든 것의 밸런스. 시시각각 다가오는 왕위쟁탈전의 후끈한 공기 속에 등장인물 모두가 저마다 다른 생각 하나쯤은 하며 사람을 대하고, 이쪽의 로맨스가 상대에겐 두고 볼 수 없는 죄악이 된다. 입신양명에 눈이 멀어 인간을 경시하는가 하면 노예시장에 나온 모녀를 사들여 그들에게 새 삶을 주는 인간도 있다. 무거운 출생의 비밀은 아무렇지 않듯 밝혀지며 공공연한 환부가 곪아 썩어 들어가도 종이 한 장 덮어 모른 척 외면해버린다. 공평하게 어둠을 품고 있고, 공평히 머리 위로 빛이 쏟아진다. 그 빛에 미쳐버리거나, 빛이 후광이 되거나 는 어떤 길을 걷느냐에 따라 갈라진다. 아직 갈 길이 꽤 남은 듯 보이는 작품이나 이제껏 뿌려진 떡밥들이 어떻게 갈무리가 되는지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가치가 있다.


 

 

 

빛나거나-미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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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거나 미치거나현고운 저 | 화목토 연재
빛나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피가 난무하는 ‘황자의 난’ 속에서 ‘저주받은 황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던 넷째 황자, 왕소. 사내가 아닌 여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죽음을 마주해야 했지만 세상을 읽을 줄 아는 눈을 가진 덕에 찬란한 새벽을 여는 망국의 공주, 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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