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채널예스 : 연재종료
Viewing all 2529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

2013년 대한민국 예능을 정리한다

$
0
0

TV를 켠다. 연말이면 어김없이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이 나온다. 바로 시상식. 스타들의 과도한 드레스와 메이크업을 바라보다 질린 틈 사이로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나도 시상식을 열어볼까?’ 그렇게 이른바 ‘내 맘대로 AWARD’가 시작되었다. 

 

※ 다소 개인 취향이 많이 들어간 시상식이다. 글을 읽다 보면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부문도 있을 수 있다. 

※ 이 시상식은 맨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설의 시상식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제1회 ‘내 맘대로 AWARD’ 시상식! 2013년 대한민국 예능 판도의 흐름을 살펴보며 시상을 진행해 보도록 하겠다.

 

예능, 남자하기 나름이에요

 

2013년 예능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점은 바로 ‘남자’예능이 큰 사랑을 받은 점이다. 사실, <무한도전>부터 <1박 2일>까지 예능에는 남자 연예인이 주로 활약을 해왔지만 2013년 예능은 이 트렌드를 본격적으로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저 야생적인 이미지의 남성의 모습만이 아니라 2013 예능계에서는 ‘남자’라는 키워드에서 뽑을 수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선보였다. 우선, <아빠 어디가>를 통해 아빠로써의 남자를, <진짜 사나이>에서는 군인으로써의 남자를 보여줬다. <나 혼자 산다>에서는 도시의 독거남이 등장했고, 마무리는 노년의 남성들 즉, <꽃보다 할배>들이 장식했다. 이밖에도 강제 처가살이를 하는 사위들의 모습도 등장했다. 


이러한 다양한 ‘남성’의 모습을 살펴보면 ‘예능, 남자하기 나름이에요’라는 말은 과장이 아닌 듯하다. 남자들이 예능에서 사랑받은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그 동안 조명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비춘 점이 인기의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믿음직한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 때로는 찌질하고 겁이 많은 이 시대의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무용담으로만 듣던 군인의 진짜 모습, 심심하게만 여겨졌던 노년층들의 삶까지 결국, 새로운 모습에 대해 시청자들은 큰 사랑을 보냈다.

 

 

함익병.jpg★올해 최고의 사위상


SBS 자기야 <백년손님> - 함익병
장모님 앞에서 절대 기죽지 않는 사위. 오히려 사위의 잔소리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장모님의 모습을 보여주며 올 한해 최고의 처월드 적응력 100%를 보여준 함서방.

 


신구.jpg★올해 최고의 할배상


tvN <꽃보다 할배> - 신구
직진 순재 형 앞에서도, 투덜이 일섭 동생 앞에서도 언제나 웃으며 무사히 여행을 끝마쳐주신 우리 신구 할배.

 


이종혁.jpg★올해 최고의 아빠상


MBC <아빠 어디가> - 이종혁
딸 바보 송종국 아빠 앞에서도, 아들 바보 윤민수 아빠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신개념 방목형 양육의 세계를 보여줬다.

 



예능, 미각의 제국이 되다


2013년 대한민국은 유독 ‘미각의 제국’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VJ특공대나 생생 정보통과 같은 정보교양프로그램에서만 볼 수 있었던 맛집과 음식소재들이 본격적으로 예능 프로그램까지 스며들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잘만 먹어도 ‘먹방스타’로 주가를 올릴 수 있는 한 해이기도 했다. 이렇게 시각과 청각에 의존하는 TV가 다른 감각인 ‘미각’을 키워드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든 것은 미각이야말로 적은 돈을 들이고서도 가장 큰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어려워진 주머니 사정의 소비자들은 한정된 수입 안에서 최대의 사치를 즐길 수 있는 거리를 찾게 되고 그 접점에 음식과 요리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예능 프로그램은 음식을 쉽게 조리할 수 있는 정보를 공유하는 영리함을 보이기도 했다. <해피투게더> 야간매점이 대표적이다. <맨발의 친구들>은 연예인들의 밥상을 본격적으로 파헤치기도 했다. 이밖에도 요리에 ‘경쟁’이라는 키워드를 도입해 <마스터 셰프 코리아>가 탄생했고, 시청자들은 치열한 경쟁과 다이내믹한 요리과정에 환호했다. 이렇듯 ‘미각’을 자극하는 예능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에게 요리를 통한 ‘소소한 럭셔리’를 선사해 주었기에 큰 사랑을 받았다.


윤후.jpg★올해 최고의 먹방스타


MBC <아빠 어디가> - 윤후
<아빠 어디가>는 분명 여행 프로그램인데, 윤후가 맛있게 음식을 먹는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짜빠구리 인기의 장본인이 된 윤후. 후루루짭짭 면을 먹는 윤후의 모습이 2013년 최고의 먹방이기에 이 상을 수여한다.

 

 

01.jpg★올해 최고의 요리하는 남자


Olive <마스터 셰프 코리아> - 강레오
강레오 셰프는 독설을 내뱉어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지만 현란한 요리 솜씨와 더불어 독설 속에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예능, 관찰에 빠지다


2013년 예능에서는 ‘리얼 버라이어티’ 대안으로 ‘관찰예능’이 등장해 큰 사랑을 받았다. 기존의 리얼 버라이어티가 보여준 리얼리티에 더 심화된 리얼리티를 보여주면서 시청자들에게 예능의 진정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관찰예능의 가장 큰 심리적 효과는 바로 ‘관음’이 아닐까한다. 궁금했던 스타의 사생활이나, 특정 상황에서의 출연자들의 실제 반응을 바라보는 관음적 상황이 시청자들의 몰입을 끌어 모았다. 이제 관찰예능 포맷은 예능 판도에 주류로 자리 잡았다. 주요 방송사는 물론, 케이블, 종편 채널을 찾아봐도 많은 예능프로그램들이 이 형식을 차용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씁쓸한 사실은 예능 프로그램의 획일화이다. 시청률을 무시할 수 없어서 안정적인 산출을 보여주는 강력한 포맷을 너도나도 차용하는 일이 이해는 가지만, 다양한 콘텐츠를 원하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아쉽기만 하다.



제목 없음.png★올해 최고의 관찰예능 프로그램상


MBC <나 혼자 산다>

많은 1인가구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정규 편성으로 입성한 ‘나 혼자 산다’. 출연 독거남들의 집에 설치된 CCTV를 통해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으므로 이 상을 수여한다.


지금까지 ‘제1회 내 맘대로 AWARD’였다. 수상 기준은 다소 필자의 주관이었지만, 이 글로써 독자 분들이 2013년 어떤 프로그램을 시청했는지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기를 빌어본다.


[관련 기사]

-웃기고 아픈 예능 <나 혼자 산다>
-<1박 2일>, 여행은 끝나지 않는다
-실패한 슈스케 5, 그럼에도 박재정 박시환을 위한 변명
-<우리 동네 예체능> 21세기에 다시 등장한 농구
-왜 독서가 인간의 조건일까?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형곤 최양락 김병조, 시사코미디의 시대

$
0
0
1987년의 6월 항쟁은 철옹성과도 같던 5공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고, 사회 전반에 불어 닥친 민주화의 열기는 방송계에까지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공정한 언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채 어용으로 전락한 공영방송사는 시청료 납부 거부 운동이라는 시민사회의 저항에 부딪쳤다. 방송계 내부에서도 각 방송사의 노조 결성과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분리에 관한 열망으로 표출된 자성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각 방송사에서 제작된 프로그램의 성격 또한 일련의 변화를 겪는다.

노태우 정부 집권 첫해인 1988년, KBS의 일부 취재진들은 사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6.10 남북학생회담, 현대중공업 노동쟁의, 전민련 결성대회 등 주류 언론에서 좀처럼 다루지 않던 민감한 사안들을 보도하였다. 1980년부터 MBC에서 방영되었던 인기드라마 <전원일기>는 당대의 사회문제를 외면한 ‘새마을운동’ 홍보 드라마가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을 쇄신하고자 보다 다양한 사회적 소재를 다뤘다. 1989년 MBC <베스트셀러 극장>에서는 신군부독재 체제에 부역하였던 어용언론의 행태를 통렬하게 비판한 단막극 <신 용비어천가>를 방영하기도 했다. <신 용비어천가>의 경우 소설가 현길언의 작품을 원작으로 했는데, 훗날 참여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유시민이 수배 시절 이 드라마의 각본을 썼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다.


당시 시사 프로그램과 드라마 등에 엿보인 변화의 조짐은 최고의 활황을 누리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도 일찌감치 감지되었다. 기득세력의 허물을 빗대어 꼬집고 풍자함으로써 민초들의 억눌린 애환을 달래는 것이 코미디의 미덕 가운데 하나라지만, 군사정권 시기의 희극인들은 서슬 퍼런 위정자들의 위세에 짓눌려 스스로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그러던 한국 코미디계에 본격적인 시사풍자를 도입한 이가 있었으니 그는 코미디언 故 김형곤이다.

김형곤은 1980년 TBC 개그콘테스트에 입상하며 코미디언으로 데뷔하였다. 데뷔 초기, 육중한 체구로 인해 ‘공포의 삼겹살’이라는 별명으로 이름을 알린 그가 본격적인 유명세를 탄 것은 KBS <유머 일번지>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이라는 코너를 통해서였다. 비룡그룹이라는 가상의 대기업을 무대로 한 이 코너는 비룡그룹 회장 김형곤을 필두로 한 이사진들의 중역회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이 코너는 비룡그룹으로 상징되는 정재계의 기득계층을 희화화하여 풍자함으로써 해학적인 웃음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였고, 비슷한 시기 극장판으로도 만들어질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사회 전반에 만연해있던 기득계층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은 인사비리, 검열제도, 불법선거자금 등의 문제점들을 비틀어 꼬집는 시사풍자 코미디 부흥의 밑거름이 되었다.

다음은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의 한 장면이다. 비룡그룹의 이사진들은 그룹 회장의 생일을 맞이하여 값비싼 도자기를 선물하려 한다. 하지만 한 이사가 실수로 도자기를 깨뜨리고 만다. 격노할 것이 분명한 회장의 반응이 두려운 이사진들은 다음과 같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테이블을 ‘탁’하고 치니, 도자기가 ‘퍽’하고 깨졌어요.”

때는 1987년, 안기부에 의한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아직 시민들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던 시기이다. ‘테이블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더라’는 안기부의 어처구니없는 변명은 그해 여름 대대적인 민주화 항쟁을 불러일으킨 촉매가 되었고, 독재정권의 잔학성과 무책임한 일면을 드러낸 일화로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이러한 공권력의 행태를 희화화함으로써 웃음거리로 만든 코미디 프로그램은 당국의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존재였을 것이다. 정치권과 전경련의 고위인사로부터 잦은 외압설에 시달리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은 첫 방영을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종영되었다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인한 방송 민주화 분위기 속에 재편성되어 90년대 초반까지 방영되었다.


80년 대 중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못지않게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코너는 KBS <쇼 비디오 쟈키>의 ‘네로 25시’였다. 독재자 네로 황제가 집권했던 제정 로마 시대를 당대 한국의 실정에 접목시켜 패러디한 이 코너는 코미디언 최양락의 능청맞은 황제 연기와 더불어 재벌과 집권세력에 대한 풍자로 큰 인기를 끌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앞서 언급한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과 ‘네로 25시’ 모두 코너를 이끌어가는 등장인물들이 모두 당대의 기득계층을 대변하는 유형의 캐릭터들이라는 점이다. 네로 황제와 비룡그룹 회장은 각각 정재계의 고위급 인사를 상징하는 인물들이지만, 그들이 지닌 권위는 그 자신과 측근들이 지닌 치부와 허물로 인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럼에도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며 일말의 권위를 지키려는 이들의 우스꽝스런 행동은 기득계층의 위선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코미디 전망대>는 1991년 개국한 신생방송국 SBS가 본격 시사풍자 코미디를 지향하며 내놓은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의 코너 가운데 하나였던 ‘코미디 모의국회특위’는 국회를 아예 그 무대로 삼아 국회의원을 풍자한 꽁트였다. SBS의 개국과 함께 타방송사에서 이적한 이봉원, 최형만, 김종국 등의 코미디언들이 이 코너에서 국회의원으로 분해 소모성 공방을 일삼는 당시 국회의원들의 행태를 풍자하였다. ‘배추머리’로 유명한 코미디언 김병조는 ‘지구를 떠나거라!’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며 날카로운 해학을 선보이기도 했다. 90년 대 후반까지 방영되었던 <코미디 전망대>는 종전까지 정통 코미디 프로그램의 몇몇 코너에만 국한되었던 시사 코미디 장르를 프로그램의 정체성으로 표방하여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코미디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90년 대 중반까지 인기를 누리던 코미디 프로그램들은 90년 대 후반 이후, 예능 프로그램의 판도가 버라이어티쇼로 기울기 시작하며 점차 사양길에 접어들게 된다. 각 방송사를 대표하던 코미디 프로그램들이 시청률 저조로 인해 잇따라 폐지되며, 시사코미디의 명맥 또한 자연스레 끊기게 된다.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던 꽁트식 코미디 프로그램은 2000년 대 이후 KBS <개그콘서트>,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등으로 대표되는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대체되었고 현재까지도 안정적인 시청층을 확보하고 있다. 그럼에도 1980년대에서 1990년 대 초까지 코미디 프로그램이 누렸던 범사회적인 영향력을 되찾진 못하고 있다. 웃음 뒤에 숨겨진 해학과 풍자의 실종. 수많은 코미디의 애호가들은 시사코미디의 통쾌한 맛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추천 기사]

-양방언 “야구광, 의대 졸업생 맞지만 내 이름은 피아니스트”
-하얀 눈밭을 그리워하는, 비좁은 사무실 안 직장인에게
-2014년은 『월든』 과 함께
-하코다테의 심야식당
-다니엘 튜더 “어떤 소설이든 읽을 가치가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연아의 마지막 행보, 아디오스 노니노

$
0
0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아닌 후배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국가대표 김연아로 봐주세요. 소치 올림픽에서 현역은퇴를 하겠습니다.” 2012년 7월 2일. 갑작스레 열린 긴급 기자회견.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가 팬들 곁에 돌아오던 날이다. 그렇게 그녀의 피겨인생 제 2막이 막을 올렸다.

이름 세 글자만으로도 감동 그 자체인 김연아. 필자 역시 대한민국 국민 중 한 사람으로써 그녀 이름 세 글자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그 감동을 잘 알고 있다. 그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밤낮 가리지 않고 모두 챙겨봤었다. 수많은 명장면 중 잊을 수 없는 한 장면. 바로 2010년 벤쿠버 올림픽 당시, 새파란 옷을 입고 프리 경기를 끝내며 두 손을 하늘 높이 번쩍 들어 올리던 그 장면. 그렇게 그녀는 금메달이라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꿈이던 값진 결과를 품에 안았다. 다음 시즌, 국민들의 사랑에 보답하는 <오마주 투 코리아>라는 프로그램으로 돌아와 팬에게 감사함을 전한 그녀는 그렇게 은퇴를 선언했다. 그렇게 제 1막이 끝이 났다.

은퇴를 발표하고 대략 1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다시 빙상 위로 돌아왔으며 그녀는 여전했다. 여전하다는 것. 쉬워 보이는 것 같지만, 정말 어려운 단어. 특히 정상의 자리에서 그 실력을 유지한다는 건 보통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누구나 짐작하고 있듯, 여태껏 공들였던 탑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리며 고생했을지 과연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뱀파이어의 키스>, <레미제라블>로 돌아온 그녀는 상상하던 그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운동선수가 몇 년을 쉬다가 돌아와서도 여전하다는 것. 보기 드문, 거의 없는 경우라고 한다. Queen Yuna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았다.

올림픽을 앞두고 그녀가 마지막 실전 무대로 삼은 곳은 ‘전국 종합 선수권 대회’. 이 대회를 앞두고 특집 다큐가 방영되었다. 이름마저 아련한 “마지막 선곡, 아디오스 노니노”, ‘김연아’라는 존재만으로 시청자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성공했다. 피겨를 중계하듯 남자와 여자해설자가 다큐를 해설해 나갔다. 올 시즌 첫 경기였던 자그레브 대회를 담은 짧았지만 짧지 않았던 프로그램이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한 선수의 노력과 인내의 긴 과정을 모두 보여주었다는 것. 그 모든 과정들을 담기에는 부족한 한편의 다큐였지만, 그녀의 마지막 행보를 하나하나 섬세하게 담고 있었다. 굵고 짧았다. 7분이란 피겨의 드라마 속에 한 선수의 땀 수백 수천 방울이 포함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

10년 전 노비스 레벨의 선수이던 때 처음 갔던 국제대회, 자그레브. 세계 최고가 되어 다시 찾은 그 곳에서 그녀의 마지막 시즌은 시작 되었다. 부상으로 인해 처음 선보인 프로그램은 그녀의 대단했던 피겨인생을 차분하게 끝내기에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어릿광대를 보내주오

잔잔한 음악 선율과 하나 되는 오묘한 노란빛 의상을 입은 그녀. 노란 장미의 꽃말은 ‘이별’이다. 중년 여성의 이별을 표현하는 음악까지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쇼트경기에 적합했다. 피겨선수라기엔 적지 않은 나이. 25살의 그녀는 이제 팬들 곁을 또한 그녀의 정들었던 빙상장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아디오스 노니노

프로그램 공개도 전에 어렵다고 소문이 나있던 <아디오스 노니노>. 긴밀하게 잘 짜여진 구성은 쉴 틈 없이 음악에 집중해야했으며 성공할 경우 멋지고 또 멋진 프로그램이었다. 만일 한 부분이라도 놓치게 된다면 도미노처럼 모든 것이 쓰러질지도 모르는 큰 위기가 닥치는 프로그램. 사실 이 프로그램을 연기하는 선수가 김연아라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역시나 그녀였다. 이 전의 <록산느의 탱고>와는 또 다른 탱고.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난 만개한 꽃의 탱고랄까. 훨씬 성숙했으며 애잔했던 그녀의 연기. 그녀에게 탱고가 잘 어울린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새로운 감동이었다.

다큐멘터리 속 인터뷰를 살펴보면 자그레브대회에 출전한 어린 선수들 중에는 김연아를 자신의 롤모델로 꼽는 선수들이 많았다. 늘 지켜보고 존경하던 선수와 한 대회에 함께 출전한다는 그 자체가 엄청난 행운이라는 선수들. 김연아 역시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나가노 올림픽을 보며 미셸 콴 선수를 롤모델로 삼았던 꼬마 연아는 알았을까? 자신이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리라고. 누군가에게 우상이 된다는 것. 즉, 어떤 이에게 삶의 지침이 되는 것이다. 천재라고 불리 우는 지금의 그녀를 만든 것은 연습벌레 김연아였다는 사실. 그녀 또한 정상을 바라보며 울고 웃으며 스케이트 탔다는 것. 전 세계 어린 피겨 선수들의 꿈이 되어 버린 그녀이기 이전에 한때 그들과 같았던 소녀 김연아. 부상에 시달리며 아사다 마오 선수와 경쟁하던 그녀의 어린 시절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때의 그녀가 있었다는 걸 알기에, 지금의 그녀는 아주 탄탄하게 만들어 졌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something special

외신 기자와의 인터뷰 중, 필자의 귀에 쏙 들어온 말이 있었다. 바로 “something special”. 그녀를 수식하는 그 많은 단어들보다도 와 닿는 말이었다. 그녀는 이미 피겨 역사에 오랜 세월 길이 남을 선수가 되었다. 피겨 불모지인 한국에서 전 세계 으뜸가는 선수가 된 그녀. 사막위에서 핀 꽃과 다름이 없으며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한 달 뒤를 끝으로 그녀의 경기는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덕분에 벤쿠버 올림픽, 소치 올림픽까지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녀와 동시대에 태어나 피겨라는 스포츠를 알게 되어 영광이다. 김연아가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피겨의 아름다움. 하얀 빙상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녀. 손짓 발짓하나에, 우수에 찬 표정 하나하나에 우리는 녹아들었으며, 그녀의 스케이팅은 말 그대로 예술이다.

한 달 뒤면 그녀는 빙상장에서 내려오게 될 것이다. 피겨 국가대표 선수인생은 막을 내릴테지만, 항상 온 국민들 마음속에 그녀는 영원히 Queen Yuna. 잊지 못할 것이며 언제 어디에 있든 늘 그녀를 응원할 것이다. 마지막 경기가 될 소치 올림픽. 결과가 어떠하든 단순한 마침표가 아닌 느낌표로 길이길이 간직되길 바라며 그렇게 그녀는 마지막 행보만을 남겨두고 있다.


[추천 기사]

-자우림 “대한민국에 김윤아 같은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총균쇠, 넬라 판타지아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
-마음을 건반처럼 두드리는 남자 이루마
-<마녀><닥터 프로스트>, 슬픔에 잠긴 이들에게 추천하는 웹툰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마법 -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청소년들의 진짜 이야기,

$
0
0
작금의 모든 싸움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건 정보다. 누가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가는 게임의 승자와 패자를 판가름한다. 토크쇼에서도 마찬가지다. 토크쇼 전쟁에서는 단연 토크의 내용이 싸움의 승패를 좌우하는 정보가 된다. 누가 색다른 토크의 내용을 선보이는가에 따라 프로그램의 성공 유무가 정해진다.

그간에 토크쇼들을 살펴보면, 새로운 토크 내용을 얻기 위해 꾸준히 포맷이 변모해왔음을 알 수 있다. <자니윤 쇼>, <이홍렬 쇼>, <김혜수 플러스유>, <서세원 쇼> 등과 같이 MC들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 형식을 시작으로 <야심만만>, <놀러와> 등의 집단 체제 토크쇼 포맷이 나왔다. 여기에 캐릭터가 더해져 <무릎팍 도사>와 같은 캐릭터 토크쇼도 탄생했다. 하지만 ‘다양한 프로그램의 포맷이 나온 만큼 토크의 내용도 신선해 졌을까’라는 물음에는 선뜻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는 아직도 토크 내용의 대부분이 출연자들의 개인적인 사생활을 들추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신선한 토크 콘텐츠가 돋보이는 토크쇼가 탄생했다. 바로 JTBC의 <유자식 상팔자>다. <유자식 상팔자>는 집단 토크쇼 형태의 포맷을 선보이고 있어 형식이 신선한 프로그램은 아니다. SBS <붕어빵>과 유사한 포맷이기도하다. 그럼에도 <유자식 상팔자>는 신선한 출연진들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타 토크쇼와는 큰 차별을 두고 있다.




‘청소년’ 출연진에서 나오는 신선한 토크 콘텐츠

<유자식 상팔자>는 청소년이 주인공이다. 주로 어린이 또는 어른의 세계를 다루는 방송 프로그램들이 주를 이루는 상황에서 청소년이 주인공이 되는 프로그램이 나왔다는 사실이 무척 반갑다. 하지만 청소년이라는 새로운 출연진을 내세웠다는 강점만으로는 <유자식 상팔자>는 종합편성채널이라는 한계점을 가졌음에도 5%(닐슨코리아, 12월 기준)라는 시청률을 기록하는 쾌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유자식 상팔자>의 긍정적인 성과 뒤에는 또 다른 강점이 숨어 있다. 바로 청소년들이 진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로 풀어내게 한 점이다.

<유자식 상팔자>의 청소년 출연진들은 모두 연예인 부모를 둔 아이들이다. 자칫, 토크의 내용이 연예인 부모의 숨겨진 일상을 폭로하는 쪽으로 기울 수 있지만 이 프로그램은 부모와 청소년이 공감하거나 고민할 법한 토크 주제를 내세워 토크의 방향을 잡는다.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요) 토크’ 코너에서는 청소년 출연자들이 부모와 한번 쯤 갈등을 일으켰을 또는 사춘기 시절에 한번 쯤 고민해봤을 법한 토크 주제를 선보인다. 가령 ‘명문대를 꼭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부모가 이혼한다면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부모와 자식 간 싸움의 원인은 부모다 vs 자녀이다’ 등이다. 또한 ‘부모님 전상서’ 코너에서는 ‘10년 뒤에 내 모습은 어떠할 것인가’ 등 청소년들의 솔직한 생각을 들어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부모와 자녀의 토크는 공방전 형식으로 진행된다. 이 토크 공방전이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청소년 출연진들의 대답이 부모들의 예측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신의 자녀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라고 확언하지만 정작 자녀는 반대의 대답을 하고 엉뚱한 이유를 말한다. 개인적으로 이 점이 재미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필자가 띠동갑 차이가 나는 동생을 둔 시청자여서다. 가끔은 일상 속에서 10대에 접어든 동생의 생각이 궁금할 때가 많았다. 가끔 동생이 예상치 못한 행동과 말을 할 때는 더 더욱 그 생각이 궁금했다. 늦둥이 아들을 둔 부모님은 오죽하셨을까. 우리 가족은 나란히 앉아 <유자식 상팔자>를 보며 동생과 비슷한 나이의 출연진의 대답에 귀를 기울인다. 부모님과 나는 <유자식 상팔자>의 청소년들이 무슨 답을 할까 예상해 본다. 하지만 번번이 그 답은 오답이 된다. 하지만 가족 중 유일한 10대인 동생은 청소년 출연진들과 거의 비슷한 대답을 한다. 부모님과 나는 바로 동생에게 물어본다.

‘정말 그래?’

이렇듯, <유자식 상팔자>는 현재 청소년들의 생각을 잘 알지 못하는 시청자에게 새로운 토크 콘텐츠를 전달한다. 이 점이 굉장히 신선한다. 실제로 가족 중에 청소년이 있다면 <유자식 상팔자>의 토크 내용이 소통의 교과서가 되기도 한다. 간접적으로나마 청소년들의 실제 생각을 들어볼 수 있고,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자연스럽게 같은 주제로 가족의 대화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유자식 상팔자>가 진짜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갔기에 가능한 일이다.




다양한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토크쇼

<유자식 상팔자>의 또 하나의 재미는 사고를 확장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점이다. 내가 저 나이 때 저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생각하면서 토크의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프로그램에 대한 몰입은 점점 높아진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토크쇼는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쇼가 아니라, 시청자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주는 프로그램이라 생각한다. 토크쇼가 예능 프로그램 영역에 속하기는 하지만 ‘토크’의 본질은 ‘말’이고 ‘말’은 사람의 ‘생각’을 기반으로 나오기에 토크쇼는 시청자에게 조금은 의미 있는 시간을 제공해줘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점에 있어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사춘기 학생들의 생각을 들여다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게 하는 <유자식 상팔자>는 잘 만들어진 토크쇼라는 생각이 든다.

<유자식 상팔자>의 기획 의도는 ‘가족 소통 토크쇼’이다. 기획의도와 프로그램의 내용이 잘 들어맞는 프로그램이다. 당분간 <유자식 상팔자>는 토크쇼 전쟁에서 상위를 차지할 것이란 확신이 든다.


[관련 기사]

-연재를 시작하며
-<히든 싱어>, 시즌1보다 강해진 시즌2
-2013년 대한민국 예능을 정리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죽일만한 사람만 골라 죽이는 살인범은 무죄?

$
0
0

시즌9까지 인기리에 방영되고 막을 내린 미드 <덱스터>는 연쇄 살인범이 주인공이다. 주인공 덱스터는 혈흔 분석가로 일하면서 은밀히 사람을 죽여 나간다. 범인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살인을 이어가는 사람이 주인공이라니! 덱스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출생과 성장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어떤 환경에서 양육되었는지를 파악하면 그 사람을 형성하고 있는 기본 바탕을 이해할 수 있다.


덱스터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살해되는 현장에 있었다. 그 현장에는 몇 살 터울의 형도 함께 있었다. 덱스터는 살해당한 어머니의 피가 흥건하게 고인 바닥에서 피를 뒤집어쓴 채 형과 함께 컨테이너 박스에 방치되어 있었다. 덱스터의 어머니는 경찰에 정보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일이 잘못되어 그만 범인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정보원으로 덱스터의 어머니를 심어 둔 경찰 해리가 덱스터의 양아버지가 된다. 해리는 현장에서 덱스터와 그의 형을 보고 형은 이미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멘탈이 손상되었다고 판단하고 어린 덱스터만 양자로 삼기로 결정한다. 이후 덱스터의 형은 고아원으로 보내져 그 곳에서 성장하는데 그 역시 사이코 패스, 연쇄 살인마가 되어 이후 덱스터와 재회하게 된다. 그리고 덱스터는 의붓동생인 뎁을 살리기 위해 친형을 죽이는 선택을 한다.

덱스터의 양아버지 해리는 책임감을 가지고 덱스터를 입양해서 키운다. 하지만 어린 시절 덱스터가 사이코패스라는 사실을 확인한 양아버지는 최대한 그가 사회에 적응해 서 살 수 있도록 규칙을 정해 준다. 규칙은 두 가지. 죽일만한 사람만 죽일 것. 절대 잡히지 말 것. 덱스터는 시즌9까지 오면서 많은 일을 겪는다. 자신이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이코패스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을 진심으로 믿고 사랑하는 아내와 여동생, 아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덱스터에게는 낳아주고 길러주신 어머니 말고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지켜보며 양아버지와 함께 규칙을 만들어 준 정신적인 어머니인 보겔 박사가 있었다. 그러나 이 정신적 어머니마저 결국 덱스터의 눈앞에서 자신의 친 아들(역시 사이코패스)에게 죽임을 당한다. 덱스터는 자신을 낳아 길러준 어린 시절의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데 이어 자신을 정신적으로 돌보아준 박사 어머니의 죽음마저 목격하고 손을 쓸 수 없게 된다. 이는 다시 한 번 덱스터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결국 그 친아들을 찾아가 죽음으로 갚아 주지만 덱스터를 사랑해준 사람은 모두 그렇게 세상을 떠났고, 덱스터는 혼자가 된다. 그의 곁에는 이제 여자친구 한나와 아들만이 남아 있게 된다. 하지만 덱스터는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을 떠나 살기로 결정한다.

덱스터-.jpg

죽일만한 사람, 죽어 마땅한 사람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도덕적 질문은 덱스터를 보는 내내 시청자를 따라다닌다. 아무 잘못도 없이 무참하게 살해당한 피살자들의 사진을 늘어놓고 그들을 죽인 범인을 잡아 그곳에 끌고 와 묶어둔다. 그리고 범인의 손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보게 하며 덱스터의 칼날이 범인을 처단한다. 범인의 시체는 토막난 채 바다 깊은 곳에 버려진다.

이런 장면을 보며 시청자는 통쾌한 복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범인을 꼭 저렇게 심판하고 처벌해야 하는지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살해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인가? 이런 갈등을 줄여 주기 위해서인지 드라마에서 설정된 죽여야 할 대상은 대체로 끔찍한 연쇄살인범들이다. ‘저런 사람이라면 죽는 게 나아, 죽어 마땅해’라고 생각할 수 있게끔 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실 이들이 죽어 마땅한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덱스터가 이들을 죽이게 된 진짜 이유다. 그는 살인 자체를 즐긴다. 하지만 아무나 죽일 경우 혼란스러워질 것에 대비해 그의 양아버지이자 경찰이었던 해리가 규칙을 만들어 준 것이다. 그리고 덱스터는 자신의 살인 욕구를 이 규칙 안에서 해소했던 것이다.

덱스터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고 덱스터 역시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이들을 살해한다. 본질적으로 덱스터나 덱스터의 손에 죽은 여러 연쇄살인범이나 그 뿌리는 동일하다는 이야기다. 덱스터는 이들을 죽이는 데 망설이거나 후회하지 않지만 이들을 죽이는 과정에서 자신을 사랑해준 소중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을 겪으며 극심한 혼란을 느낀다. 내면에서 솟구치는 엄청난 살인 충동을 억누르지 못해 규칙을 어기면서 살인을 저지르기도 하는 그는 결국 이렇게 말한다.

I destroyed that I love!

덱스터가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는 모습이 시즌9의 마지막 회에 나온다. 타인과 관계 맺기 힘들고 보통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덱스터. 그는 자신을 믿고 사랑해준 사람들의 희생으로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극복했고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이를 통해 사이코패스가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며 함께 살아갈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어머니의 살해 현장을 목격한 아이, 살해당한 어머니의 피를 뒤집어 쓴 채 컨테이너에 방치되어 울고 있던 아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결국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덱스터가 보여준 미소는 그가 앞으로 더 이상 살인을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기는 어렵게 만들어 놓는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 안전할 거라는 전제 하에 그는 어쩌면 다시 살인을 시작할지도 모른다. 인간 내면의 파괴된, 손상된 어떤 것은 어쩌면 영영 복구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복구가 될 수는 없을지라도 일부분은 복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미드 <덱스터>이며 그 주인공 덱스터다.


[관련 기사]

-연재를 시작하며
-범죄 수사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 각종 심리의 보물창고
-<크리미널 마인드>의 리드, FBI 요원은 어떤 사람인가
-살인자만 찾아서 죽이는 연쇄살인마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생고생 예능의 진화, < Let's go(古) 시간탐험대 >

$
0
0
확실히 드라마는 ‘환상’을 기반으로 하는 장르가 맞다. <Let's go(古) 시간탐험대>를 본 후 이 생각은 더욱 확실해졌다. 많은 역사 드라마를 보면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시대를 간접체험 했지만, 드라마 속 민중들의 삶이 심하게 궁핍해 보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열악한 환경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애절한 사랑에 눈길이 갔을 뿐이다. 그렇게 드라마는 ‘역사’를 ‘환상’의 세계로 끌고 들어갔다.

예능 프로그램 <Let's go(古) 시간탐험대>는 달랐다. 역사를 리얼 중에서도 ‘진짜 리얼’의 세계 중간에 놓았다. ‘진짜 리얼’이라는 말은 희한한 언어조합임에 틀림없지만, 이 프로그램을 묘사하는 가장 알맞은 단어의 조합이다.

‘리얼’이라는 화두가 대한민국의 예능 판도를 장악한 지는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리얼’이라는 수식어 뒤에 실험, 버라이어티, 관찰, 여행 등 다양한 프로그램의 형식 또는 소재의 키워드가 붙으며 무한 복제가 되었지만 본질은 하나였다. 바로 어떻게 리얼리티를 살릴 것인가 이다. 사실, 리얼리티를 잘 살리는 방법은 단순하다. 프로그램 출연자들이 직접 ‘생고생’을 하면 된다. 그렇게 ‘생고생’은 ‘리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예능프로그램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다.

<무한도전>의 전신인 <무모한 도전>에서는 소와 줄다리기를, 탄광촌에서 연탄 구하기를 했고, <1박 2일>에서는 까나리 액젓을 음료수처럼 들이켰고 야외취침을 일상처럼 보여주었다. <정글의 법칙>은 아예 정글로 떠났다. 단순하고 무식해 보이는 행동을 할수록 사람들은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반응이 나오니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은 일개미처럼 열심히 생고생을 시작했다.

<Let's go(古) 시간탐험대>도 생고생 리얼 프로그램의 맥을 잇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그 맥을 그냥 이어받지 않았다. 가장 독하게, 누구보다 리얼하게 그 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출연진들이 대놓고 프로그램이 망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모습의 진정성이 시청자에게도 느껴질 정도이다. 출연진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인 <Let's go(古) 시간탐험대>의 고생은 ‘옛 시대를 있는 그대로 살아보기’라는 단순한 규칙에서 나온다. 민속촌에서 전통체험을 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제작진은 정해진 시대에 실제로 했던 민중들이 살았던 삶을 철저히 고증해 미션으로 부가한다.

조선 성종시대의 노비의 삶을 체험하는 에피소드에서는 출연자들을 철저히 노비의 생활로 살도록 한다. 음식을 담당하는 ‘취비’, 불을 담당하는 ‘불담사리’ 등 실제 노비들에게 나눴던 노역대로 출연자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미션을 가장한 일을 시킨다. 부싯돌로 불을 만드느라 4시간 동안 돌을 마찰시키고, 소를 산책시키며 길에 흘린 소똥도 풀을 뜯어 청소하는 모습은 <정글의 법칙>에서 병만족의 고생과 오버랩 되기도 한다. 심지어 역사서에 적힌 대로 삭힌 오줌과 잿물을 섞어 빨래를 하고, 아침 소변으로 세수를 한다. 이러한 미션은 이 프로그램에서는 쉬운 축에 속한다. 닭을 손수 잡아 음식을 만드는 일은 예사이고 직접 소를 도축까지 했다. 이쯤이면 <Let's go(古) 시간탐험대>가 예능을 가장한 EBS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생고생 예능의 진화를 가져온 <Let's go(古) 시간탐험대>는 출연자들의 캐릭터도 잘 살렸다. 여태까지 큰 인기를 끈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 출연자들의 캐릭터가 있었다. <Let's go(古) 시간탐험대>도 이 포인트를 잘 잡았는데, 그 중심에 선 캐릭터가 바로 ‘투덜이’ 개그맨 장동민이다.

장동민은 타 방송에서 보여주었던 모습 그대로 미션 수행 내내 투덜대고, 분노하고, 제작진에게 서슴없이 욕을 한다. 이러한 모습만 계속 보여주지만 장동민에게 계속 눈길이 가는 이유는 투덜대면서도 누구보다도 성실히 미션에 임하기 때문이다. 100리가 넘는 길을 폭염 속에서도 꿋꿋하게 걸어가고, 대감에게 매질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신분의 역할을 맛깔나게 해낸다. 할일은 하면서도 투덜거리기에 오히려 화를 내는 모습이 장동민의 캐릭터를 돋보이게 해주는 매력이 되었다. 여기에 장동민과 콤비를 이루는 유상무, 탄탄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남희석 등의 캐릭터들이 합쳐져 <Let's go(古) 시간탐험대>는 탄탄한 출연자들의 캐릭터 조합을 이뤄냈다.


모두가 리얼을 외치는 예능 프로그램 사이에서 <Let's go(古) 시간탐험대>는 ‘순도 100% 리얼’을 전략으로 내세웠다. 비슷한 전략을 취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넘쳐나는 상황에서도 이 프로그램이 주목받는 이유는 우직함이다. 출연자들이 힘들다고 협상을 시도하지만 끝까지 프로그램의 규칙을 끌고나가며 미션을 수행하도록 한다. 이렇게 시청자들에게 100% 리얼을 전달하려는 프로그램의 우직한 모습은 짜고 치는 고스톱같이 그럴싸한 설정을 선보이는 타 리얼 프로그램들과 확실히 차별화 된다. 다소 무식해 보이기도 단순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더 ‘리얼’ 이라는 키워드를 잘 살리는 <Let's go(古) 시간탐험대>가 앞으로 얼마나 더 악덕하고, 리얼한 삶을 보여줄지 기다려진다.


[관련 기사]

-연재를 시작하며
-<히든 싱어>, 시즌1보다 강해진 시즌2
-2013년 대한민국 예능을 정리한다
-청소년들의 진짜 이야기, <유자식 상팔자>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시즌 1 종료, 성동일 아빠로서의 성장 1년

$
0
0
‘여행’을 소재로 하는 프로그램이 늘고 있다. <아빠 어디가>도 어쩌면 기존에 많이 있는 뻔한 여행가는 프로그램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행과 아빠가 만났다. 우리나라 곳곳을 아빠와 아이가 엄마 없이 단 둘이 떠나는 일. 평소 실천하기 어려운 포맷의 여행이었다. 각자 다른 직업이지만 ‘아빠’라는 공통점으로 하나 된 다섯 남자와 각각 개성 뚜렷한 다섯 명의 귀여운 아이들. 아이들은 아빠 손잡고 여행길에 나섰고 ‘성공’이라는 결과를 이루어냈다.

작년 이맘때쯤 첫 화 방송 이후 시청자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프로그램, <아빠 어디가>. 제목부터 신선했으며 아빠와 아이라는 연결고리 사이에 여행이 존재하는 것 역시 참 흥미로웠다. 시청자들의 결혼ㆍ출산을 권장했을 정도로 다섯 아이들은 귀엽고 예뻤다.

필자는 처음에는 <아빠 어디가>에 편견이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옛날의 아이들과 다르다는 말이 예사로 쓰이지 않던가. 어린이다운 순수함은 요즘 아이들에게선 찾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으며 유명 연예인의 자녀라는 이유로 평범한 아이들과는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색안경을 끼고 있었다. 다행히도 색안경이 무색하게 어린이는 여전히 어린이였다. 집 떠나 낯선 여행지의 밤하늘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찼다. 소와 말을 할 수 있다던 어른들의 몰래카메라에 신기해하며 좋아하던 아이들의 동심은 어른들을 반성하게 했다.

1년이란 시간동안 아이들은 우리나라 곳곳의 숨은 여행지를 다녔다. 첫 번째 여행지 품걸리를 시작으로 다시 찾은 제주도까지. 여행지의 수와 비례해서 아이들은 빠르게 자라났다. 매회 다르게 성장했으며, 마음 역시 더 튼튼하게 자랐다. 자란 것이 아이들뿐일까? 육아에 어색한 다섯 아빠들은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법부터 시작해서 캠핑, 요리까지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냈다.




친구상 성준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변화를 만들어낸 성동일-성준 부자. 성동일은 무뚝뚝한 늦깎이 아빠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재로 좋은 아빠라는 지침이 없던 그는 ‘자상함’과는 거리가 먼 아빠였다. 아이가 바르게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에 야단도 치고 혼도 많이 냈었다. 준이는 그런 아빠를 무서워했고 성격도 소심했었다. 첫 여행에서 숙소로 향하는 길. 다른 가족들은 아빠와 손을 잡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가는 한편, 유일하게 손도 잡지 않은 채 대화 없이 묵묵히 각자 갈 길을 가던 가족이었다. 1년이 지난 지금 아들에게 칭찬도 스킨십도 잘하는 자상한 아빠가 되었다. 준이 역시 아빠에게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장난을 잘치곤 한다. 그렇게 준이는 친구상을 받았다. 아빠와 친구같이 여행 다녔기에 아빠가 주는 상. 그들의 변화를 알기에 어떤 상보다도 뭉클한 상이었다.




배우상ㆍ유기농상 성동일

“위 아빠는 1년 동안 연기를 잘하고, 유기농 음식을 만들어 주었으므로 이 상장을 수여합니다.” 준이가 아빠에게 준 상이다. 인스턴트 보단 한식을 좋아하는 아이. ‘성선비’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 그의 행동은 의젓했으며 식성은 매우 한국적이었다. 아빠가 해주는 김치전을 가장 좋아하며 첫 여행지에서 먹었던 김에 싸먹는 감자가 여행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음식이라던 성준. 아빠의 식성을 그대로 닮았다. 무섭던 아빠지만 가장 사랑하는 존재이며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커서 아빠처럼 멋진 사람이 되어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던 준이.

훌륭한 아들 뒤에는 훌륭한 부모가 있기 마련. 소위 인기 있다는 드라마에는 빠지지 않고 성동일이 나온다. 천연덕스러운 코믹연기에 그의 인생 희노애락이 녹아있다. 가족을 위해 한 해 동안 수고한 아빠에게 주는 아들의 상.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는 아들이 참으로 대견하던 순간이었다.




마지막이 아닌 마지막

영국의 철학자 에드워드 허버트는 “아버지 한 사람이 스승 백 명보다 낫다”라고 말한다.

총 55부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전남 화순 하가마을을 여행하던 당시, 아빠들에게 자전거를 배우던 장면이다. 필자가 7살이던 무렵, 아빠에게 배우던 자전거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뒤에서 잡고 있던 아빠 손을 믿으며 폐달을 밟았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홀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아빠란 그런 존재다. 뒤에서 아이가 넘어질까 노심초사 바라보고 넘어지면 일어나는 법을 가르치는 든든한 존재. 우리 곁을 평생 함께 할 수 없기에 홀로 일어나는 법을 알려주던 사람. 이 프로그램을 보고 어린 시절의 앨범을 펼치게 되었다. 필자가 저 아이들의 나이이던 시절 아빠와 함께 유치원 학예회에서 포크댄스 추던 모습, 낚시하던 모습, 자전거 타던 모습. 사진을 통해 잊고 있던 시절을 회상하며 많이 웃었더랬다. 이렇게 이 프로그램은 필자에게 추억을 선물했다.

여행 마지막 날 아침 “난 오늘이 싫어.”라며 여행의 끝을 아쉬워하던 아이들. 시청자들 역시 이 순수하고 예쁜 아이들을 매주 볼 수 없는 아쉬움은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아빠 어디가>시즌 1은 끝났다. 프로그램은 끝이 났지만, 아이들 인생에 이번 1년은 성장의 과정이자 잊지 못할 추억. 마음 한편에 추억으로 자리 잡아있을 것이다. 사춘기를 지나 아빠라는 존재가 지금보다 멀어질 때 쯤, 꼭 이 날들을 기억하길. 아빠 손잡고 대한민국 곳곳에 추억 한보따리씩 담아두고 왔다는 것을 말이다. 든든한 맏형 민국이, 천사 후, 성선비 준이, 애교 많은 지아, 웃는 모습이 예쁜 준수. 다섯 아이 모두 지금 이 순간을 잊지 않고 예쁘게 자라길 바란다.


[관련 기사]

-사람 사는 이야기
-혼자라는 이름으로 <나 혼자 산다>
-김연아의 마지막 행보, 아디오스 노니노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 당신의 멘탈은 안녕하십니까

$
0
0

마성의 남자, 제인  


 <멘탈리스트>는 CBS에서 방영하고 있는 범죄 수사 드라마로 2008년 시즌1부터 현재 시즌6까지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CBI(캘리포니아 수사국)를 배경으로 살인자를 쫓는 수사물인 <멘탈리스트>는 다른 범죄 수사 드라마와 비슷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범인검거를 하는 데 심리에 집중적으로 주목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두고 있다. <멘탈리스트>의 주인공 패트릭 제인이 바로 이 독특한 드라마를 이끌고 나가는 역할을 한다. 제인은 자신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눈웃음과 능청맞은 농담 던지기, 그러면서도 날카롭게 정곡을 찌르는 관찰력 등으로 여성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제인은 사람의 마음을 잘 읽고, 이를 토대로 사람의 마음을 잘 얻는다.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지고 있어서 몇 마디 대화만 나누고도 그 사람의 행동과 표정을 통해 많은 것을 읽어낸다. 상대방이 차를 마실 때 찻잔을 쥐는 손의 모양, 질문을 던졌을 때 잠깐 드러나는 미세한 표정의 변화 등을 보고 중요한 단서를 찾아내는 능력자다. 한때 그는 자신의 이런 능력을 활용해 영매로 일하며 가벼운 사기를 치던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연쇄살인마 레드 존 사건의 자문을 하던 중 사건과 범인에 대해 방송에서 언급하는 실수를 하고 만다. 그 대가로 아내를 연쇄살인범의 손에 희생당한다. 그 일이 일어난 후부터 제인은 수사국에서 자문위원으로 일하면서 레드 존이라는 연쇄살인마를 잡기 위해 노력하며 자문위원으로 범인 검거에 큰 역할을 하고(시즌6 중반에서 레드존의 실체가 밝혀졌음) 현재는 FBI와 협력하여 수사에 힘쓰고 있다.   

 

멘탈리스트_2.jpg

 
멘탈을 해킹하다


제인은 극중에서 신경언어프로그래밍인 NLP(Neuro-Linguistic Program)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범인 검거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최면요법을 쓰기도 한다. 이런 모든 과정은 실제 수사과정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신경언어프로그래밍이 활성화되어 있거나 학계에서 인정받는 분위기라고 보기 어렵지만 체계적으로 배우고 이를 활용하는 움직임도 있다. 
 

최면이라고 하면 긴 의자에 누워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거나, 사고나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잃었던 기억나게 해주는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도 최면은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어쩌다 채널을 돌리다 본 홈쇼핑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나, 텔레마케팅 전화를 쉽게 끊지 못하고 끝까지 다 듣게 되는 경우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유형의 최면 이외에도 <멘탈리스트>의 제인은 용의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용의자가 스스로 범인임을 자백하도록 유도하거나 감추고 있는 비밀을 알아내는 데 최면을 활용한다. 이를 두고 멘탈을 해킹한다는 표현을 쓴다. 고도의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이 내 멘탈을 마음대로 헤집고 다니며 해킹해서 감춰둔 비밀도 캐내고 무의식 속에 둥둥 떠 있던 나조차도 모르는 일을 끄집어 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마치 해커가 해킹을 하듯 말이다. 
 
타인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엄청나지만 위험천만한 능력 
 

상대방의 마음을 쉽게 읽을 수 있다면 어떤 걸 할 수 있을까? 읽어낸 정보를 토대로 내가 상대방의 마음을 얻어낼 수도 있고 나쁜 의도를 가진다면 상대방을 내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하는데 까지도 이를 수 있다. 신문 기사를 보면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곤 한다.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 말도 안 되는 범죄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부모를 죽이거나 심지어 자식을 죽게 하기도 한다. 이런 일이 모두 최면에 의해 빚어진 것이라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다른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 중 주변에서 그래도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사이비 교주, 사기꾼 등이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내 멘탈을 탈탈 털리는 해킹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할까? 컴퓨터를 관리하는 일과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악성코드를 걸러주는 백신 프로그램을 깔고, 의심되는 자료는 다운로드 하지 않으며, 레지스트리 정리와 메모리 관리를 주기적으로 해줘야 하듯 멘탈을 관리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멘탈을 해킹하는 상대가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어떤 체제나 가치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멘탈을 해커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멘탈리스트>의 제인은 자신의 이런 능력을 범죄자를 검거하는 데 주로 쓰지만 그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능력을 사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능력을 펼치는 제인이지만 그의 무모함과 대책 없는 행동 때문에 벌어진 일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느라 쉴 틈 없는 동료와 상사들이 있기에 그의 능력이 빛을 발할 수 있기도 하다.

 

피할 수 없는  제인의 질문
 

남들은 모두 책상에서 서류 한 번 들춰볼 정신도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무실에서 본인만을 위한 길고 푹신한 소파를 당당히 요구하는 남자, 제인. 그는 긴 소파에 누워야만 비로소 두뇌 회전이 되기 시작한다. 그 소파야 말로 그에게는 업무를 보는 책상이며 컴퓨터인 셈이다. 소파에 누워 두뇌 회전에 필요한 예열을 마친 제인이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는 싱글싱글 웃으며 다가와 “당신의 멘탈은 안녕하십니까?” 라고 말을 건네 온다. 당신은 그 질문에 어떤 답을 할 것인가? 어떤 대답으로 제인과의 대화를 이어갈 것인가?

 

멘탈을 지키자, 수많은 악성코드와 쓸데없는 레지스트리로부터.

 

[관련 기사]

-연재를 시작하며
-범죄 수사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 각종 심리의 보물창고
-<크리미널 마인드>의 리드, FBI 요원은 어떤 사람인가
-살인자만 찾아서 죽이는 연쇄살인마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우리는 과거의 PD수첩을 다시 볼 수 있을까?

$
0
0

“저널리스트가 구조적으로 약자인 쪽에 서있을 때 강자들이 굴복시키려고 한다는 거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그걸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우선 철저하게 사실 확인을 해서 정확한 보도를 해야 하고,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 강자들이 체계적으로 옭아매서 올가미를 씌운다면 , 올가미를 써야 한다. 올가미를 쓰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올가미를 쓰고 싶지 않다고 해서 피하면 그것은 더 이상 저널리즘이라고 할 수가 없는 거다.” (『PD수첩 : 진실의 목격자들』, 북폴리오, 260쪽)
1990년 5월 8일 첫 방송된 MBC <PD 수첩>은 현재까지 983회를 방영한 장수 시사프로그램에 속한다. <르뽀 60>, <뉴스비전 동서남북>, <MBC 리포트>등 80년 대 이후 차츰 틀을 갖춰가던 각 방송사의 심층보도 프로그램들은 KBS <추적 60분>과 MBC <PD 수첩>이라는 각 방송사의 대표적 시사프로그램을 낳은 교두보가 되었다. <PD 수첩>의 경우 종전의 보도 프로그램들이 우선적으로 다루던 정재계의 굵직한 현안뿐만 아니라, 방송사의 보도관행에 따라 소홀히 다루어지던 사회문제들까지도 심층적으로 취재함으로써 폭넓은 시청층으로부터 호평을 받아 왔다. 프로그램의 특성상 취재대상이 된 관계자 혹은 관련 단체들의 항의와 법적 대응에 숱하게 부딪히기도 하였고, 이명박 정부 당시 추진되었던 4대강 사업에 대한 <PD 수첩>의 방영이 잇따라 취소되며 이와 관련한 정부의 외압 의혹이 불거지기도 하였다.

<PD 수첩>이 보도한 방영분 가운데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소재는 5ㆍ18 광주 민주화운동과 종교 관련 문제이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자행되었던 광주학살은 노태우 정부에 이르기까지 ‘광주 폭동’, 혹은 ‘광주 사태’ 등으로 명명되다가 1993년 문민정부에 이르러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복권되었다. <PD 수첩>은 1990년 5월 방영된 ‘1980년, 5월 광주’ 편을 시작으로 ‘80년 5월, 그때 언론은 죽었다’, ‘80년 5월, 이 얼굴들을 아십니까?’, ‘화려한 휴가, 그 못다한 이야기’ 등의 방영분을 통해 잊혀진 광주의 역사를 환기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종교와 관련한 방영분의 경우 1992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어느 기독교 종파의 휴거 소동을 비롯하여 영생교, 신천지, 대형교회 등을 소재로 다루었고 이를 통해 종교라는 허울 아래 감추어진 한국사회의 일그러진 면모를 파헤치고자 하였다. 그 가운데 1999년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목사를 다룬 ‘이단 파문! 이재록 목사 - 목자님, 우리 목자님!’ 편을 둘러싼 소동은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PD 수첩>의 해당 방영분이 목사의 비리와 치부를 다룬 것에 불만을 느낀 교회신도들은 프로그램 방영 수일 전부터 대대적인 항의 의사를 표명하였고 급기야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었던 시각, MBC 방송사의 주조종실로 난입함으로써 프로그램 시작 7분 만에 방영이 중단되는 초유의 방송사고를 일으키게 되었다. 다음 날 주요 언론을 통해 보도된 <PD 수첩>의 방영중단은 프로그램에 대한 전 국민적 관심을 불러 모으게 되었고, 방송사고 다음 날 프라임타임 대에 특별 편성된 <PD 수첩>은 전국 시청률 39.6%라는 경이로운 수치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PD 수첩>은 수많은 시청자들에게 저널리즘의 정도(正道)를 상징하는 프로그램으로 각인되기에 이른다.

<PD 수첩>의 역사를 되돌아보았을 때, 대표적으로 기억될만한 사례가 있다면 그것은 2005년 말 한국사회를 큰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황우석 스캔들’일 것이다. 황우석은 당시 서울대 수의과대학의 교수로서 세계적 권위의 과학잡지인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줄기세포 복제와 관련한 논문을 게재함으로써 일약 국가적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능수능란한 언론플레이와 정치력을 지녔던 황우석은 참여정부 당시 막대한 연구비를 지원받으며 난치병 환자들의 희망으로 행세하였는데, 그에 대해 크고 작은 의혹을 제기하였던 소수의 주장들은 당시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전반에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던 황우석에 관한 맹목적 믿음에 의해 근거 없는 음해로 치부될 뿐이었다. <PD 수첩>이 제기한 황우석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황우석 연구팀이 연구과정에서 기증받은 것으로 발표한 난자의 채취과정 가운데 금전이 개입되었다는 사실과 난자제공자들에게 난자체취의 부작용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부분, 그러니까 연구팀의 윤리적 문제가 첫 번째로 지적된 사안이었고 이와 관련한 <PD 수첩>의 보도는 황우석 지지자들에 의해 거센 항의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맞물려 한 방송사에서 <PD 수첩>의 제작진이 황우석 연구팀의 연구원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추측 보도를 터뜨리며 프로그램에 대한 반대여론은 절정을 치닫게 되었다. 급기야 <PD 수첩>에 대한 광고주들의 광고 중단이 이어졌고 방송사에서는 잠정적으로 <PD 수첩>의 방영을 중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프로그램의 존폐 위기까지도 거론되는 상황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황우석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했던 여론의 추이는 황우석 연구팀과 오랜 협력관계였던 노성일 미즈메디 병원 이사장의 충격적인 기자회견으로 커다란 반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황우석이 각종 논문에서 발표하였던 배아줄기세포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골자였다. 이 기자회견을 계기로 성역에 가까운 존재로 추앙받던 황우석에 대한 국가적 맹신은 뿌리부터 뒤흔들리게 된다. 방송사 전체의 위기로까지 번진 <PD 수첩>에 대한 공격적 여론은 이 기자회견을 계기로 고개를 숙이게 되었고 <PD 수첩>은 곧바로 황우석과 관련한 2차 보도 즉, 황우석의 연구결과 조작의혹을 후속편으로 방영하며 기사회생하게 된다. 황우석에 대한 <PD 수첩>의 의혹제기는 서울대의 자체조사와 검찰발표에 의해 상당 부분 진실로 밝혀지게 되었다. ‘황우석 사건’을 통해 <PD 수첩>의 ‘PD 저널리즘'은 다시 한 번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지만, 이는 불편한 진실을 애써 외면하려 하였던 대한민국의 어두운 일면이 드러난 사례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2014년,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현재까지도 방영을 이어나가고 있는 <PD 수첩>은 여러 해 전부터 예전만 같지 못하다는 평을 듣기 일쑤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검찰 비리, 소망교회 등을 취재하며 오랫동안 <PD 수첩>을 대표하였던 최승호 PD는 2011년 타 프로그램의 외주관리 담당자로 발령받아 프로그램을 떠나게 되었다. 2012년 MBC 총파업 당시 <PD 수첩>의 제작진들은 방송사로부터 파업의 책임을 물어 징계 처분을 받았고, 프로그램의 기존 작가진들은 모두 해고를 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PD 수첩>이 종래의 성역 없는 비판의식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프로그램의 이름만을 유지한 채 관성적으로 방영되고 있는 <PD 수첩>이 다시 한번 약자들의 신문고 역할을 자임하게 되기를 바라본다.


[관련 기사]

-요즘 대세는 융합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화, 문성근에서 김상중까지
-찰리 채플린에서 구봉서로
-김형곤 최양락 김병조, 시사코미디의 시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시대 청춘들의 현주소

$
0
0
2014년의 새로움도 잠시 어느새 2월이 되었다. 지겹도록 춥던 겨울의 끝자락이자 졸업시즌이기도 하다. 어느 누군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반짝거릴 20대의 문 앞에서 설레어 하고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대학 생활을 마치고 사회라는 무시무시한 큰 산 앞에 서있다. 그러한 사회에도 쉽게 발을 들일 수 없는 요즘. 각종 매체 마다 취업난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는 날이 없을 정도이다. 그토록 갈망하던 ‘대학’과 어렵다는 ‘취업’은 이 나라 청춘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다. 최근에 있었던 설날을 예로 들어봐도 알 수 있다. 한 매체에서 설문조사한 결과, 기분 좋은 설날 되레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에 사용하지 말아야할 금지어 1위가 “취직은 됐니?”, 5위는 “00이는 공부 잘하지?, 대학은 어디…?”로 발표되었으니 말이다.

OECD 국가 중 교육열 1위 대한민국. 지금 우리 사회에서 대학의 이름은 한 사람의 ‘성공’의 여부를 따지는 중요한 수단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이 땅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뛰어놀아야 하는 어린 나이 때부터 ‘명문대학’에 가기 위해 혹독한 선행학습을 시작한다. 남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시작된 소리 없는 전쟁. 아이들의 밝은 미래가 기대된다기보다 우리나라의 미래가 걱정된다. 높은 교육열의 뒷면은 참으로 참혹하다. 극단적이지만 한창 좋은 나이인 중고등학생의 아이들의 자살 소식을 접할 때마다 너무 안타깝다. 교육열 1위와 청소년 자살률 1위가 공존하는 이 나라가 심히 걱정스럽다.


그토록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에 가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일거라 믿는다.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은 그런 환상을 갖고 고된 고3을 견딜 것이다. 불행히도 현실은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대학생활과는 매우 거리가 먼 모습이다. 이러한 이 시대 대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있다. EBS “다큐 프라임”에서 방영한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늘 많은 관심을 받았던 교육대기획 시리즈였다. 6부작으로 ‘어메이징 데이Ⅰ,Ⅱ’ ‘인재의 탄생Ⅰ,Ⅱ’ ‘말문을 터라’ ‘생각을 터라’ 편으로 나누어 방송되었다.

내레이터가 말한 것처럼 “지금 내 곁에 우리 옆에 있는 친구들의 삶이고 대학생들의 진짜이야기”였다. 그런 점에서 대학생이 대학생을 촬영했다는 점은 참으로 괜찮은 설정이었다.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에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기 쉽지 않은가. 인터뷰를 할 때도, 자취방을 촬영할 때도 이만한 설정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처럼 ‘어메이징 데이’는 전국의 10개 대학교, 44명의 대학생이 6개월간 기록한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대학생들의 공부부터 돈, 연애, 취업까지 폭 넓게 다루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우리 사회의 큰 문제인 공부와 취업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 시절 마냥 20살이 되고 싶었다. 겨울이 끝나고 따뜻한 봄이 오듯 찬란하게 빛날 거라고, 만물이 소생하듯 모든 일이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어서야 교복입고 다닐 때가 좋을 때라는 어른들의 말은 틀리지 않다는 것을 몸소 느낀다. 모든 이들의 로망은 하나 둘 깨지고 대학생으로 산다는 것은 생각과는 매우 다른 아름답지 않은 날들의 연속이다. 학교생활을 얼마나 성실히 했는가의 척도인 학점은 기본이며 밤을 새도 모자란 과제, 남들과 차별화 된 자신을 위해 차곡차곡 쌓아야 하는 스펙까지. 수많은 경쟁자들 속에서 남달라 보이기 위해 타인의 노력의 배가 필요하기에 그들의 경쟁은 날로 치열해진다. ‘아싸’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다. 아웃사이더의 줄임말로 무리와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사람을 일컫는다. 취업이 힘든 요즘, 자발적으로 아싸를 자청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 누구와도 관계를 끊은 채, 취업을 위해 혼자 공부하고 혼자 밥 먹는다.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시간. 1분1초가 급박한 그들에게 잠시의 친구들과의 어울림은 크나큰 사치일 뿐이다. 사회로 가기 위한 과정에서 사회성을 잠시 포기한다는 것. 참으로 웃긴 실상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스펙 쌓기에 바쁜 요즘의 대학생들. ‘탄탄한 스펙 = 취업보장?’이라는 의문을 품은 채 ‘인재의 탄생’이 방영되었다.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진정한 인재상. 수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 참된 인재가 되기 위해 인재 분야 전문가들과 5명의 멘티가 6개월 동안 그 해법을 풀어 나갔다. 정말로 드라마틱한 과정이었다. 중간에 포기하겠다던 이부터 만들어진 인재와 참 된 진짜 인재사이의 괴리를 느끼는 이도 있다. 다섯 청춘들의 노력과 좌절 그리고 결실이 있기까지 그들은 진정한 인재를 자신의 변화를 통해 경험했으며 스펙에만 연연하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놀랍게도 가장 큰 변화는 그들 스스로의 마음가짐에 있었다. 자신이 만든 보이지 않는 벽에 갇혀 도전에 겁내던 멘티는 인재가 되어가는 과정의 마무리쯤에야 활짝 웃어 보였다. 그 순간 어떤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었다.


이렇듯 영상 한 장면 한 장면마다 비춰진 청춘들의 진솔한 이야기는 안방의 시청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또한 내레이터의 주옥같은 대사는 드라마의 명대사보다 진한 여운을 남겼다. “사람들이 말하는 요즘의 청춘. 그것은 진실이 아니기에 우리들의 이유 있는 아픔과 눈물이 또 다른 우리들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이 영상을 띄웁니다.”라고 시작하던 1화. 김C의 차분한 목소리는 청춘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으며 듣는 이의 마음 깊숙이 날아왔다. 처음 시작할 때 던진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를 시작으로 6화의 마지막에서도 같은 물음을 던지며 끝이 났다. 나는 누구인지. 잘 살아가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모든 청춘들을 비롯한 청춘이었던 사람들에게도 좋은 물음이 되었다.
“젊음이 먼지 아나? 젊음은 불안이야.
 막 병에서 따라낸 붉고 찬란한 와인처럼,
 그러니까 언제 어떻게 넘쳐 흘러버릴지 모르는 와인 잔에 가득한 와인처럼 에너지가 넘치면서도
 또 한편으론 불안한 거야.
 하지만 젊음은 용기라네. 그리고 낭비이지.
 비행기가 멀리 가기 위해서는 많은 기름을 소비해야 하네.
 바로 그것처럼 멀리 보기 위해서는 가진 걸 끊임없이 소비해야 하고 대가가 필요한 거지.
 자네 같은 젊은이들한테 필요한 건 불안이라는 연료라네.”
20살 문턱까지 정말 열심히 달려왔다. 진짜 달리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그 달리기는 아마 오래오래 끝나지 않을 것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포기 하고 싶은 순간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단단해져야 하며 단단해지고 있는 중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청춘이라 불리 우는 그들의 달리기는 끝나지 않았다.


[관련 기사]

-사람 사는 이야기
-혼자라는 이름으로 <나 혼자 산다>
-김연아의 마지막 행보, 아디오스 노니노
-<아빠 어디가>시즌 1 종료, 성동일 아빠로서의 성장 1년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SVU(성범죄 특수 수사대)가 시즌15까지 장수하는 이유

$
0
0

SVU(Special Victims Unit)성 범죄 특수 수사대는 미국 NBC에서 방영중인 드라마로 현재 시즌 15까지 제작되어 방영중인 장수 인기 드라마다. LAW & ORDER의 스핀오프로 제작되었지만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어 오랜 시간 동안 계속 시즌을 거듭하며 제작되고 있다. 이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그만큼 성범죄 발생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꾸준히 높다는 이야기가 된다.

SVU는 뉴욕(뉴저지 포함)에서 벌어지는 성 범죄를 다루고 있다. 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을 검거하는 내용을 다룬다는 점에서 다른 범죄 수사 드라마와 비슷하지만 범인을 검거하고 나서 범인에게 형량을 구형하는 과정까지 다루며 그 과정의 비중이 낮지 않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오랜 시간 이 드라마에서 형사 올리비아 벤슨 역할을 맡아 맹활약을 펼치는 배우는 마리스카 하지테이다. 올리비아 벤슨은 피해자들을 가슴으로 이해하고 어루만지며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캐릭터다. 올리비아 벤슨의 아버지는 강간범이다. 어머니가 대학생 때 강간을 당했고 그로 인해 올리비아 벤슨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런 아픔 때문에 올리비아 벤슨은 성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바치는 형사의 길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서라면 위장 잠입을 하기도 하고 범인 앞에 기꺼이 미끼 역할을 맡기도 하며 이 과정에서 큰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겉모습만 보면 강인해 보이는 여자 형사 캐릭터지만 피해자들의 처절한 아픔 앞에서는 한없이 여려지는 감성을 가지고 있다. 성범죄의 경우 수사 과정에서 피해 여성들이 2차 피해를 입는 경우가 더러 발생한다. 범죄 발생 내용 및 과정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반복적으로 진술해야 하는데 남자 수사관에게 이러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진술하다 보면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끼기도 한다. 여성 수사관이 함께 동석하거나 여성 수사관이 전담하는 경우도 있지만 인력의 한계 및 기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모든 성범죄 수사가 이렇게 진행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런 점들을 잘 알고 있는 올리비아 벤슨은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최대한 또 다른 상처를 주지 않고 수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올리비아 벤슨은 자신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강간한 범죄자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뿐만 아니라 강간으로 인한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정신적인 상처를 크게 입은 어머니에게 양육되면서 학대 받았던 불행한 성장과정의 아픔을 이겨내고 성 범죄자, 강간범을 검거하면서 상처를 극복해 나간다. 처지를 비관하면서 인생의 소중한 기회를 포기하거나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는 대신 자신의 지독한 아픔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은 굉장히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 아픔으로 인해 자신의 내면을 마모시키거나 자괴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아픔을 극복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강간범의 딸로 태어난 것은 결코 올리비아 벤슨의 선택이 아니며 그것이 올리비아 벤슨의 인격을 침해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이렇게 자신의 아픔을 극복하며 이를 직업으로 삼아 고군분투 하는 캐릭터는 다른 범죄 수사물의 캐릭터에서도 볼 수 있고 의학 드라마 등에도 이와 유사한 캐릭터들이 있다.

시험관 아기로 태어난 경우를 제외하고 인간은 모두 성행위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성을 드러내는 일에 굉장히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흔히 하는 이야기로 남성이 하루 중 섹스에 대해 생각하는 횟수가 몇 번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성은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대놓고 이야기하기에는 민망한 면이 있어 은밀하게 감추어야 하는 사생활로 인식되어 있다.


SVU의 엄청나게 많은 에피소드를 보면 인간이 성에 대해 이렇게도 탐욕스러울 수 있는지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이 모든 에피소드가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드라마 대본이길 바라는 마음도 생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제 사건을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다. 마이클 잭슨이 휘말렸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연상시키는 에피소드도 있고, 마이클 타이슨이 성 범죄 피해자로 출연하기도 하는 등 SVU와 현실의 연결고리는 깊고 단단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드라마가 현재 시즌 15까지 장수하고 있는 셈이다.

남성이 여성에 가하는 성적인 폭력 뿐 아니라 동성 간의 성폭력, 성인의 아동에 대한 성폭력 등은 한 인격체를 잔인하게 짓밟는 끔찍한 범죄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신문 지면에 실리는 기사를 보면 ‘술을 마시고 저지른 데다 초범임을 참작한다.’며 가벼운 형량을 선고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예전보다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피해자에게 범죄 행위 발생을 유도한 거 아니냐는 질책까지 더해져 또 한 번 상처를 주는 일도 반복된다. 우리나라의 법에서 강간, 특수강간은 각 10년, 15년의 공소시효를 갖는다. 뉴욕이 사실상 강간, 납치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없앴다는 점과 비교하자면 아쉬움이 남는다. 어렵게 용기를 내 범죄자를 고소하고 실형까지 언도받게 해더라도 형량이 너무 짧아 출옥 후 재 범죄를 벌이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어 성폭력 피해 범죄 신고율은 여전히 낮은 추세다.


[관련 기사]

-연재를 시작하며
-범죄 수사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 각종 심리의 보물창고
-<크리미널 마인드>의 리드, FBI 요원은 어떤 사람인가
-죽일만한 사람만 골라 죽이는 살인범은 무죄?
-<멘탈리스트>, 당신의 멘탈은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판타지가 현실이 되는 곳

$
0
0
‘국민 오빠’, ‘국민 남동생’, ‘국민 여동생’ 등 전 세대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 연예인에게는 ‘국민’이라는 말과 더불어 ‘가족 호칭’ 수식어가 자연스럽게 붙는다. 이는 대중들이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연예인과의 친밀감을 형성해 나가려는 방식이다. 그렇지만 대중과 연예인 이 둘 사이의 친밀감은 판타지로 치부된다. TV속 세상과 현실 속 세상은 물리적으로 분리되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MBC every1 <우리집에 연예인이 산다>는 연예인을 일반 가정집에 가족 구성원으로 데려오면서 TV속 세상과 현실 속 세상의 벽을 허물어 버렸다.

가족은 한 사람이 사회에서 쓰고 있는 역할 가면을 벗고 본래의 모습을 서로에게 보일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집단이다. 그렇지만 편안하기에 상호간의 설렘이 부족하고 자칫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집단이 될 수도 있다. <우리집에 연예인이 산다>는 이러한 가족집단의 특성을 잘 집어내어 내용을 진행한다. 한 가정에 연예인을 가족 구성원으로 투입시켜 2박 3일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하면서 편안함만이 가득했던 가족 집단에게 낯선 설렘을 전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판타지에만 존재했던 연예인과 가족이 되어 노래방을 가고, 잠을 자고, TV를 보고, 밥을 먹으면서 대중의 판타지는 현실이 된다.

시청자들은 기존 가족 집단과 새로 가족으로 투입된 연예인이 직접 부딪히며 만들어가는 소통의 과정을 유심히 바라본다. 이는 화면 속에서 자신과 똑같은 일반인이 연예인과 가족으로 살아가는 모습의 또 다른 판타지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우리집에 연예인이 산다>가 판타지를 현실로 만들었지만 이는 이내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판타지를 느끼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한다. 그렇기에 시청자들은 일어날 법한 일 같은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화면 속 상황에 몰입하게 된다.


‘일어날 법한’이라는 말처럼 <우리집에 연예인이 산다>에서는 연예인이 투입된 새로운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보여준다. 외식을 하며 대화를 나누고, 놀이기구를 타며 추억을 쌓는 것이 전부이다. 타 리얼 프로그램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미션으로 대표되는 외부의 개입을 없애는 대신 연예인과 일반 가족구성원과의 어우러지는 생활을 그대로 그려냄으로써 자연스러움을 극대화 시켰다. 이 점은 연예인과 일반인이 미션을 수행하느라 허둥거리는 모습보다는, 연예인이 대중과 일상을 공유함으로써 진심으로 그들의 가족구성원이 되도록 만들었다. 배우 김지석이 스스럼없이 남동생을 껴안아 잠을 깨우고 세수도 하지 않고 동네 마트에 시장을 보러가는 행동처럼 말이다.

<우리집에 연예인이 산다>는 일반인 가족과 연예인의 특별한 조합에서 출발한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연예인들을 그들의 실제 가족과 다른 환경의 일반 가정과 연결시킨다. 남자 형제만이 있는 배우 김지석을 딸이 많은 가정과 연결시키고, 아버지를 일찍 여읜 개그우먼 안영미를 듬직한 아버지와 남자형제가 많은 가정과 연결시킨다. 가수 이정은 콩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연예인들을 실제 그들에게 결핍된 환경에 적응하며 새로운 가족 구성원의 역할을 연기하기 보다는 진짜 가족이 되기 위해 적응한다. 난감해하면서도 새로운 환경에 맞춰가는 모습은 또 다른 흥미를 이끌어 낸다.


하지만 <우리집에 연예인이 산다>의 주된 감성 코드는 감동코드이다. 이는 이 프로그램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출연진들은 헤어짐이 아쉬워 서로 눈물을 흘린다. 2박 3일 동안 연예인과 일반 가족이 나눈 정이 깊어 봤자 얼마나 깊겠냐는 반문이 나올 수 있지만, 그들의 눈물은 방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했다면 충분히 이해간다. 그 눈물은 짧은 시간이지만 가장 사적이고,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서 지내면서 온전히 일상을 공유했고, 그들이 진짜 새로운 가족 집단을 이뤘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일 것이다.

미국 작가 펄벅은 이렇게 말했다. “가족은 정신적인 영양을 제공해주는 대지이다.” 펄벅이 말하는 ‘가족’의 중요성을 예능으로 풀어낸 프로그램이 <우리집에 연예인이 산다>라고 생각한다. ‘가족 예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가족을 키워드로 한 많은 예능 프로그램 중에서도 <우리집에 연예인이 산다>가 영원히 멀 것만 같았던 대중과 연예인 그 둘 사이의 진짜 ‘소통’의 모습을 전달하며 진짜 ‘가족’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소소한 감동과 연예인이 일반인 곁에 머무는 판타지를 느끼고 싶다면 MBC every1 <우리집에 연예인이 산다>를 시청해보기를 권한다.


[관련 기사]

-연재를 시작하며
-<히든 싱어>, 시즌1보다 강해진 시즌2
-2013년 대한민국 예능을 정리한다
-청소년들의 진짜 이야기, <유자식 상팔자>
-생고생 예능의 진화, <Let's go(古) 시간탐험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O 카이, 동방신기 유노윤호, 샤이니 태민의 공통점

$
0
0


일주일에 책 한권씩 읽기, 인생 최저 몸무게 찍기, HSK 자격증 따기, 국가고시 한 번에 붙기. 필자의 올해 계획 중 일부이다. 지금까지의 중간점검을 해보자면 이상무. 가끔 여러 유혹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다행히 잘 뿌리치고 있다. 작심삼일이란 누구에게나 오는 고비를 잘 넘기고 작심일년 어쩌면 그 이상이 되기까지 오늘도 노력 중이다.

누구나 새해가 되면 새로운 계획을 하나, 둘 세우고는 한다. 다짐을 하기까지 많이 생각하고 망설이며 새로운 시작에 대해 마음이 들떠있다. 그런 마음이 무색하게도 작심삼일로 야심찬 계획이 무너지는 경우가 두루 있다. 계획을 해내느냐, 중도 포기하느냐 그 차이는 무엇일까? SBS 스페셜에서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일만 시간의 법칙’이란 답을 얻어냈다.


MAGIC NUMBER ‘10000’

왜 많은 숫자들 중 일만 일까? 이미 오래전부터 ‘일만 시간의 법칙’은 꽤 유명한 법칙이었다.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말콤 글래드웰은 자신의 책 『아웃라이어』에서 자기 분야에서 1만 시간 동안 노력한다면, 누구나 아웃라이어(상위 1%의 성공한 사람)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첫 번째 예가 비틀즈다. 비틀즈는 평범한 고등학교 록 밴드 시절에 독일 함부르크로 초대를 받았으며 그 곳에서 하루 8시간의 연습을 했다. 그렇게 그들의 연습시간을 추정해보니 1964년까지 12,000시간이라는 대단한 시간이 나왔다. 세계 최대 갑부라고 회자되는 빌게이츠는 어린 시절 컴퓨터 앞에서 하루 8시간동안 보냈다.

“당신이 항상 정기적으로 하는 일이 바로 당신 자신이다”-아리스토텔레스

모차르트, 비틀즈, 강수진, 김연아. 뛰어난 재능으로 인정받는 그들의 성공은 과연 재능만으로 가능했을까? 그들의 이면에도 MAGIC NUMBER가 존재한다. 그들 모두 1만 시간이 넘는 연습량을 소화했다. 단순히 ‘천재니까 그 자리에 올랐겠지.’ 하고 생각하는 건 그들의 피나는 노력의 1만 시간을 무시하는 꼴. ‘천재’에 ‘꾸준한 노력’은 필요조건이다.

이렇듯, 천재라 불리는 이들은 타고난 재능보다도 노력의 대가를 제대로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10,000시간. ‘꾸준함’을 바탕으로 땀과 노력이 곁들여져야 완성되는 긴 시간이다. 하루 3시간씩 10년 동안 노력해야 이루어지는 매우 값진 시간. 힘들게 산 정상에 올라가 “야호”하며 힘껏 소리 내어 외친다. 여태껏 해왔던 노력이 함축된 그 고함은 건너편 산에 부딪친 뒤 돌아온다. 마치 너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는 의미의 메아리로. 이렇듯 정성을 다한 시간들은 반드시 헛되지 않은 결과로 돌아온다.


<SBS 스페셜 - 작심 1만 시간>은 많은 아웃라이어들 중 소녀들의 로망 아이돌의 일상을 살펴봤다. 무대 위 그들의 멋진 퍼포먼스는 무대 뒤에서의 엄청난 연습량이 뒷받침하고 있다. 대세 아이돌 EXO의 카이, 데뷔 10주년을 맞은 동방신기의 유노윤호, 누나들의 로망 샤이니의 태민. 이 셋의 공통점은 소문난 춤꾼. 스케줄이 없는 쉬는 날엔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실로 가서 연습에 매진한다는 그들. 가수로 성공하기 위해 지나온 연습생 생활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1만 시간을 훨씬 넘게 연습에 매진했다고 한다. 그 고된 연습의 시간이 있기에 그들의 현재의 위치는 당연하다.

젊은 나이에 1만 시간의 법칙을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 있다면, 열정만큼은 어느 젊은이 못지않은 한 60대 의사가 있다. 50대부터 시작한 외국어 공부와 몸매 관리로 현재는 각종 외국어 자격증과 몸짱이 된 사람. 시간이 없어 시도하지 못한다는 말을 가장 이해할 수 없다던 그는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기에 좋은 인물이었다. 밤늦게까지 학원가를 다니며 외국어 공부를 하고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단어를 외우던 그의 모습에서 1만 시간의 법칙은 여전히 성립했다.

여러 시청자들에게 1만 시간의 법칙이 그들의 삶에 키포인트가 되길 전환점이 되길 바라며 이 다큐멘터리는 끝이 났다. 많은 이들의 새해 다짐이 흐릿해졌을지도 모르는 지금. 이 시점에서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현재도 1만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했다. “저는 오늘도 이렇게 노력하며 보내고 있어요. 당신은요?” 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그들을 보며 시청자 그들 스스로의 삶을, 앞으로의 삶을 생각하게끔 했다.

‘마음을 단단히 하다’라는 의미의 작심. 마음을 단단히 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괜히 작심삼일이란 사자성어가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당신은 미래를 위해 지금 어떠한 현재를 보내고 있는가? 시계 바늘은 오늘도 열심히 움직인다. 바늘의 수많은 움직임들 사이에서 지금 우리는 훗날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누구나 같은 시간을 살아간다. 그 속에서 우리는 시간을 죽이기도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만들기도 한다. 만일 당신이 작심삼일로 끝낸 새해 계획이 있을지라도 다시 시작하기에 늦지 않았다. 부디 이 시간들이 헛되이 사용되지 않기를 바라며 작심 1만 시간이란 마법과도 같은 주문을 우리 삶에 외쳐본다.


[관련 기사]

-사람 사는 이야기
-혼자라는 이름으로 <나 혼자 산다>
-김연아의 마지막 행보, 아디오스 노니노
-<아빠 어디가>시즌 1 종료, 성동일 아빠로서의 성장 1년
-이 시대 청춘들의 현주소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사랑스러운 그녀들이 돌아왔다

$
0
0
일단, 사랑스럽다. KBS <인간의 조건> ‘화학제품 없이 살기’ 에피소드에 나온 그녀들의 민낯은 물론 모든 모습이 사랑스럽다. 단순히 ‘사랑스럽다’라는 수식어로 색조 화장을 지우고 ‘민낯’을 과감히 공개한 그녀들의 용기를 칭찬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들의 민낯공개를 칭찬하기보다는, 그녀들이 연예인과 방송인으로서 껄끄러울 수 있는 핸디캡을 유쾌하게 풀어가는 긍정적인 모습을 칭찬하고 싶다.


이번 <인간의 조건> ‘화학제품 없이 살기’는 그 동안 <인간의 조건>이 다뤘던 주제 중에서도 어려운 과제에 속한다. 우리 생활 곳곳에 화학물이 첨가되지 않은 물건이 없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비누, 샤워용품, 샴푸, 치약, 옷 등 생활필수품들에도 화학물이 숨어 있다. 이러한 생활필수품들을 사용할 수 없다는 핸디캡은 ‘보여주는’ 직업을 가진 6명의 <인간의 조건> 여성 멤버들에게는 큰 도전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옷에도 화학 물질이 들어있어 순면 옷만을 입어야 했고, 천연 치약을 만들기 전 죽염과 손으로 양치질을 해야 했다. 21세기에서 볼 수 없는 풍경대로 생활해야하는 그녀들의 불편함은 방송으로 굳이 보지 않아도 얼마나 심했을지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녀들은 솔직하고 유쾌했기에 그러한 불편함을 적극적으로 즐겼다. 천연재료로 스킨과 로션을 만들어냈고, 공방에 들러 식물 수세미로 칫솔도 직접 제작했다. 흑설탕으로 지인들의 집도 청소했고, 밀가루로 깨끗한 주방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에는 천연치약과 샴푸까지 만들어냈다. 그렇게 그녀들은 체험 기간 동안 생활 속 불편함을 일상 속 새로운 정보를 발견하는 새로운 재미로 변주시켰다.

불편함을 재미로 변주시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여성 멤버들의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그녀들의 빛나는 팀워크였다. 특히 박은영 아나운서는 생방송을 앞두고도 민낯으로 방송을 진행할 수 있다는 당당함을 보여주었고, 모든 멤버는 박은영 아나운서의 방송을 위해 힘을 합쳐 천연 화장품에 대한 모든 정보를 얻어 직접 방송용 메이크업을 해냈다. 이렇게 그녀들은 서로 뭉쳐 힘든 도전을 이어나갔다.


이번 ‘화학제품 없이 살기’ 에피소드가 빛났던 이유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는 <인간의 조건> 프로그램의 방향과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최근 사회에서는 성장만을 제1의 목표로 삼으며 달려온 결과로 나타난 양극화 현상을 줄이려는 노력이 일어나고 있다. 노력의 일환으로 ‘조합’이나 ‘공유’의 개념들이 사회에서 조금씩 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개인적으로 미래 사회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제1의 조건은 ‘공동체’라는 개념의 성립이라고 생각하는데 <인간의 조건> 여성 멤버들은 그러한 공동체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었다. 화학제품 없이 살기라는 미션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며 생활하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는 내내 흐뭇했다. 미래사회에서 필요한 인간의 조건이 있다면 서로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상호 도움을 주며 함께 생활해나가는 그녀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기에 유쾌하면서도 뜻 깊었던 그녀들의 과제 체험기는 그녀들의 건강한 민낯만큼이나 사랑스러웠다. 예능 프로그램의 제1목적은 ‘웃음’ 이지만, 그 웃음을 기반으로 그 위에 우리의 생활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더 나아가 앞으로의 삶의 모습까지 생각하게 해주는 매력을 가진 <인간의 조건>의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


[관련 기사]

-연재를 시작하며
-2013년 대한민국 예능을 정리한다
-청소년들의 진짜 이야기, <유자식 상팔자>
-생고생 예능의 진화, <Let's go(古) 시간탐험대>
-<우리집에 연예인이 산다> 판타지가 현실이 되는 곳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 전혜빈이 아름다운 이유

$
0
0
2000년대 초 스튜디오 예능이 유행하던 시절 많은 스타들이 그들의 무명시절과 신인시절을 거쳐 갔던 프로그램들이 있다. 필자의 기억 속 그 시절을 떠올리면 떠오르는 연예인이 한 명 있다. <강호동의 천생연분>의 “이사돈”. ‘24시간 돈다.’라는 의미로 3인조 여성 걸그룹 ‘LUV’의 멤버 전혜빈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던 별명이자 캐릭터였다.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는 넓은 스튜디오 안에서 빙글빙글 돌고 또 돌았었다. 그녀의 첫 모습이라 기억되는 이 시절은 배우가 되는 길에서 꽤나 큰 장애물이어서 트라우마라고 하지만, 그렇게 그녀는 시청자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정글의 법칙

2년이 넘도록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정글의 법칙>. 스타들로 이루어진 오지 원정대라는 시도가 새로웠다. 현대 문물과 단절된 오지에 가서 생존을 위한 그들의 모습을 담았다. 당장 먹기 위해 사냥을 하고 불을 피우는 것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는 손가락하나 까딱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들이 그 곳에서는 오랜 시간은 물론이거니와 매우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김병만의 지휘 아래 이루어지는 치열한 생존게임. 인간의 본능의 일부인 식욕을 위해서라도 그들은 언제나 움직여야했다. 그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실수는 안타깝기도 했으며 실소를 터뜨리게도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시즌이 변화하면서 여러 연예인들이 출연했다. 그들 중, 시청자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추성훈, 오종혁, 전혜빈, 광희. 병만 대장을 도와 멋진 팀워크를 자랑했던 출연진이었다. 최근, 100회를 맞아서 그들이 깜짝 등장해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특히, 전혜빈과 이영아의 대결구도는 보는 이들을 즐겁게 했다. 여태 나온 여성 멤버들 중 그 두 배우는 특히나 용감한 배우였다. 전혜빈이 하차 한 뒤, 많은 시청자들이 그녀의 부재를 아쉬워했는데 그녀와 함께 이영아까지 용감한 여배우 둘이나 병만족에 합류 한 것이다. 100회 특집에 걸맞게 풍성한 잔치가 된 셈이다.

사실 여태껏 전혜빈의 부재는 꽤나 컸다. 보통 고정관념속의 여배우의 성격과는 다른 털털한 성격과 오지의 처음 보는 생물을 맨손으로 잡는 용감함까지 겸비하기란 쉽지 않으니 말이다. 그녀는 <정글의 법칙>으로 언제나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렸고 시청자 역시 멋진 그녀를 향해 박수를 보내고는 했다. 그녀가 하차한 뒤 예능에서 전혜빈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은 잠시, 그녀가 멋지게 다시 다른 프로그램을 통해 돌아왔다.


심장이 뛴다

매주 화요일 밤마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울고 웃게 하며 많은 생각들을 떠오르도록 만드는 <심장이 뛴다>. 6명의 연예인이 직접 일선 소방서에서 근무를 하며 생기는 일을 다루고 있다. 직업 특성상 자주 접하는 긴박한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긴급 상황은 물론이며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언제나 달려가는 모습을 시청자인 필자 역시 마음 졸이며 봤다. 몇 초라는 찰나의 순간은 한 사람 뿐만 아닌 다수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적인 시간이다. 언제 어디에서 일어날지 모르는 사고에 대비해 늘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바로 출동하는 고되지만 멋진 직업, 소방대원. 순간순간의 집중과 환상적인 팀워크는 위급한 상황에 더욱 빛을 발한다.

그래서 이 <심장이 뛴다>는 ‘감동’이 가미된 프로그램이다. “생명”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먼 이야기가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이기에 더욱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생명을 다루기에 와닿는 슬픔이 배로 크며, 감동 역시 배로 다가온다.

그녀가 <정글의 법칙>이후에 고정으로 출연을 결정했던 프로그램이었다. 이미 <정글의 법칙>으로 검증된 그녀의 열정은 <심장이 뛴다>에 꼭 필요한 출연자임을 증명했다. 기대에 부응해서 단연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한다. 6명의 출연자들 중, 다섯 남자들을 제외하고 홀로 여성이다. 그녀는 다섯 남자출연진들 사이에서 다른 이들에 뒤지지 않는 체력으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또한 남자 출연진이 무서워하는 일들을 거리낌 없이 해내고는 해서 그들을 당황시키기 일쑤였다.


단지 용감해서 그녀가 빛이 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성별의 특성상 비교적 여자에 비해 감정내색을 덜 하며, 조금은 덜 섬세한 남자들 사이에서 그녀의 따뜻한 마음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다. 여느 때처럼 급박했던 상황. 출동을 나갔던 곳에서는 한 할아버지가 자살을 시도하고 있었다. 다행히 할아버지의 목숨을 구했지만 구조 후 서럽게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시던 할아버지. 그 곁에서 한참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위로해드리던 그녀. 그뿐이 아니라 구조 된 독거노인 할머니를 집까지 모셔다 드린 그녀는 잠시 동안 할머니의 말동무를 해드리며 손톱을 깎아주고는 했다. 그녀의 수많은 따뜻한 모습들에 마음이 짠해지고는 했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척척 맡은 일을 해내는 그녀는 ‘여배우 전혜빈’이 아닌 ‘전혜빈 대원’이었으며, 심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구조자에게 그녀는 때로는 손녀처럼, 때로는 딸처럼 그 누구보다 그들을 먼저 생각했다.

두 프로그램을 통해 그녀는 정말 큰 변화를 겪었다. 그 전보다 더욱 많은 팬이 생겼음은 물론, 이제 그녀라면 믿고 보는 이들 까지 생겼으니 말이다. ‘여자 김병만’, ‘구조여신’은 그녀에게 참으로 잘 어울리는 별명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그녀를 중심으로 외적인 변화이다. 사실 그녀는 ‘이사돈’ 시절부터 늘 열심히 였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아직 필자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그녀의 옛날 모습은 언제나 최선을 다하며 웃는 얼굴의 그녀였으며 지금의 모습 역시 다름이 없다. 가수에서 배우까지 그녀 인생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며 힘든 과정이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언젠가부터 그녀는 모두가 인정하는 멋진 여배우가 되어 있었다. 앞으로도 그녀의 출연작들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는 그녀가 신인시절부터 발 벗고 나서 노력하던 아름다운 모습이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기억 되어있음이 아닐까. 또한 그녀의 변함없는 열정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이유들이 그녀가 언제 어디에서든 빛이 나는 이유이다.


[관련 기사]

-혼자라는 이름으로 <나 혼자 산다>
-김연아의 마지막 행보, 아디오스 노니노
-<아빠 어디가> 시즌 1 종료, 성동일 아빠로서의 성장 1년
-이 시대 청춘들의 현주소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EXO 카이, 동방신기 유노윤호, 샤이니 태민의 공통점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자기 자신마저 극복한 사람, 김만덕

$
0
0
김만덕, 그녀는 왜 위인일까?

현재 5만 원 지폐 도안의 인물은 신사임당이다. 5만 원 신권 도안을 공모할 2009년 당시, 후보명단에 오른 언니들로는 신사임당 외에 유관순, 소서노, 선덕여왕, 허난설헌, 김만덕이 있었다. 각각 인물의 삶과 업적이 현대사회에 시사하는 바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오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만덕 초상 [출처 : 제주 김만덕 기념관]

우리는 어떤 사람을 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처럼 예술적, 학문적 업적을 이루어내야 위인일까? 소서노와 유관순처럼 나라를 세우거나 독립운동을 해야 위인일까? 선덕여왕처럼 공주로 태어나 여왕이 되어 자신의 정치력을 발휘해야 위인일까? ‘여성’ 위인이라는 점에서, 일부 보수적 시각에서 신사임당을 평가하듯 자신의 업적도 있으되, 원만한 가정을 꾸리고 남편과 자식까지 성공시켜야 위인일까? 그렇다면 앞서의 경우에 다 해당되지 않는 김만덕, 이 언니는 왜 위인일까. 우리는 이 언니의 어떤 면에 감동해야 할까.

김만덕의 생애를 정확히 재구성하는 것은 어렵다. 전해지는 기록도 후에 덧붙여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종합해 보면, 김만덕은 1739년 제주에서 양인 신분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고아가 된 후 기녀에게 의지하여 살았기에 기적에 이름이 올라 관기가 되었다. 20세가 지나 관아에 억울함을 호소하여 양민 신분을 회복했지만 만덕은 결혼하지 않고 상업에 종사하여 거상이 되었다. 그러나 늘 검소하게 살았다. 그녀가 50대 중반이던 1792년부터 제주에 흉년이 들어 수천 명의 사람이 굶어 죽었다. 몇 년째 흉년이 계속되자 1795년, 조정에서 구호미를 보냈지만 바다를 건너 오는 도중 수송 선박이 침몰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만덕은 전 재산을 털어 육지의 곡식을 500여석 사들여 십분의 일은 자신의 친족을 살리고, 나머지 450여석은 구호 식량으로 쓰라고 관아로 모두 보냈다. 이듬해 만덕의 선행이 알려지자 정조는 상을 주고자 관을 통하여 그녀의 소원을 묻는다. 만덕은 한양과 금강산에 가 보고 싶다고 답한다. 정조는 내의원 의녀반수 벼슬(평민이 임금을 알현할 수는 없었기에 벼슬을 하사해야 했으나 만덕은 내명부에도 외명부에도 속한 여인이 아니었기에 당시 현실적으로 줄 수 있는 여성의 관직은 이뿐이었음)을 준 후 만덕을 만나고 금강산 관광을 시켜준다. 제주로 돌아오기 전, 채제공이 <만덕전>을 지어 준다. 1812년, 만덕은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제주에서 만덕은 의녀(義女)이자 만덕할망으로 불리며 존경받고 있다.

<정조알현 상상도> [출처 : 제주 김만덕 기념관]

5만 원권 위인 후보에 올랐던 2009년까지만 해도 김만덕은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음 해, <거상 김만덕>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그녀에 대한 책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만덕이 더 널리 알려지는 것은 좋지만, 이 책들이 나는 불편하다. 김만덕에 대한 정확하고 구체적인 기록은 없는 상황에서, 그녀 인생의 빈 곳을 작가의 상상으로 채우다 보니 책마다 저자의 시선에 따라 그녀에 대한 평가가, 그녀 삶의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자기계발서에서 그녀가 ‘성공한 여성 CEO’ 로 평가받는 것이 나는 매우 당황스럽다. 돈 많이 벌었다고 다 성공한 것이고 위인인 것은 아니잖은가. 물론 대부분의 책과 초중교 교과서에 실린 글은 김만덕의 나눔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김만덕, 이 언니의 위대한 점은 과연 무엇일까? 더 나아가, 진정한 위인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세 겹의 한계를 극복한 사람

books.jpg

그녀의 위대성은 신분, 성별, 변방 출신이라는 세 겹의 한계를 스스로 뛰어 넘은 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원래 양민이었든 아니었든 그녀는 관기였고, 당시 그녀의 신분은 엄연한 천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성인이 된 후 스스로 관아에 진정해서 자신의 본래 신분을 회복했다. 어떻게 하여 기생 신분에서 벗어나게 되었는지, 그 구체적 과정은 기록에 없다. 조선시대 관기란 관청에 소속된, 국가의 재산이었다. 단지 불쌍히 여겨 쉽게 기안에서 이름을 빼주는 경우는 없다. 그렇다면 만덕은 기생이 된 후, 자신의 신분 회복을 위해 몸값을 준비하는 등 구체적인 준비를 했음에 틀림없다. 바로 이 점이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지 않고 스스로 개척한 만덕의 위대함이다. 더구나 그녀는 양반의 첩이 되는 식으로 남에게 의존하여 기생 신분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움직여 신분의 한계를 극복했다.
<정조 실록>은 그를 ‘제주의 기생 만덕’이라고 적어 그가 실제 기적에서 삭제되었는지 의문을 갖게 하고 있다. 조선시대 기생은 노비와 마찬가지로서 한 번 기적에 오르면 천민이라는 신분적 굴레에서 신음해야 했다. 기생이 양반과 관계해 아이를 낳아도 종모법에 따라 아들은 종이 되고, 딸은 기생의 신분을 세습해야 했다. 기생이 속신(贖身)할 수 있는 경우는 양반나 부유한 양인의 소실이 되어 속가(贖價)를 납부했을 때 뿐이었다. (중략) 관청에 속한 기생들은 대개 15세부터 기녀 명부에 올라 50세가 되어야 비로소 기적에서 빠지는데 이때도 딸이나 조카 등을 대신 기적에 올려야 했다. -『이덕일의 여인열전』 (pp.466~467)
만덕, 그녀는 여성이었다. 알다시피, 봉건시대의 여성이란 지금 여성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았다. 남성의 그늘에 있지 않고서는 기본 의식주가 불가능했던 시대에 만덕은 기적에서 몸을 뺀 후에도 혼인하지 않았다. 경제적 자립을 택했다. 남성의 일을 대신 할 머슴을 두고, 스스로 객주를 차려 주인이 되었다. 당당히 성공한 거상이 되었다. 여기에서 그녀의 위대성은 큰 돈을 모아 경제적으로 성공했다는 것만이 아니다. 당시로는 여성의 직업이라 생각조차 못했던 객주에 도전할 생각을 했다는 발상 자체와 조선 후기 변화하던 경제 흐름을 읽고 한발 앞서 행동에 나섰다는 것이 그녀의 위대함이다. 이렇게 그녀는 성차별의 굴레도 넘었다. 하지만 그 성공 과정에서 만덕은 아마 기존 제주의 상권을 장악한 객주, 상인들과 경쟁하느라 고생했을 것이다.
그녀는 제주도 바닷가인 산지에서 객주를 벌였다 하며 객주를 벌인 지 1년만에 ‘천냥 부자’가 되었다 한다. 물상객주는 남의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업을 하기도 하고 상인에게 잠을 재워주고 밥을 파는 여관업을 하기도 하면서 물종의 도매업을 벌였다. 내륙의 객주는 마포 등 물종이 많이 드나드는 포구에 자리를 잡고 영업했다. 제주도는 조선 후기에 들어 한때 미역, 양태, 진주 등 제주에서 나는 해산물이나 물종을 육지 사람들에게 팔거나 직접 배에 싣고 나가 전라도 해남, 강진 등 연안지방을 중심으로 팔고, 대신 양곡과 옷감을 비롯해 화장품 등 사치품을 수입해 왔다. 제주도는 금싸라기라 할 정도로 농토가 절대 부족한 탓에 언제나 양식이나 옷감이 달렸던 것이다.
만덕이 여자의 몸으로 물상객주를 벌였다면 애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사의 아웃사이더』 (p.77)
다음으로 만덕, 그녀는 제주 사람이었다. 당시 제주는 조선의 변방으로 중죄인의 유배지이자 말 목장으로 이용되었고, 감귤과 전복 등을 바치라는 조정의 과한 공납 요구에 시달렸다. 주강현의 『제주기행』을 보면, 제주도를 ‘조선 시대 플랜테이션’이라 표현했을 정도이다. 노동력 유출을 막기 위해 제주도민의 출륙을 금지하는 법이 있었기에 살기 힘들거나 관의 횡포에 시달려도 바다 건너 다른 곳에 가서 새 인생을 시작할 수도 없었다. 현재 우리의 추측 이상으로 당시 제주는 소외된 주변부였고, 제주 사람은 중앙 정부의 강한 억압을 굴레처럼 짊어지고 살았다. 그러기에 정조가 만덕에게 소원을 물었을 때 그녀가 한양에 가서 임금님을 뵙고 금강산 유람하기를 청했던 것은 국법에, 제주 사람의 운명에 저항하는 놀라운 발언이었다. 이렇게 그녀는 변방 출신이라는 굴레도 넘었다.
만덕의 이 같은 발언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즈음 제주 여인들은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이 있어 어떠한 경우라도 육지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본디 제주는 땅이 척박하고 물, 가뭄, 바람 등 삼재(三災)로 인해 살기 어려운 땅이었기 때문에 많은 도민들이 섬을 떠나 육지에 가서 살고자 했다. 그 결과 인조 7년(1629)에 제주도민의 출륙을 엄금한다는 명이 떨어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여자들의 출륙은 더욱 엄하게 금지되었다. 즉 제주 여자는 바다를 건너 뭍으로 나갈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뭍의 남자와 혼인을 해서 그곳으로 옮겨가 사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러므로 만덕의 발언은 국법을 어기는 것이자 금기를 깨뜨리는 행위였다. -『꽃으로 피기보다 새가 되어 날아가리』 (p.213)


<탐라순력도>의 <감귤봉진>. 감귤과 귤 껍질을 진상하는 그림. [출처 : 제주시 감귤박물관]


마침내 자기 자신마저 극복한 사람

만덕, 그녀는 신분, 성별, 출신지 모두 주변부에 속했던 사람이다. 이렇게 여러 겹의 주변부라는 굴레를 지고도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했다는 점은 참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여성 위인 열전에 등장하는 많은 여성인물들이 왕실이나 상류 계급 출신으로 봉건시대의 성차별은 받았지만, 만덕에 비하면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점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렇다.

그렇다, 만덕은 제주도의 여성으로 관기 출신 상인이었다. 이렇게 만덕의 신분과 살아온 과정에 비추어 만덕의 일생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인 제주도민 구휼을 보면, 그녀의 특이한 점이 보인다. 물론 전 재산과 바꾸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린 점은 두말할 것 없이 그녀의 가장 위대한 점이다. 그런데 만덕의 선행은 기근이나 흉년 시에 곡식을 기부한 다른 부자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아니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고아출신으로 억울하게 관기가 되었다가 양민 신분을 회복했다. 아마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관에 대한 로비 활동이 있었을 것이고, 이때 금전은 그녀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후 객주가 되어 육지와 제주를 연결하는 도매업에 나서면서, 늘어가는 재산은 그녀의 전부가 되어 그녀를 보호했을 것이다. 만덕은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다. 늙어서 양자를 두었을 뿐이다. 역경을 이겨내고 자기 힘으로 천금을 모은 부자들이 그렇듯, 그녀는 의식주의 사치도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돈만 모았다. 그런 그녀에게 재산이란 믿고 의지할 유일한 대상인 동시에, 바로 자기 자신인 셈이었다.

그런데 만덕은 재산을, 그런 자기 자신을 던졌다. 홀몸으로 보내야할 노후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동안 고생하며 모아온 전 생애를 내놓았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계기는 문헌에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난 50대 후반의 이미 성공한 만덕이 이런 결심을 했다는 것이 놀랍다. 자수성가한 부자들은 오히려 나이 들어갈수록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고생해 봐서 아는데…”, “나도 겪어봐서 아는데…”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타인을 무능하다고 질타하는 성공한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들은 개인의 노력과 자기 계발을 강조할뿐, 사회 시스템의 문제점을 바로 보지 못한다. 자신은 이미 성공했기에. 힘든 상황에서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노력해서 성공했다고 여기기에. 그러나 만덕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성공에 자만하여 타인의 불행에 눈멀지 않았다.

심노승은 <노래기생 계섬>이라는 그의 작품에서 만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제주에 있을 때 만덕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들었다고 하면서, “만덕은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해 돈을 보고 따랐다가 돈이 다하면 떠나는데, 그 남자가 입은 바지저고리까지 빼앗으니 그녀가 가지고 있는 바지 저고리만 수백 벌이 되었다”고 하였다. 또 “육지에서 온 상인 중 만덕 때문에 패가망신한 이들이 잇달았는데 이렇게 해서 그녀는 제주 최고의 부자가 된 것”이라고 하였다. 심노승에 의하면, 만덕은 가증하고 허위로 가득한 탐욕스러운 인물이다. 그러나 만덕에 대한 기록 중 부정적인 내용은 현재 오로지 이 문건 하나가 있을 뿐이다. -『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 (p.205)

채제공의 <만덕전>에는 “그는 재산을 늘리는 데에 가장 재능이 있어 시세에 따라 물가의 높고 낮음을 짐작하여 사고팔기를 계속하니, 몇십 년 만에 부자로 이름을 날렸다.”라고만 적혀 있지만, 위의 인용 부분에서 짐작할 수 있듯, 관기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한 재물을 모으거나 객주업을 하면서 매점매석 등을 통해 부를 늘리는 과정에서 만덕은 그릇된 방법으로 남에게 모진 언행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대개 그렇게 모질게 움켜진 재산은 그 사람의 사고방식을 바꾼다. 인성을 바꾼다. 곧 사람이 아니라, 재산이 사람을 움켜쥐게 된다. 그런데 만덕은 자신이 모은 재산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마지막 위대한 점이 바로 재산 축적만을 하고 살아온 자기 자신의 지난 세월을 이겨낸 점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점이 가장 위대한 점인지도 모른다. 마침내 자기 자신마저 극복한 점.

김만덕 묘비 [출처 : 제주 김만덕 기념관]

우리는 시대나 환경, 개인적 한계를 극복하고 성공한 인물을 존경한다. 그러나 그런 분들이 말년까지 일관된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자신의 한계를, 굴레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 형성된 자신의 인생관이 나이 들어 어느덧 아집과 욕심이 되어 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본다.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나는 노력해서 이만큼 성공했는데 왜 요즘 젊은 것들은 이 좋은 세상에서 이 모양 이꼴이냐”며 잘못된 어른 행세를 하는 사람들도 많이 본다. 한때 존경받던 인물이 노후에 자기가 일생을 통해 이룩한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계속 영향력 있는 인물임을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 추하게 변절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이는 꼭 위인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자연스레 어느 정도 이룬 것, 가진 것이 조금은 있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인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결국 어떤 인물이 위인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은 우리는 평생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떻게 성장해야할까, 하는 문제가 된다.


진정 자유로운 존재, 만덕

그러니 만덕, 이 언니를 보라. 그녀가 기생출신이고 제주출신이어서 지명도가 낮아 지폐에 등장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녀의 위대함이 없어지지는 않으니, 신분과 지역과 성별이라는 삼중의 억압을 깬 그녀를 보라. 세상의 굴레에 저항하며 평생 힘들게 쌓아온 것을 세상에 흔쾌히 내놓은 이 언니를 보라. 마침내 자기가 쌓아온 재산과 인생과 자기 자신마저 극복하여 진정 자유였던 여자, 만덕. 이 언니를 보라. 임금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을 때, 재산이나 권력이 아닌, 자신의 경험을 풍부하게 해 줄 무형의 소원을 말한 그 지혜를 보라.

어느 정도 가진 것과 명예가 생기면 사람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고 추해진다. 그때, 진정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당신은 당신이 그동안 이룩한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자신이 있어야 한다. 그동안 내가 극복하고자 싸우느라 얽매인 것과 다른 가치를 꿈꿀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만덕, 이 위대한 언니처럼.

“속량하고 세상에 나가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
목사는 만덕이 울음을 그치도록 달래면서 물었다.
“돈을 벌고 싶습니다.”
“돈이라? 여자가 돈을 벌어서 무엇에 쓰겠느냐?”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겠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섬을 하나 사서 착한 사람들만 모여서 사는 하늘나라 같은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소설 『섬의 여인 김만덕, 꿈은 누가 꾸는가?』 (p.184)




[관련 기사]

-모두 불행한 건 아닌 중세여성, 모두 행복한 건 아닌 현대 여성
-레이디 고다이버, 이 언니를 보라
-스스로 장기판에서 뛰어 내려 자신의 삶을 산, 왕비 안네
-복수를 위해 공주가 아닌 여전사가 된 여자
-평생 자신과 갈등하며 여행한 사람, 이사벨라 버드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타인의 평가에서 자유로웠던 여자,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
0
0
유럽 최고의 미녀, 엘레오노르

카를 오르프가 작곡한 <카르미나 부라나(보이른의 노래)>는 장엄한 합창으로 유명하다. 이 곡의 가사는 11~13세기에 구전되다 라틴어와 독일어로 기록된 중세 음유시인의 노래집에서 따 왔다. 그래서 현대 시기인 1936년에 작곡되었지만 가사를 통해 중세 서유럽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 중 10번째 곡의 가사는 이렇다.
Were diu werlt alle min                           온 세상이 내 것이라해도
von deme mere unze an den Rin          바다에서 라인까지
des wolt ih mih darben,                          난 다 버릴 수 있으리
daz diu chunegin von Engellant           영국 여왕이
lege an minen armen.                            내 팔에 안겨만 준다면.

-<카르미나 부라나>중 10번째 곡 ‘Were diu werlt alle min’
아마 중세 서유럽인들은 영국 여왕을 유럽 최고의 여자로 여겼던 것 같다. 이 영국 여왕이 바로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이다. 현재 프랑스 남서부에 있었던 아키텐 공국을 상속한 여공작 엘레오노르는 첫 결혼으로 프랑스 왕비가, 이혼하고 재혼하여 영국 왕비가 되었다. 타고난 미모로 가는 곳마다 추문을 뿌린 여인으로 유명하다. 도대체 얼마나 그녀가 아름다웠기에 유럽의 뭇 남성들이 온 세상보다 그녀를 차지하기를 더 원한다는 노래까지 지어 불렀을까?


에드먼드 블레어 레이튼의 [출처 : 위키피디아]

여기 한 장의 그림이 있다. 영국 화가인 에드먼드 블레어 레이튼의 라는 중세 상상화이다. 레이튼은 이 그림의 주인공을 정확히 누구라고 지적하지 않았지만, 기본적인 역사 상식이 있는 서구인들은 대개 이 그림을 보고 엘레오노르와 그의 아들 사자왕 리처드를 떠올린다고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서구인이 엘레오노르의 외적 이미지에 대해 갖는 인식을 또 한번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늘 예찬만 받는 것은 아니다. 12세기 인물인 그녀는 사후 8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서구 역사에서 루머의 여주인공으로 유명하다.

엘레오노르 아키텐(1122~1204)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엄격한 관습이 지배하던 중세시대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남프랑스 공작령 아키텐의 상속녀이자, 프랑스 왕비였던 엘레오노르는 남편 루이 7세와 함께 십자군 원정에 나섰다. 원정기간 중에 그녀는 숙부인 안티오크 통치자 레이먼드 푸아티에 및 살라딘 술탄과 염문을 뿌렸다. 루이 7세와 이혼한 후에는 연하인 헨리 플랜태저넷과 결혼했는데, 이 연하남편의 숙부와도 관계를 갖고 있었다.
엘레오노르는 남편이 총애하던 정부 로자먼드를 독살했을 뿐만 아니라 헨리 왕과 결혼함으로써 영국왕비가 되었으며, 사자왕 리처드와 무지왕 존을 낳았다. 나중에 엘레오노르는 질투와 권력욕에 사로잡혀, 이 두 아들이 아버지에게 반역하도록 부추겼다. 엘레오노르가 죽은 후에는 영국과 프랑스 왕가 사이에 복잡한 상속권 문제들이 발생했다. 이것은 결국 영국-프랑스 분쟁의 씨앗이 되었고, 백년전쟁(1337~1453)으로까지 이어졌다. _ 「역사의 오류, <왕비가 된 매춘부>편(pp.94~95) / 베른트 잉그마르 구트베를레트 지음 / 열음사」


위 인용부분은 엘레오노르에 대한 기존 루머를 요약해서 소개한 부분이다. 엘레오노르는 많은 역사서에 비중있게 등장한다. 기본적인 영국사와 프랑스사는 물론, 십자군 전쟁사와 기독교회사까지. 흥미와 가십 위주의 대중역사서에는 더욱 많이, 더욱 편파적인 시각으로 평가되어 등장한다.


지역감정으로 생긴 편견

아키텐의 여공작 엘레오노르(Eleanor of Aquitaine, 프랑스어: Alienor d’Aquitaine)는 1122년 경에 태어났다. 아키텐 공작과 푸아티에 백작을 겸했던 아버지 기욤 10세의 큰딸로 태어난 그녀는 남동생이 사망한 후 현재 프랑스 영토의 1/3에 달하는 광대한 영지의 상속녀가 되었다. 아버지 기욤 10세는 죽음이 다가오자 고민했다. 자신이 죽은 후, 딸이 영지를 노린 야심가들에게 납치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기욤 10세는 딸의 후견인으로 자신의 상위 주군인 프랑스 왕 루이 6세를 지명했다. 기욤 사후, 루이 6세는 기뻐하며 자신의 아들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를 결혼시켰다. 1137년, 루이 6세 사망 후 아키텐의 여공작인 엘레오노르는 15세란 어린 나이에 프랑스 왕비까지 되었다.

프랑스 서남부 대부분을 차지하던 당시 엘레오노르의 영지는 프랑스 왕령보다 더 넓고 풍요로운 지역이었으며 화려한 궁중문화를 지닌 곳이었다. 파리 중심의 북부 프랑스와 여러 모로 달랐다. 지금도 남부와 북부 프랑스 사이의 문화 차이는 매우 큰데, 방송도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의 차이는 상당했을 것이다.


프랑스 남부와 북부의 문화적 구분선 지도 [출처 :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음유시인과 궁정문학을 후원했던 남프랑스에서 자라나서 낭만적이고 정열적인 성격을 지닌 엘레오노르는 파리의 결혼 생활이 타고난 기질에 별로 맞지 않았다. 중세 음유 시인으로 이름 높았던 기욤 9세의 손녀로 태어나 호방하고 기사다운 강한 남자를 이상적인 남자로 여기며 성장한 그녀에게는 남편 루이 7세가 성에 차지도 않았다. 차남으로 태어난 루이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서 교육받다가 형이 사망하자 왕세자 노릇을 배우기 시작했기에 반은 수도승 같은 면이 있었다. 성격도 엘레오노르에 비해 나약하고 소심한 편이었다. 루이 7세는 아름다운 그녀에게 반한 반면, 그녀는 대놓고 ‘나는 수도승과 결혼했다’며 열정이 없는 결혼생활의 불만을 토로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엘레오노르의 과감한 언행은 루이 7세와 주변의 고위 성직자들, 북부 프랑스 궁정인들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결함이라기보다, 성장한 환경과 문화의 차이에 따라 생긴, 일종의 지역 감정의 문제였다. 그러나 그녀는 성적으로 방종하고 드세고 사치스런 남프랑스 여자로 일방적으로 매도당한다. 루이 7세와 이혼하고 헨리 2세와 결혼하여 영국 왕비가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잉글랜드의 대중들은 프랑스 출신 왕비보다 잉글랜드 출신인 왕의 정부 로자먼드를 오히려 더 호의적으로 보았다. 로자먼드가 병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엘레오노르가 독살 혐의를 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점에서 설명된다.



14세기 무렵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왼쪽은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의 결혼식, 오른쪽은 십자군 참전으로 떠나는 루이


2차 십자군 원정 실패의 희생양

엘레오노르가 매도당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십자군 원정 당시의 행적때문이다. 1147년, 그녀는 루이 7세와 함께 제2차 십자군 원정에 참가한다. 화려한 차림새의 귀부인들을 동반한 그녀는 가는 곳마다 물의를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녀는 프랑스 왕비 자격으로 남편의 종군에 동반한 것이 아니라 아키텐 여공으로서, 여러 봉건 영주 중 한 제후의 자격으로 성전에 참전함을 내세웠다. 당연히 남성 영주들만 참가하는 작전 회의에도 참가해 자기 주장을 펼쳤다. 엘레오노르는 이전에 프랑스 궁정에 있을 때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과감히 행사하여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와 쉬제 대수도원장 같은 고위 성직자들에게 비판을 받은 적이 많았다. 하지만 친정에서 아버지에게 남녀차별 없는 최고의 교육을 받고 음악과 문학은 물론, 사냥과 승마까지 즐겼던 그녀에게 이런 정치와 군사 방면의 참여는 당연한 것이었다.

십자군의 목적지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도착한 엘레오노르는 작은 아버지인 안티오크 공작 레몽의 편을 들어 그에게 유리한 작전을 고집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숙부와 조카딸 사이를 불륜관계로 몰아갔다. 거듭된 전투 참패에도 불구하고, 지휘권을 지닌 루이의 무능은 묻혀졌다. 사실, 루이 7세의 십자군 참전 원인은 프랑스 국내 전쟁 중 자신이 벌인 학살과 방화에 대한 속죄였다. 그 전쟁은 엘레오노르 여동생과 유부남 백작과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교황의 파문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했다. 교회 입장에서 보면 프랑스 내는 물론 십자군 원정지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의 근원은 전부 엘레오노르였던 셈이다. 이는 자신들의 군사적 무능은 절대 인정할 수 없는 귀족 전사들이 보기에도 그랬다. 성스런 목적을 걸고 단행했기에 신의 가호를 받아 당연히 성공하리라 믿은 십자군 원정의 실패에 대한 희생양을 찾는 사람들의 눈에 띈 실패의 원흉은 엘레오노르였다. 숙부인 레몽과는 물론, 이슬람 적장인 살라딘과도 간통한 여자, 성전을 실패로 몰고 간 여자. 엘레오노르는 이런 식으로 온 서구 기독교 사회의 비난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현대에 와서도 십자군전쟁사에 등장하는 엘레오노르는 늘 부정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프랑스의 왕 루이 7세는 군주만큼이나 수도승이 되었으면 훌륭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 당시의 기준에 비추어 보아도 거의 도가 지나칠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아내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도덕관념이 의심스러운 것으로 평판이 난 혈기왕성한 여인이었다. 그들은 잘 맞지 않는 부부였다. 루이 왕은 최근의 교전 중 어느 교회를 불태움으로써 그곳을 피난처로 삼았던 많은 민간인들을 죽인 사건으로 교황 에우게니우스에게 도덕적으로 약점이 잡혀 있었다. 아마도 고의가 아니었겠지만 그 잔악한 행위는 루이의 명성을 심하게 손상시켰으므로 왕은 그것을 만회하고 싶었다. 더 필요한 설득은 현재 웅변력이 절정에 이르러 있는 베르나르두스 드 클레르보가 해 주었다. _ 「십자군 전쟁(pp.236~237), W. B. 바틀릿 지음 / 한길사」


두 남편을 두 번 배신했다고들 하지만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면서 엘레오노르와 루이 부부 사이는 점점 나빠졌다. 엘레오노르는 이혼을 요구했다. 물론, 기독교가 지배하던 당시 중세 유럽 사회에 이혼이란 없었다. 혼인 무효가 있었을 뿐이다. 혼인 무효는 결혼식은 올렸지만 실질적 결혼 생활, 즉 성관계가 이뤄지지 않았던 경우나 둘이 근친 사이였을 때나 가능했다. 엘레오노르는 둘이 로베르 1세라는 프랑스 왕을 공통 조상으로 둔 9촌 관계였다는 사실을 내세워 혼인 무효를 요구했다. 그런데 이런 식이면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유럽의 모든 왕실은 거의 다 근친혼 관계가 된다. 이 정도 촌수의 근친혼은 현실적으로 그리 문제되는 관계는 아니었기에, 근친혼으로 인한 혼인 무효는 주로 아내가 지겨워진 남성들이 새 여자를 맞아들일 때에 쓰던 방식이었다. 후대의 영국왕 헨리 8세가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과 이혼할 때처럼. 그러기에 근친혼을 내세운 이혼 무효를 남편이 아닌 아내, 엘레오노르가 먼저 제기했다는 것은 당시 기준으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여기에서 그녀에 대한 악의적 루머가 또 퍼져 나갔다. 엘레오노르가 불륜에 빠져 남편을 배신했다는.

그러나 엘레오노르는 소문의 내용처럼 작은 아버지 레몽과의 불륜 때문에 루이에게 이혼당한 것도 아니고, 욕정을 맘껏 발산하기 위해 이혼을 원했던 것도 아니다. 이혼 무효 판결이 나기 전, 이미 레몽은 사망한 후였으며 이 이혼은 부부 쌍방이 다 원했기 때문이었다. 둘 사이 왕위를 계승할 아들 없이 딸만 둘이었기에 루이 역시 새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이혼을 원했다. 이혼하면 엘레오노르의 아키텐 영지를 프랑스에 통합할 기회는 잃게 된다며 일부 신하들은 루이를 말렸지만, 루이는 그보다 새 결혼과 아들 상속자를 더 원했다. 1152년 둘은 이혼에 합의했다. 대주교들은 두 사람이 근친 관계에 있기에 혼인이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엘레오노르는 프랑스 왕비의 관을 내려놓고 자신의 영지, 아키텐으로 돌아갔다.

엘레오노르는 혼인 무효 판결을 받은 지 8주만에 헨리 2세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헨리는 프랑스 내에서는 앙주 백작 겸 노르망디 공작이었으며, 정복왕 윌리엄의 손녀인 어머니 마틸다를 통해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도 갖고 있었다. 이제 아키텐 여공작인 엘레오느르의 영지까지 합쳤으니 헨리는 프랑스 왕을 능가할 영지와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혼하자마자 재혼을 한, 그것도 전 남편의 최대 적이 될 수 있는 헨리를 선택한 그녀를 비난했다. 당시 19세였던 헨리는 엘레오노르보다 11세 연하였기에, 어린 남자를 성적 매력으로 홀려 차지했다며 그녀를 비난했다. 그녀 사후에도 프랑스인들은 프랑스 내 영지를 들고 영국으로 시집가서,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 전쟁의 실마리를 제공했다며 오래오래 그녀를 비난했다.


1154년 앙주 제국의 영토를 표시한 지도 [출처 : 위키피디아]

그러나 이런 비난은 역사적으로도 터무니없다. 당시 중세 유럽의 영주들은 민족이나 국가 관념 없이, 일종의 지방 군벌들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실제 무력이 없는 영주의 영토는 이웃 영주들의 먹잇감일뿐이었다. 특히, 그 영지의 주인이 여성인 경우는 더 그랬다. 무력을 갖지 못한 상속녀에 대한 납치와 강간에 의한 결혼과 영지 합병은 흔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혼 후 자신의 영지로 돌아오던 엘레오노르는 두 명의 영주에게 각각 두 번 납치당할 뻔하기도 했다. 위험에 처한 그녀는 자신을 보호해줄 힘이 있는 남편을 원했고, 첫 결혼과 달리 이번에는 자신의 남자 고르는 기준에 의거, 스스로 헨리를 선택했다. 먼저 사절을 보내 결혼을 제의한 것은 엘레오노르였다. 1152년 5월 18일. 둘은 결혼했다. 엘레오노르 입장으로서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루머는 끊이지 않았다. 엘레오노르가 루이와 아직 결혼생활을 유지하던 중에, 파리를 방문한 조프루아 백작과 간통했으면서도 그의 아들 헨리와 결혼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1154년 10월 25일, 드디어 헨리는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이후 13년 동안 잉글랜드 왕비 엘레오노르는 5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낳았다. 이중 아들 둘이 후에 잉글랜드의 왕이 되는 사자왕 리처드와 존 왕이다. 헨리와 엘레오노르의 애정으로 결합한 부부 사이는 막내아들 존을 낳은 후 거의 끝났다. 엘레오노르는 헨리와 떨어져 프랑스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 와서 지냈다. 헨리는 잉글랜드에서 정부와 지냈다. 이후 부부는 정치적 필요성으로 결합한 관계였다. 아니, 오히려 정적 사이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엘레오노르는 아들들이 부왕 헨리에 대해 일으킨 반란을 지원하다가 남편의 포로로 잡혀 1173년부터 헨리 2세가 죽는 1189년까지 잉글랜드 곳곳의 감옥에 유폐되었다. 그녀는 이제 질투에 눈멀어 아들들을 부추겨 반란을 사주한, 또다시 남편을 배신한 여자가 되었다.

사실상, 알리에노르의 운명은 어쩌다 남자 형제가 없다 보니 영지의 상속녀가 된 귀족 여성들 대다수의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들이 지닌 권력을 차지하려는 야심이 탐욕을 부채질했고, 구혼자들은 경쟁을 벌였다. 저마다 그녀들의 영지에 정착하여 그녀들이 낳아줄 아들들이 성년이 되기까지 그녀들의 유산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자식을 낳을 수 있는 한 결혼을 하고 재혼을 하게 마련이었다. 알리에노르의 운명에서 예외적인 것이 있다면 이혼과 반역이라는 두 가지 사건뿐이다. 이 사건들이 흥미로운 주된 이유는 이 여인이 왕비였고 고위 정치에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역사가들의 수많은 기록들이 남아, 당시 여성의 조건이 어떠했던가를-보통의 경우 이런 것은 역사가의 관심 밖이다-다소나마 엿보게 한다는 데 있다. 실제로 우리가 알리에노르에 대해 아는 것은 극히 적다. _ 「12세기의 여인들 1, <알리에노르>편(pp.32~33) / 조르주 뒤비 지음 / 새물결」


그녀는 자신의 것을 지켰을 뿐

그녀가 헨리와의 사이에 8남매나 낳았다고 해서 부부 사이가 아주 좋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 귀족 여성들은 가임 능력이 있는 한, 끊임없이 임신하여 후계자를 생산해야만 했다. 출산 후 자신의 아이를 스스로 젖 먹여 키우지 않고 유모를 두는 이유가 바로 그렇다. 남편과 가문에 더 많은 아이를 낳아 주기 위해 얼른 몸을 다시 임신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야했기 때문이다. 출산한 아내의 몸이 회복되면 남편은 임신을 위해 동침했다. 임신 사실이 확인되면 태아를 위한 금욕이란 핑계 하에 남편은 곧장 정부의 품으로 가곤 했다. 헨리 역시 그랬다. 헨리와 엘레오노르 부부의 첫 아이와 헨리의 사생아는 한 달 간격으로 태어났다. 결코 삽십대의 노련한 엘레오노르가 십대 순진한 소년을 성적으로 유혹해서 이루어진 결혼이 아니었다. 헨리는 유명한 바람둥이였다. 그는 결혼 생활 내내 외도를 일삼고 곳곳에 사생아를 낳았다. 막내인 존이 태어난 이후 엘레오노르가 헨리와 떨어져 자신의 프랑스 영지에 가 있었던 것에 대해 사람들은 남편의 정부 로자먼드에 대한 질투 등을 원인으로 말하지만, 헨리의 외도는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굳이 이때에 남편에게 실망해서 자신의 영지로 돌아갈 이유는 없다. 배신은, 결혼 초부터 남편 헨리가 먼저 했다.

그렇다면 엘레오노르가 아들들의 반란을 도운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남편의 사생아인 조프리를 궁정에 데려와 자신의 아이들과 같이 최상으로 교육시킨 엘레오노르였다. 이로 보아 알 수 있듯, 그녀는 자신의 것만 지키면 남편의 삶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었다. 반란은, 헨리가 엘레오노르와 아들들의 몫까지 차지하려 들었기에 생긴 일이었다. 헨리는 아들들을 편애했으며 엘레오노르와 이혼을 검토했다. 새 결혼을 통해 새로운 후계자를 낳아 그에게 영지를 물려 주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프랑스 내의 헨리의 영토 중에는 엘레오노르가 결혼할 때 가져온 영지가 있지 않은가. 엘레오노르는 자신의 것을 절대 빼앗길 수 없었다. 특히 그녀는 가장 사랑하는 세째 아들 리처드에게 자신의 영지를 상속시키고 있던 참이었다. 엘레오노르의 영지는 그녀 사후에 남편 헨리가 아니라 그녀가 지정한, 그녀가 낳은 상속자에게 계승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그녀는 아키텐의 주인은 남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나이 들어 판단력이 흐려진 부왕이 장성한 아들들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권력을 잘못 행사하거나, 편애하여 상속하거나, 새 부인과 그 소생에게 권력을 넘겨주려고 하다 생기는 반란은 역사상에 흔하다. 엘레오노르만 아들을 부추겨 남편에게 반역했다고 욕 먹는 것은 부당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부왕 헨리 2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아들들을 부추긴 자는 바로 프랑스 왕이었으니, 결국 헨리 2세 자신이 만든 적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볼 때 엘레오노르의 반역은 남편에 대한 배신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것을 당연히 지키려 했을 뿐이다.



헨리 2세의 초상화 [출처 : 위키피디아]


그녀의 빛나는 노년기

1189년 헨리 2세가 사망했다. 당시 프랑스의 영지에 있던 리처드 1세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처음으로 내린 명령은 잉글랜드에 구금되어 있던 모후 엘레오노르를 풀어주란 것이었다. 동시에 리처드는 대비가 된 엘레오노르에게 자신이 잉글랜드에 도착하여 정식으로 대관식을 올릴 때까지 잉글랜드의 통치를 맡겼다. 드디어 엘레오노르는 오랜 유폐 기간을 마치고 자유를 얻었다. 풀려난 여인은 기죽은 노파가 아니라 온갖 경험을 통해 더욱 지혜로워지고 성숙해진 여왕이었다. 엘레오노르는 아들 리처드를 대신하여 잉글랜드의 영주들과 성직자들로부터 왕에 대한 충성서약을 받아냈다. 67세의 그녀는 다른 여성들이 사망하거나 은퇴할 나이가 되어서야 드디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잡았다. 그녀는 잉글랜드에서 프랑스에 걸친 광대한 앙주 제국의 2인자로서 섭정 능력을 충분히 발휘했다. 잉글랜드보다 프랑스에서 주로 전쟁을 하고 있던 리처드 1세 대신 실질적 왕은 엘레오노르였다. 그녀는 진정한 여왕이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연륜과 지혜에 경의를 표했다. 점점 젊은 날 그녀와 관련된 추문들은 잊혀져 갔다.

며칠 뒤 엘레오노르는 남부의 행정구역을 돌아보기 위해 런던을 떠났다. 그녀는 왕국의 모든 것을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재정비했고 귀족들을 통솔했다. 대비는 어디를 가든 리처드를 대신하여 충성서약을 받았고 리처드의 이름으로 사법권을 행사했으며, 증서와 공문서에는 자신의 인장을 찍고 ‘신의 은총을 받은 잉글랜드 대비 엘레오노르’라는 서명을 했다. 또한 곡물, 유류, 직물의 거래를 위해 통일된 무게와 길이 단위를 쓸 것과 잉글랜드 전역에서 통용될 수 있는 새로운 기준 화폐를 발행할 것을 명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리고 서리에 병자와 가난한 자, 노인들을 위한 병원을 설립했다. _ 「아키텐의 엘레오노르(pp.349~350) / 앨리슨 위어 지음 / 루비 박스」


엘레오노르의 문장 앞면. [출처 : 위키피디아]
엘레오노르, 신의 은총으로, 잉글랜드의 왕비, 노르만의 공작부인이라고 쓰여져 있다.

리처드 1세가 3차 십자군에 참전했다. 그녀는 대비로서 왕국을 통치했다. 사자왕이란 별칭을 얻은 리처드가 전쟁에서 돌아오다가 신성로마제국 측의 포로로 잡혔을 때 그녀는 아들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한 협상과 모금에 직접 나섰다. 협조하지 않는 교황을 준엄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리처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막내 아들 존을 왕위에 올려 그를 도와 잉글랜드의 영토를 다스렸다. 외교와 손자손녀들의 결혼 협상 테이블에 직접 나섰다. 루머와 달리, 그녀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불화를 조장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움직였다. 특히 그녀가 77세의 나이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 1600여 km를 여행하여 외손녀인 카스티야의 블랑슈를 직접 데려다가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와 결혼시킨 일은 노년에도 꿋꿋했던 그녀의 의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로 유명하다. 1204년 88세로 사망한 엘레오노르는 남편 헨리 2세와 아들 리처드 1세가 묻힌 퐁트브로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묘석에는 이렇게 새겨졌다. “여기 세상의 모든 여왕을 능가하는 여왕이 잠들도다.” 빛나는 노년이었다.



퐁트브로에 있는 엘레오노르와 헨리 2세 묘소의 조상 [출처 : 위키피디아]


사후에도 루머에 시달리는 여왕 중의 여왕

하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엘레오노르의 빛나는 노년기의 업적은 잘 거론하지 않는다. 역사서를 찾아보아도 남편에게 반역 후 감옥에 유폐된 사실에서 그녀에 대한 기록이 멈춘 경우가 많다. 엘레오노르 사후, 섭정 기간의 업적 덕분에 잊혀졌던 젊은 날의 근거없는 추문이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여러 법령과 문서 등에 그녀의 훌륭했던 통치 사실이 객관적 증거로 남아 있건만, 사람들은 그녀의 인생을 평가하는 데에 엄연한 객관적 사실보다 루머를 더 즐겨 인용하곤 했다. 왜 그럴까. 왜 엘레오노르 그녀는 사후 8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루머에 시달려야 했을까.

중세 서유럽의 봉건제도는 땅의 분배에 기반하지만, 그러한 땅의 분배는 상속과 결혼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봉건제도는 땅과 여성에 대한 남성 지배자의 관리가 중요하다. 대부분의 상속녀나 귀족 여성들은 자신이 영지와 세트로 묶여 판매되거나 양도될 때, 이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엘레오노르는 의식했다. 자신의 힘을, 자신이 가진 것을.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독립적으로 행사하려 들었다.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두 번째 남편을 상위 주군이나 교회의 허락 없이 스스로 선택한 것은 물론, 자신의 상속자인 아들 편에서 남편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녀의 죄는 힘이 셌고, 가진 것이 많았고, 매력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성들은 그녀를, 그녀의 사후 평판을 관리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엘레오노르 사후 떠돌던 소문이 사실로 굳어진 것은 이런 강한 여성을 폄하하고, 그녀가 다른 여성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만 할 현실적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왕비가 된 매춘부’가 되었다.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엘레오노르가 살던 시기에 널리 자리잡게 된 성모 마리아 숭배이다. 마리아 숭배가 공식화된 것은 1095년 1차 십자군 원정 시기이다. 이후 12~13세기에 걸쳐 마리아 찬미가 발전해갔다. 유럽 각지에 ‘우리들의 성모’란 의미의 노트르담 성당이 건축되었다. 순결과 순종, 희생과 모성 등 여성의 긍정적 이미지는 모두 성모 마리아에 집중되었다. 반면 음란, 성욕, 방종 등 여성의 부정적 이미지는 12세기의 최고 이슈 메이커였던 엘레오노르에게 집중되었다. 엘레오노르는 반면교사의 훌륭한 모델이 되었다. 이 시기 문자를 알고 기록을 남기던 계층은 주로 기독교 수도승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또 전설을 즐기던 민중들의 욕구도 루머 확대 재생산의 한 원인이었다. 이야기에는 갈등구조를 보다 재미있고 극적으로 만들어줄 강한 악역이 늘 필요한 법이다. 영국인들은 내전을 종식시켜 플랜태저넷 왕조를 연 헨리 2세와 십자군 무용담의 영웅 리처드 1세를 긍정적으로 보고, 그 반대편 위치에 엘레오노르를 놓았다. 잉글랜드 혈통의 순종적인 젊은 미녀 로자몬드 반대편에 사악하고 질투심 많은 늙은 탕녀 엘레오노르를 설정했다. 다른 전설 속 악녀들의 전설도 엘레오노르의 행적으로 흡수되어 함께 전승되었다. 사실과 다른 엘레오노르의 전설은 이렇게 만들어져 구전되었다. 구전 문학이 거의 사라진 오늘날까지도 흥미 위주의 대중 역사서에 이 관점은 계승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그녀는 실재 언행 이상 과장되고 왜곡된 모습으로 전설과 역사에 남았다. 남성들과 성직자들은 그녀를 예로 들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렇게 멋대로 살면 결국 남편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말 테이니, 네년도 조심하라구!” 그래서 그녀의 빛나는 노년의 성공은 전설이나 역사서에서 잘 다루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훌륭함을 말하면 남성 지배자나 교회는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800여년이 흐르다 최근에야 객관적 연구를 통해 엘레오노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수정되기 시작했다.



프랑스 우표에 등장한 엘레오노르 [출처 : 위키피디아]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왔던 여자

그러므로 그녀에 대한 기존 루머와 세간의 평가를 통해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녀가 ‘왕비가 된 매춘부’라는 것이 아니라 이하의 세 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 이런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녀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았고 영향력이 컸다. 둘째,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대로 사람을 보고 평가한다. 셋째, 사람들의 평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 글을 쓰면서 난, 이 언니의 삶 자체보다 엘레오노르로 대표되는, 루머에 시달리는 강하고 매력적인 여자, 자신의 힘을 알고 행사하는 여자의 삶을 보는 세상의 편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그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 아니다. 그녀를 예찬하는 것도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고 재단하는 세상의 시선에서,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 여자는, 아니 한 인간은 얼마나 자유롭게 나 자신이 되어 내 길을 갈 수 있는가하는 점에 대해 난 말하고 싶었다. 한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의 시선이란 그들의 이익이나 환경 그리고 시대적 제약에 좌우된다는 것을 더불어 말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12세기 여성인 엘레오노르의 삶을 평가하는 시선을 따라가보면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엘레오노르 이 언니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이다. 사람들의 비판이 무서워 자신의 재능을 맘껏 드러내지도 못하고, 루머에 휩쓸릴 것이 두려워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대놓고 추구하지 못하는 나약한 우리 자신이다. 그러다 불행해지면 나와 다른 선택을 하여 맘껏 산 사람들을 비난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삼곤 하는 비겁한 우리 자신이다.

그러니 어떤 일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세상의 시선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때에는 엘레오노르, 이 언니를 보라.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왕관을 쓰고 자신의 길을 걸었다. 자신을 욕하는 세상에서 편히 살기위해 일부러 착해지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렇다, 그녀는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것과 아이들의 미래를 챙겼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에도 사후에도 루머에 휩쓸린 여자, 남성과 교회의 지배 이데올로기 강화에 이용된 여자, 엘레오노르. 이 언니를 보라. 그녀의 삶을 더듬어 따라가며 이 언니의 목소리를 들어라.

나 엘레오노르, 당신네들의 필요에 맞춰 날 어떻게 말하든 난 겁나지 않는다. 난 그저 내 인생을 열심히 산 여자일뿐. 단지 그것이 다일뿐.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단 한 가지. 타인들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져라. 타인이 아니라 너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여 네 것을 지켜라. 그들이 보는 것은 진실한 너 자신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대로, 자신들의 이익에 유리한 대로, 자신들이 사는 시대의 한계에 갇혀 너를 보고 있다. 그러니, 너를 욕하면서도 너가 가진 매력을 탐내는 자들 앞에 이렇게 말하라. 그래, 난 이런 여자다. 나를 사랑하려면 사랑하고, 아니면 조용히 꺼져.


[관련 기사]

-모두 불행한 건 아닌 중세여성, 모두 행복한 건 아닌 현대 여성
-원조 된장녀 마리 앙투아네트가 주는 교훈
-레이디 고다이버, 이 언니를 보라
-스스로 장기판에서 뛰어 내려 자신의 삶을 산, 왕비 안네
-복수를 위해 공주가 아닌 여전사가 된 여자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만장일치로 결정된 것은 무효다

$
0
0
모름지기 하늘을 위해 전개되는 논쟁은 최종적으로 불후의 명작이 된다. 그러나 하늘을 위해 전개되지 않는 논쟁은 최종적으로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어떠한 것이 하늘을 위한 논쟁인가? 그것은 힐렐의 샴마이의 논쟁이다. 하늘을 위하지 않는 논쟁이란 무엇인가?
모세에 대한 고라(Korah)와 그 일당의 논쟁이다.
미쉬나 「아보트」 편, 5,17

모든 가능성을 끝까지 모색한 후 최선의 안을 채택한다

《탈무드》의 규정에 의하면 살인죄에 해당하는 범죄 재판에 있어서 사건을 심리하는 재판관 중 적어도 한 사람은 처음부터 피고의 무죄를 변론하도록 되어 있다. 그 이외의 재판관들 또한 처음에 피고의 유죄를 주장했더라도 심리 도중 자신의 견해를 뒤집어 피고의 무죄를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 피고의 무죄를 주장한 재판관이 도중에 유죄를 주장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따라서 사형이라는 극형을 언도할 때 재판관의 만장일치로 무죄 판결이 내려질 수는 있었지만 만장일치로 피고의 유죄를 결정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었다. 즉 사형 판결을 내릴 경우 재판관의 만장일치로 결정된 사형은 무효라고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 까닭은 재판에 대해서는 언제나 두 가지 견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의견밖에 나오지 않을 경우 공정한 재판이 되지 못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장일치가 이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유대인들에게는 현실적으로 만장일치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의견이란 대립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하여 논의를 한다. 그것도 A안에 대해 B안이 있다고 하는 양자 대립이 아니다. B안이 나오기가 무섭게 즉각 그것에 반대하는 C안이 나온다. C안에 대해서는 또 다른 각도에서 D안이 제시된다. 이렇게 제시되는 의견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모든 가능성을 끝까지 모색한 후에 그들은 최선의 안을 채택한다. 또는 제한 시간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최후에 남은 두 개의 안 중 하나를 채택한다.


토론은 찬반이 아니라 자유로운 의견을 제시하는 것

그렇다면 왜 유대인은 의견 대립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논의나 토론을 전개해가는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앞에서 제시한 “모름지기 하늘을 위해 전개되는 논쟁은 최종적으로 불후의 명작이 된다”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예로서 「아보트」 편은 힐렐과 샴마이의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

1세기 전후에 활약한 유대의 2대 현인은 역시 힐렐과 샴마이다. 힐렐은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추구하며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쳤고, 샴마이는 “말을 삼가고 크게 실행하라”고 가르쳤다. 힐렐은 율법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편이었고 샴마이는 대단히 엄격했다.

그러나 “안식일 직전에 항해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힐렐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경고한 반면 샴마이는 일몰 전에만 귀항할 수 있다고 안식일 직전의 항해도 인정했다.

왜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힐렐은 엄격파, 샴마이는 유연파로 바뀐 것일까? 그 배경에는 두 사람이 살아온 환경의 차이가 있다. 상인 출신인 힐렐은 민법 해석에는 대단히 탄력적이고 유연한 편이었지만 기술 분야에 대해서는 이해의 폭이 좁았다. 한편 장인 출신인 샴마이는 상법 해석에 있어서는 대단히 엄격했지만 기술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기술자 자신들의 판단을 존중했다.

《탈무드》가 말하는 ‘하늘을 위해’란 공공 이익과 사회복지를 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일,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끊임없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야 한다. 또 사회 전체에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확신할 수 있는 발언이라면 절대로 타인에게 자신의 의견을 양보하지 않을 정도의 기개도 있어야 한다. 설령 쌍방이 서로 양보하지 않아 합의점을 찾아내지 못하더라도 공공 이익을 위한 의견들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정치 세력의 확장을 노리고 예언자 모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고라(Korah)와 그 일당이 제기한 이의는 하늘을 위한 논쟁이 아니었다. 파벌 확장과 관련된 대립은 엄히 삼가야 한다고 《탈무드》는 경고한다. 파벌 확장을 위한 의견 대립과 사회를 위한 의견 대립은 엄격히 구별하기 때문에 전자는 부정하고 후자는 긍정하는 것이다.


논의나 토론의 장(場)이라고 하는 것은 찬반양론으로 갈리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 부담 없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자리다. 찬반을 논하는 것이라면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껍데기를 깨고 과감히 밖으로 나올 필요가 있다.

일단 자신의 틀을 깨고 나오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시점에서 새로운 의견을 끊임없이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새로움이 창조적 아이디어를 창출해내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젊은 사람부터 발언해야 발전한다

유대인이 두 사람이 모이면 세 가지 의견이 나오고 세 사람이 모이면 다섯 가지, 아니 일곱 가지 의견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자신이 발언하는 도중에도 머릿속으로는 또 다른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공통점이다.

원칙적으로 유대인 사회에서는 젊은 사람부터 순서대로 발언권을 준다. 그 원형은 고대 유대 대법원이라 할 수 있는 산헤드린(Sanhedrin, 신약 시대까지 예루살렘에 있었던 고대 유대인의 최고 의결 기관)이다. 《탈무드》는 “산헤드린에서는 사건 심리 때 젊은 법관부터 순서대로 발언해야 한다”고 명한다.

젊고 미숙하다는 이유로 선배나 장로 앞에서 사양하거나 미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젊기 때문에 더욱 기발한 아이디어나 새로운 접근 방법을 도출할 수 있다고 여겼다. 또 젊은 생각을 차단해버린다면 진보도 출구도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연장자나 장로는 젊은 사람들의 발언을 공평하게 평가하는 분별력을 발휘하여 최후에 발언해야 된다. 이와 같은 사회적 풍토가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 사이에서 활발한 논의와 의견이 유감없이 개진될 수 있는 원천이 된 것이다.

보통의 유대인과 명석한 유대인의 차이는 전자가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데 비해 후자는 충분히 음미하지 않고서는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침묵이 금’이 되는 이유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심사숙고하고 마지막에 무게 있는 발언으로 대중을 단숨에 사로잡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미국 유학 시절에 교수와 학생 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한 교수가 필자에게 첫 번째로 의견을 제시하라고 말했다.

“훌륭하신 교수님들을 제쳐놓고 저같이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먼저 의견을 말하겠습니까. 저는 그만한 그릇이 못 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정중히 사양하자 교수는 말했다.

“여기는 미국이다. 겸손은 필요 없어. 미국에서는 20대에서 50대까지는 나이로 구별하지 않아. 물론 60대 중반이 지난 사람은 연장자로서 존경하지. 그 이하는 나이와 상관없는 실력의 세계다. 그 사람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사양할 필요 없어. 기회가 올 때마다 자신의 의견을 확실하게 발표하는 것이 중요해. 자, 발표해라.”

학문의 세계에서 진리 앞에 나이는 무의미하다. 정치 세계에서 또한 정책과 확실한 비전과 지도력이 연장자의 권위를 초월한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 및 시장의 흐름을 읽어내는 판단력과 행동력이 기존의 시장을 파괴하는 가운데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부를 형성해간다.

유대인의 피를 이어받는 조셉 슘페터는 ‘창조적 파괴’라는 말을 최초로 제안했다. 그런데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평등’에 대한 인식과 자각이 당사자에게 있어야 한다.

연장자로서 존경받는 나이가 될 때까지는 누구나 평등하다. 평등하기에 젊은 사람으로서는 연장자와 똑같은 참가의 기회를 가질 수 있고, 기성 권위에 대한 부정이나 기존 질서에 대한 무시도 가능하다.

창조적 파괴는 결과적인 것이며 창조를 위해 파괴하는 것도 파괴를 위해 창조하는 것도 아니다. 기존의 것에 대한 겸손한 자세나 배려 없이 오로지 새로운 것만을 추구한다면 결국 주변에 있는 기존의 모든 것을 모조리 붕괴해버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기존의 것에 대한 겸손한 자세’라는 말에는 선배나 주위 사람들의 인격을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탈무드》 또한 “그 어떤 사람도 경멸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개인적인 인격의 존엄성과 존재 의의는 그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박탈될 수 없으며 침해당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사형

사형을 언도할 경우, 판사들이 만장일치로 판결한 경우는 무효다. 그 까닭은 재판에서는 언제나 두 가지 견해가 있어야지 한쪽의 의견밖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공정한 재판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이다. 특히 사형이라는 극형을 언도할 때만큼은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면 사형을 언도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다.


[관련 기사]

-무엇이 그들을 부자로 만들었는가?
-부자가 되려면 밥을 사라
-이익의 절반을 가지려면 사업을 한다
-관리 소홀의 책임도 배상한다
-도장을 찍기 전에 책임자를 분명히 한다



img_book_bot.jpg

유대인의 비즈니스는 침대에서 시작된다테시마 유로 저/한양심 역 | 가디언
이 책의 저자 테시마 유로는 “유대인이 다른 민족에 비해 능력이 월등히 뛰어나서 부자가 많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수천 년 동안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전해져 내려온 《탈무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유대인처럼 《탈무드》를 공부하고 실천하면 부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저자 테시마 유로는 일본인 특유의 꼼꼼함으로 방대한 《탈무드》로부터 ‘돈과 비즈니스 핵심’만 가려 뽑아 우리에게 내놓는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현진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준 최초의 책

$
0
0

짧지도 길지도 않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가려 보자면 아마 20대 80정도가 아닐까.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이라는 것이 이득이 되는 선택, 손해가 나는 선택 혹은 옳은 일과 잘못한 일이라는 의미로 추려 보아도 역시 20대 80, 혹은 10대 90정도일 것 같다. 아무리 자신을 잘 봐주려 해도 75대 25정도일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일은 좀 가혹하다, 라고 여길 만한 일이 작년 봄에 일어나 아직까지 현재 진행 중이다. 그 전에도 콧노래를 부르듯 평탄한 길을 밟아 온 건 아니었지만 지난 30여년의 인생이나 그 중의 힘들었던 순간들이 어설픈 게임 튜토리얼로 여겨질 만큼 잔혹했다.

작년 가을에 소개한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을 쓴 정치학자 라종일 선생은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고통은 많고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이야기를 빼앗기는 것’이라고 한다. 강민철 사건을 라 선생께서 굳이 책으로 쓴 이유도 그에게 이야기를 되찾아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의 이 말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야기가 된 고통은 치유된다’는 것이다. 고통을 이야기로 풀어놓을 수 있다면 치유가 시작된다는데, 그렇다면 나의 치유는 아직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는 것 같다.

이게 내 마지막 직장이라고 결심하고 어렵게 입사했던 회사를 작년 여름 나왔고, 직장과 별도로 준비하고 있던 원고 작업을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하나씩 컴퓨터 하드 한켠에 밀쳐 두었고, 그나마 책 읽는 것이 힘이 되어 즐겁게 하고 있던 예스24의 이 코너 작업도 1월 한 달 꼬박 쓰지 못했다. 도서관에 가는 것조차 전혀 즐겁지 않은 삶의 지경에 다다르자 10대나 20대 때 오기로 중얼거리던,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어차피 나를 강하게 만들 것이라는 구절도 전혀 힘이 되지 못했다. 그건 내가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이 진짜로 나를 죽일까봐. 또라이 테크를 착실하게 밟아 온 인생답게 새파랗게 어렸을 때에 좌우뇌 대사물질 불균형과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이 복합적으로 덮쳐 왔을 때 죽으려는 생각이나 죽으려는 짓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이후로는 그런 고통을 떨쳐 버리려고 필요 이상으로 격렬하게, 열심히 산답시고, 현실을 잊으려고 별 짓을 다 하다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타인에게 입히고 나도 입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는 지금과 달랐다. 엄연히 ‘죽으려고 한 것’이지,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더럽고 짜증나고 슬퍼서 내가 못살겠네, 하고 내가 죽으려고 하는 것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과 사건과 슬픔 앞에서 힘을 내려고 웃어가면서, 이런저런 일을 해보려고 궁리도 하면서, 찾는 데가 있으면 으쌰으쌰 힘을 내어 가기도 하면서, 그러다가 휴대폰 배터리가 깜빡깜빡 다 되듯이 힘이 천천히 떨어져 서서히 아무데도 못 가게 되고 결국 방 안에만 틀어박히는 지경이 되자 미래에 대한 비관적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들지 않고, 결국 극단적인 돌파구만 남은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죽을 힘으로 살아라, 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되는 사람들은 죽을 힘이 있는 게 아니라 점점 힘이 빠져나가서 죽을 힘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거구나, 하고 뼛속까지 이해하게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무엇 하나도 장담할 수 없는 인간이 되었다. 하루에 서너 시간씩이라도 활기차게 걸어 다닐 수 있던 시절은 남 일 같고, 집에 틀어박혀 허옇게 부었다. 우울해하는 사람에게 재미있는 것을 해 보자고 책이나 영화를 권하던 것도 옛날 이야기다. 재미있는 것이 없으니 글을 쓰는 일이 되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 글 쓰는 사람들이란 원래 다른 사람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은 욕망이 남보다 배는 강한 사람들인데 나는 이제 재미라는 단어가 뭔지도 잊어버릴 지경이다. 이런 상태니 누굴 만나고 싶을 리가 없다. 인생의 극한 시기에 있을 때 사람들은 흔히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려면 좋은 소식을 전하고 그들을 즐겁게 해 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데 늘 변함없는 우는 소리만 고장난 라디오처럼 나오는데 송구하고 미안해서 과연 누구를 만만하게 괴롭힌단 말인가. 술독에 빠지는 것도 좋은 선택이 아니다. 술로 녹일 수 없는 압도적인 고통과 고독 앞에서 알콜까지도 무력해지는 건 믿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적어도 고통을 둔화시키기라도 했었는데, 오히려 고통은 발톱을 간 맹수처럼 정교해졌다.

제일 괴로운 것은, 하고 싶은 것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몇 권의 에세이와 영화 작업 한 편, 게임 시나리오 몇 개, 지금까지 대단히 성공한 작업은 없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쭉 좋아했기 때문에 기회가 있으면 늘 덤벼들어 열심히 썼고 아무리 짓눌려 있을 때에도 그 일을 좋아하는 마음까지 눌린 적은 없었다. 살아 있는 한 즐거운 일은 있을 것이고, 부귀영화는 못 누린다 하더라도 내 이야기를 재미있어 해주는 사람이 있는 한 그만큼 고맙고 복된 일은 없다고 쭉 생각하면서 애써서 살았다. 그런데 웬걸,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좋아하는 것이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러다간 정말로 큰일이 나는 게 아닌가 덜컥 두려운 마음이 머릿속으로 이야기의 근원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 나도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런 이야기, 이야기를 읽거나 쓰게 되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게 만들었던 그런 이야기.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늙은 나귀 좀생이』 라는 동화책이다. 어린이책으로 유명했던 ‘계몽사’에서 『디즈니 그림 명작』 이라는 그림책을 시리즈로 낸 여러 권 중 한 권인데, 애니메이션으로도 유명한 『마법사의 제자』 도 있고, 도날드 덕이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으로 나오는 식으로 명작 동화들과 디즈니 캐릭터의 만남이 꼬마들에게 꽤 인기를 끌었다. 30대 이상 독자들은 어렴풋이 기억하실지도 모르겠다. 『늙은 나귀 좀생이』 와 『추위를 싫어한 펭귄』 은 그 디즈니 시리즈 중 별로 인기 없는 책들이었는데, 나는 이 두 이야기가 정말이지 죽도록 좋았다. 딱 하나만 고르라면 『늙은 나귀 좀생이』 인데, 나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 항상 울었고, 지금도 떠올리면 늘 눈물이 난다. 새 책을 읽을 힘이 없어 최초의 독서를 심폐소생술처럼 계속 떠올리면서, 그렇게 살 힘과 내가 기어코 쓰고 싶은 글의 원형, 살아야 하는 힘의 원형을 찾아 헤매는 이 와중에 독자 여러분께도 좀생이의 이야기를 해 드릴까 한다.

어느 가난한 집에 소년이 살고 있다. 이 집에는 좀생이라는 늙은 나귀가 있는데, 아주 착한 나귀다. 소년은 좀생이와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낸다. 밭을 함께 갈고 일하면서, 둘은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다. 착하고 순한 좀생이는 외로운 소년의 좋은 놀이 친구가 되어 주지만 엄하고 무서운 엄마는 결국 좀생이를 팔기로 하고, 소년에게 장에 가서 좀생이를 팔아 오라고 호통친다. 못 팔아 오면 혼날 줄 알아라! 엄마의 호령은 추상 같고, 좀생이와 헤어지기 싫은 소년은 울면서 장에 간다. 좀생이가 어떤 집에 팔려갈지도 걱정이다. 좀생이는 너무 늙어서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나마 마음 착한 주인이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소년은 희망을 갖지만 늙고 초라한 좀생이를 팔려고 가져가지만 시장에서는 짓궂은 아저씨의 놀림거리가 된다.

힘도 없고 털 빠지고 늙은 나귀를 팔러 왔다며 킬킬대는 어떤 아저씨는 약한 좀생이의 등에 강제로 올라타고, 아이는 좀생이를 사 주겠다는 사람도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른다. 좀생이를 사겠다는 사람이 하나 있긴 한데, 그는 무두장이다. 그나마 좀생이의 털색이 조금 특이해서 가죽으로는 괜찮겠다면서 싼 값으로 좀생이를 인수하겠다고 하지만, 좀생이를 벗겨질 가죽으로 팔 수 없는 아이는 엄마의 호통이 두려워 그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지친 좀생이는 소년 옆에서 슬픈 눈을 하고 있다. 둘은 도대체 어쩌면 좋을까.

그 때 차림새가 허름하지만 마음이 착해 보이는 청년 하나가 둘에게 다가온다. 그 나귀 팔려고 하니? 혹시 가죽을 탐내는 걸까, 아이는 덜컥 놀란다. 선한 눈을 가진 청년은 좀생이를 살펴본다. 아이는 슬프게 말한다. 우리 좀생이는 늙어서 무거운 짐을 끌지 못하고, 힘도 세지 않아요. 청년은 웃으며 말한다. 나는 아주 얌전하고 착한 나귀가 필요하단다. 일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야 하는데, 아내가 임신 중이거든. 우리는 천천히 가야만 하는데, 조심스럽게 아내를 태워 줄 착한 나귀가 필요하단다. 좀생이는 고기가 되거나 특이한 빛깔의 가죽이 되지 않아도 되고, 죽도록 수레를 끌거나 농사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소년은 기뻐서 외친다. 좀생이를 데려가세요! 좀생이는 정말 착해요! 눈빛이 선한 부부와 함께 가게 된 좀생이도 기뻐 보인다. 소년은 기쁘게 좀생이와 작별한다. 좀생아 잘 가, 잘 가! 좀생이는 몸이 무거운 아내를 태우고 타박타박 길을 가고, 소년은 계속 손을 흔든다. 눈이 선한 청년의 이름은 요셉이고 배부른 아내의 이름은 마리아다. 그들은 호적 조사 때문에 베들레헴이 가는 길이다. 좀생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아마도 좀생이는 그 유명한 마굿간에서, 그 유명한 구유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이 이야기에 그토록 끌렸던 이유를 찬찬히 생각해 보니 아마 본능적으로 늘 꿈꿔 왔던 것 같다.

상품성 없는 것들의 구원을.
시장에서 놀림감이나 되는 것들의 자리를.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호화로운 말과 마차를 끌고 오지 않고 어린 나귀를 택했던 예수도 어지간히 반골이었다. 뭐랄까, 그는 ‘쫄리는’ 것들의 편이었던 사람인 것이다. 질식할 것 같아 괴로워하면서도 계속 좀생이를 생각하고 있는 한,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은 것 같다. 그것만이 희망이다. 벌써 입춘이 지났다. 혹시라도 괴로워하고 있는 분이 계시면, 그 분에게도 좀생이가 희망이 되어 주길. 좀생이를 붙잡고 함께 가자, 봄으로…


(※ 이미지는 2012년 2월 22일 인터뷰 사진으로 본 칼럼과 관계 없습니다)


[관련 기사]

-김현진의 도서관 예찬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을 기억하시나요?
-단 5권의 책만 소장할 수 있다면, 시드니 셀던
-빨강머리 앤 뒤집어보기 “어휴, 언니, 고생 많이 하셨구려”
-김현진 “돈을 많이 벌면 A급 용역 깡패를 사서 마음 편하게 시위하고 싶어요”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내가 이야기를 ‘쓰고’ 싶게 만든 어떤 남자

$
0
0
내가 최초로 좋아했던 이야기는 지난번에 소개한 『늙은 나귀 좀생이』 였지만, 이야기를 ‘쓰고’ 싶게 만든 사람은 어떤 남자다. 한 잡지에 무려 381개의 이야기를 기고할 정도의 이야기꾼이었고, 잡화상 직원에 약제사, 죄수, 은행원, 만돌린 연주자 등 갖가지 직업을 전전했으며 ‘윌리엄 시드니 포터’라는 지극히 미국적인 본명을 지녔으나 세상에는 ‘오 헨리’라고 알려져 있는 그 남자. 보통 어떤 작가를 가장 좋아하세요? 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오 헨리를 좋아합니다. 라고 대답하면 뭐랄까, 질문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아주 노골적으로 김샌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잠깐 동안은 ‘필립 로스를 좋아합니다.’ 혹은 ‘노먼 메일러를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한 적도 있긴 했다. 그렇게 대답했을 때는 김샌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게 더 불쾌해서, 그 반작용으로 이후 그런 걸 묻는 사람에게 아주 큰 소리로 저는요, 오 헨리를 좋아합니다!!! 라고 외치게 되었다. 좋아해요! 정말 좋아한다구요! 나는 오 헨리가 좋다고!!!

오 헨리(O. Henry 1862-1910), [출처: 위키피디아]

아마 김샌다는 표정을 지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학창 시절 교과서에 단골로 나오던 『마지막 잎새』로만 오 헨리를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가 생전에 쓴 엄청난 양의 이야기 중 한국에 번역 출간된 것은 아주 미미하고, 그래서 『마지막 잎새』가 오 헨리 읽기의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 된 사람이 많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오 헨리’라고 하면 삶의 희망을 잃은 처녀를 위해 밤새 담벼락에 잎사귀를 그려 넣고 숨을 거둔 노인 이야기를 떠올리며 아주 감동적이고 휴머니즘이 듬뿍 들어 있는-뭐랄까, 마치 잡지 《샘터》나 《좋은생각》 같은?-그런 이미지의 작가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천만의 말씀, 오 헨리의 매력은 심술궂음이다. 인생이 뭐 그런 거 아니겠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거기에 더해 연민. 그리고 유머. 가끔 사람들이 오해하는 싸구려 감동이나 휴머니즘과는 요만큼도 관계 없는 사람이다. 『마지막 잎새』처럼 착해빠진 이야기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이야기 하나 정도나 될까.

크리스마스를 맞은 가난한 가정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시계줄을 선물하기 위해 자랑거리인 머리카락을 잘라 팔고, 남편은 아내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에 달아 줄 생각으로 시계를 팔아 머리 장식을 산다. 얼핏 가난하지만 행복한 부부의 참 착한 이야기 같지만 오 헨리의 상징인 아이러니는 여전하다. 아내는 그 갖고 싶던 머리핀을 얻었는데 머리카락이 없고, 남편은 드디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품인 귀중한 시계를 달 수 있는 시계줄을 얻었는데 이제는 시계가 없다. 은행원으로 일했던 오 헨리는 공금횡령 혐의를 받아 온두라스로 도망쳤는데,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서 순순히 붙잡혔다. 그렇지만 어린 아내는 병이 깊어 곧 죽어 버리고 만다. 애도할 틈도 없이 5년간의 복역을 언도받은 그는 죄수로 지내며 감옥 약국의 야간 담당 약제사로 일했다. 오 헨리라는 필명의 유래가 이 감옥의 간수 중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는 설도 있다. 수감 태도가 좋아 모범수로 조기 석방되었는데, 어느 이야기에나 끝부분에 크고 작은 반전을 넣거나 살짝 이야기를 비틀어 이른바 ‘오 헨리 식 엔딩’으로 알려진 ‘트위스티드 엔딩 TWISTED ENDING’이라는 문학 스타일까지 만들어낸 작가지만, ‘트위스티드 엔딩’은 어쩌면 그의 인생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하나 있는 딸에게 ‘아빤 횡령해서 감옥 간단다’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출장이라고 둘러대야 했고, 재혼은 불행했다. 첫 번째 아내는 죽어서, 두 번째 아내는 산 채로 그를 떠났다. 이후 알코올 중독과 당뇨 등으로 병에 시달리다 윌리엄 시드니 포터는 불과 47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은 오 헨리 단편 중 잘 알려진 이야기인 『경찰관과 찬송가』 의 배경이 된 교회에서 열렸다고 한다.

노숙자 날건달로 사는 『경찰관과 찬송가』 의 주인공은 월동 준비를 궁리하다가 공짜로 재워 주고 밥도 주는 무료 숙소는 바로 감옥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봄이 오기 석 달 정도 감옥에서 지낼 수 있을 만큼의 경범죄를 수도 없이 저지르지만, 도대체 체포되지가 않는다. 다들 그의 행패에 별 관심이 없거나 그냥 용서해 버리는 바람에 따뜻한 공짜 숙소의 꿈은 점점 멀어져 가기만 한다. 이 겨울을 어떻게 나나, 한숨을 쉬고 있는 그의 귓가에 교회에서 누군가가 오르간으로 연주하는 찬송가 소리가 들려온다. 이 찬송가가 그의 마음을 묘하게 흔든다. 그래 나도 한 번 제대로 성실하게 살아 보자, 내일 직원으로 써 준다고 한 사람에게 찾아가 보자, 하는 결심을 하자마자 순찰 중이던 경관이 그를 불러세운다. 수상한 인물로 여겨진 그는 약식 재판에서 찬송가를 듣기 전에 그토록 원했던 3개월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버린다. 주인공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찬송가가 흘러나온 바로 이 교회에서 세상과 작별하다니, 오 헨리는 자기 인생의 끝조차 트위스티드 엔딩으로 맺어 버린 셈이다. 그가 죽은 후에 ‘나와 친구였던 오 헨리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하는 식으로 그와의 친분을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회고가 뜬금없이 쏟아져 나왔다는데. 오랫동안 오 헨리와 교류했던 편집자는 그 이야기들을 두고 ‘지금 오 헨리는 천국에서 하이볼 잔을 기울이며 이 사람들을 차갑게 비웃고 있을 것’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고 한다.

내가 오 헨리를 만나게 된 것은 초등학교 때였는데, 어린애 주제에 문학적 취향이 좀 고상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만 그냥 운이 좋았다. 사촌언니의 집에서 버리는 책을 얻었는데, 일어 중역판이었는지 번역문도 다소 어색하고 종이질도 소위 말하는 ‘똥종이’에 표지가 너덜거렸지만 나는 그 이야기들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도대체 왜 빠져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너무너무 좋았다. 물을 잘 맞춰 훌륭하게 끓인 라면에 가장 적정한 순간에 톡 하고 깨뜨려 넣은 달걀, 그리고 국물에 말아 먹을 찬밥 한 그릇까지 완벽하게 준비된 밥상처럼 냉소와 연민, 그리고 유머가 기막히게 어우러져 있었다. 어른이 되고 보니 그것들의 조화는 감히 홍어 삼합에 막걸리와도 견줄 만했다. 그 책을 읽고 또 읽다 말고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떠올랐던 것 같다. 나도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 물론 쓰고 싶다고 되는 건 아니니 지금은 다만 죽기 전에 딱 하나 이루고 싶은 꿈일 따름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이야기를 쓰는 법을 배우려고 서사창작과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담당 교수님인 김경욱 선생님도 이 질문을 하셨다. 넌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 나는 늘 하던 대로 선생님, 저는 오 헨리를 정말로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하고 대답했는데, 이번에는 김샌다는 얼굴 대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교수님은 순간 동정과 의아함이 뒤섞인 표정이 되시더니 나직하게 다시 물으셨다.

“근데… 넌 왜 그렇게 쓰냐?”

물론 대꾸할 말이 있을 리 없어 땅만 보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아니, 그럼 톨스토이를 좋아하면 톨스토이처럼 쓸 수 있나요! 코맥 맥카시를 좋아하면 당연히 그 사람처럼 쓸 수가 있는 겁니까! 하고 부르짖었지만 물론 속으로만 외쳤다. 어째 김경욱 교수님은 웬지 누굴 좋아하면 당연히 그 사람 같은 글을 휘릭 써내실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어서 전혀 저항하지 못하고 그냥 나도 나에게 물었다. 야… 넌 도대체 왜 그렇게 쓰냐? 그 질문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몇 년 전에 나는 휴일만 되면 대낮에 단골 순대국집에 홀로 앉아 술국 하나 시켜 놓고 막걸리를 홀짝홀짝 마시며 책을 읽곤 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때 가장 많이 가져간 책도 오 헨리였다. 저명한 영문학 교수가 번역한 두꺼운 책이었지만 옛날의 조악한 일어 중역이 간혹 그립기도 했다. 읽고 또 읽어도 사골처럼 재탕 삼탕해도 맛좋은 국물이 나와서, 나는 오 헨리가 끓여주는 그 국물을 계속 받아 마셨다. 그건 대낮의 막걸리와 좀 지나칠 정도로 잘 어울렸다. 나는 요즘 어떤 사정이 있어 술을 마시지 않지만, 정말로 오 헨리가 사후 세계에서 하이볼 잔을 기울이고 있다면 죽은 후에 얼른 그가 하이볼을 마시고 있는 곳으로 뛰어가서 꼭 함께 한잔 마셔보고 싶다. 나같이 시시한 사람은 상대 안 해 줄지도 모르니까 죽기 전에 꼭 “근데… 넌 왜 그렇게 쓰냐?”라는 질문에 해답을 내놓아야 할 텐데. 이러다간 오 헨리와 막걸리 한 잔 기울일 기회가 와도 이런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 내가 선생님, 정말 존경합니다! 라고 외치면 그는 막걸리를 마시며 나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나를 존경한다면서… 자넨 왜 그렇게 쓰나? ” 아, 생각만 해 본 것으로도 무참하게 섬뜩하다…

이 상황이라면 사후 세계에서도 다시 일백 번 고쳐 죽고 싶을 테니 저런 질문을 받지 않도록 앞으로는 애 좀 써 보려 한다. 문학을 하는 분들은 다 멋있고 근사한 이유나 뜨거운 예술혼이 있으시던데, 내 경우는 그냥 다 오 헨리와 막걸리 한 잔 해 보기 위함이다. 물론 시시한 꿈이다. 하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장 매력적으로 써낸 남자를 이토록 사모하고 있으니 나로서도 별 수 없다. 모든 시시한 것들을 사랑하는 채로, 그 남자와 장수막걸리 한 잔 하기를 꿈꾸면서, 오늘도 하루하루 걸어가는 수밖에. 헨리 선생님, 기다려 줘요. 저 열심히 할게요… 아참 나 영어 못하는데 어쩌지? 하고 시시한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연민 어린 눈으로 늘 바라본 그의 책 중 오늘은 『반짝이는 것은 모두』를 읽어야겠다. 오 헨리가 어울리지 않는 밤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쓸쓸한 당신이라면 꼭 가장 쓸쓸한 순간에 오 헨리를 만나 보기를. 친절하진 않지만 한없이 다정한 헨리 씨를. 그는 약제사였지만 오히려 자기 자신이 약이었다. 특히 가슴이 뻥 뚫린 사람들에게 즉시 효과를 발휘하는 그런 약. 해당 증상을 가진 분이 있다면 꼭 복용해 보시길. 물건이 좋지 않으면 권하지 않아요, 그럼요.


[관련 기사]

-빨강머리 앤 뒤집어보기 “어휴, 언니, 고생 많이 하셨구려”
-문장의 한구절이 인생에 혁명을 일으킨다
-박완서에게 이별을,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재회를 고하다
-김현진의 도서관 예찬
-김현진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준 최초의 책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Viewing all 2529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


<script src="https://jsc.adskeeper.com/r/s/rssing.com.1596347.js" async> </script>